정윤 작가님의 글쓰기 수업 11강 숙제 - 여행의 순간
손에 든 아이스크림이 녹고 있었다. 아이들은 재빨리 허리를 숙여 아이스크림에 입을 갖다 댔다. 그래도 흘러내리는 건 어쩔 수 없었는지 금세 손가락이 끈적거렸다. 나는 씻을만한 곳을 찾아 주위를 살폈다. 마침 길가의 수도꼭지가 눈에 들어왔다.
흐르는 물줄기에 손을 비비고 있을 때 뒤쪽으로 대기 행렬이 생겼다. 모래 투성이가 된 발을 씻으러 온 사람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바닷가였다. 오는 동안 휴대폰 지도에만 코를 박고 있느라 몰라봤을 뿐.
쨍한 햇살이 푸른 물결 사이로 다이빙 중이었다. 화려한 수영복과 형광색 반바지 차림으로 물놀이를 즐기는 인파 속에서 이곳이 휴양지라는 사실이 실감 났다.
우리도 튜브 가져올 걸, 수영복은 있는데.
공 있잖아요, 어제 렌터카 사무실에서 준 거.
맞다, 어제 받은 기념품이 있었지! 깜빡 잊고 있던 기억을 아이들이 꺼내주었다. 차 트렁크를 열자 고무공이 납작하게 누워 있었다. 남편이 입으로 바람을 불어넣었다. 공이 점점 부풀어 오르면서 알록달록한 글씨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웰컴 오키나와.
우리는 공을 안고 바다로 뛰어갔다. 수심이 어른 종아리쯤 되는 지점에 자리를 잡았다. 물속의 발가락이 훤히 보일만큼 맑고 투명한 바다였다. 공을 던지고 받을 때 튀어오른 물방울이 얼굴을 간질였다.
문득 어제 새벽이 떠올랐다. 평소와 달리 깨우지 않아도 벌떡 일어나 순식간에 나갈 준비를 마치고 기다렸던 아이들. 짙은 안개를 뚫고 공항으로 달려가는 내내 차 안에는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그랬던 우리가 지금 오키나와 바다에서 공놀이를 하고 있다. 묘한 설렘이 밀려왔다. 하늘에는 대형 풍선을 띄운 것처럼 크고 하얀 구름이 걸려 있었다. 애니메이션에서 자주 보던 광경이었다. 마음이 구름처럼 부풀었다.
순간 팔에 힘이 들어갔는지 아니면 바람 탓인지 몰라도 공이 남편의 머리 위로 넘어갔다. 남편이 잡으려고 손을 뻗었지만 아슬아슬하게 비껴갔다. 파도가 잽싸게 공을 채갔다. 애가 탔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공과의 추격전이 벌어지다니, 이 낯선 바다에서, 하필이면.
어느새 남편이 해변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나도 따라가다 멈춰섰다. 아이들의 손을 잡고 서서 한 곳만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의 상체가 점점 작아지다 못해 급기야 목밑까지 물이 차올랐다.
아빠!
그는 듣고 있을까, 이 다급한 외침을. 나도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한데 정작 입 밖으로는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마치 가위에 눌린 것처럼.
남편은 운동신경이 뛰어난 사람이다. 발이 빨라 초등학교 시절 육상부에 뽑혀갔을 정도였고, 수영도 잘한다고 했다. 형들과 낚시 갔을 때 장비가 물에 빠지면 뛰어들어 건져낸 사람이 자신이었다고, 오래전에 들은 말들이 뒤죽박죽 뇌리를 스쳐갔다.
나의 시선은 온통 그에게 박혀 있었다. 수면에 반사된 햇빛이 눈을 찔렀다. 눈두덩이가 따끔거렸다. 파도가 일렁일 때마다 시야가 흐려지고 발밑이 꺼지는 기분이었다.
아빠, 아빠!
딸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저만치서 손 흔들며 다가오는 얼굴, 남편이었다. 아이들이 첨벙첨벙 물을 밟고 달려가 안겼다. 그가 점점 가까워졌다. 숨을 몰아쉬면서도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웃을 수 없었다. 심장이 거칠게 뛰면서 볼이 화끈거렸다. 왈칵 눈물이 날 것 같아 고개 돌린 채 그의 등을 찰싹 때렸다. 그깟 공 없으면 어때서, 무슨 일이라도 났으면 어쩔 뻔했냐고! 남편이 머쓱한 표정으로 물기를 닦는 척 하면서 말했다. 여기 와서 처음 받은 기념품이라 놓치고 싶지 않았다고, 근데 나중엔 발이 닿지 않아 정말 간이 철렁했다고, 또 매를 버는 소리를 했다.
다시 한번 그의 등짝에 손바닥 도장을 남겼다. 한 번만 더 그래봐, 아주 그냥. 그가 슬며시 웃으며 공을 내밀었다. 나는 차 트렁크에 처박듯이 공을 던져 넣었다. '웰컴 오키나와' 글자가 위아래로 튕겨 올랐다 내려가길 반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