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지에서의 그날 밤

11주 차~여행의 한순간을 기록하라(오감 활용 하기)

by 박영선


피지에서의 그날 밤. 포상휴가로 떠난 피지와 뉴질랜드 여행의 첫날이었다. 호주에서 유학 중이던 딸과 우리 일행은 피지에서 합류했다. 여행지에서 만난 우리 가족은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


바다는 유리처럼 맑았고, 수면 아래로 푸른색이 겹겹이 잠겨 있었다. 햇살의 반짝임이 짙은 물빛 위로
얇게 흩어졌고, 맨발로 밟은 모래는 낮 동안 품었던 열기를 아직 놓지 않은 듯 미지근했다.


원주민들이 마련한 선상 파티가 열렸다. 기타 소리와 파도 소리가 겹쳐 들리는 사이, 처음 맛보는 음식과 와인을 천천히 음미하며 여행의 설렘 속으로 서서히 빠져 들었다. 일행들은 자리를 옮겨 가면서 즐겁게 대화를 하기도 하고, 원주민들과 함께 사진도 찍으면서 여행의 첫날을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 우리도 각자 흩어져서 파티에 흠뻑 빠져 자유로운 분위기를 만끽하고 있었다. 나와 딸은 예쁘게 플레이팅 된 디저트를 찍고 있었다.


바로 그때 원주민 청년이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내게 인사를 하길래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청년이 딸에게 꽃다발을 건네며 말을 하고 있었다. 나는 무슨 이야기가 오가는지 알지 못한 채 딸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을 알아듣기 힘든 영어로 둘은 대화를 이어갔다. 그 순간, 딸이 갑자기 내 팔을 붙잡았다.

손에 힘이 들어가 있었고, 나는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엄마…”
말끝이 흐려졌다. 딸의 표정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제야 나는 서 있던 청년을 다시 바라보았다. 환하게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의 의미를 알 수가 없었다. 딸은 내 쪽으로 몸을 바짝 기울이며 거의 속삭이듯 말했다.

“빨리 아빠를 찾아야 할 것 같아.”


나는 와인 잔을 든 사람들 사이를 가르며 남편을 찾았다. 음악 소리는 여전히 흐르고 있었고, 웃음과 박수 소리가 밤공기를 흔들고 있었다. 와인 잔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남편은 일행들 틈에서 와인잔을 들고 웃고 있었다. 나는 그의 팔을 잡아끌었고, 딸과 그 청년이 서 있던 곳으로 갔다.


딸이 숨을 고르며 말했다.
“옆에 있는 이 남자가 처음 본 순간 내가 마음에 들었다며 아빠에게 결혼해도 되겠느냐고 물었는데 아빠가 오케이 했대. 남자의 아버지가 피지에서 가장 부자인 추장이며, 자신도 능력이 있으니 자신의 세 번째 부인이 되어줄 수 있겠느냐고 말하고 있어.”


그 말을 듣자 주변의 음악 소리가 순간 멈춰진 것 같았다. 자초지종을 들은 남편은 그제야 사태 파악을 한 듯 고개와 손을 크게 내저었고, 딸도 당황한 얼굴로 오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청년은 딸과 한참 동안 대화를 하였고 그제서야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손을 흔들더니 자리를 떴다.


우리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함께 간 일행들도 그 상황을 지켜보았고, 어떤 이는 하마터면 원주민에게 시집보낼 뻔했다며 소리 내어 웃었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붉게 물들던 하늘은 이미 어두워지고 있었고, 아까보다 바람이 조금 차가워졌다. 여행의 첫날밤은 그렇게 저물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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