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바람이 불어오는 곳

#정윤작가님 소설반 글쓰기 숙제 - 11 (여행 글쓰기)

by 빛나는

지난여름, 일본의 소도시 가고시마에 다녀왔다. 활화산 '사쿠라지마'로 이름난 곳이었다. 체감 온도가 35도에 육박하는 더위속에서 그 산을 가까이서 보기 위해 언덕길을 올랐다.


내리쬐는 태양 때문인지 20분 남짓한 짧은 등산에도 옷이 땀으로 젖었다. 더 이상은 못 가겠다고 생각한 순간, 전망대 입구를 알리는 표지판이 나타났다. 쿵쾅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무거운 발을 하나씩 옮겼다. '다 왔다, 다 왔어.' 반복해서 외치며 발걸음을 내디뎠다.

후덥지근한 바람과 함께 눈앞에 펼쳐진 풍경. 작은 화산은 회색 잿더미 대신 새하얀 구름 모자를 쓰고 있었다. 옅은 파란색 하늘과 짙은 남색 바다가 묘하게 대비되어 하나의 작품 같은 경관이 만들어졌다. 한동안 어린아이처럼 입을 벌리고 서있었다. 지저귀는 새소리도 하나 들리지 않는 고요 속에서, 미세한 짠내가 코끝으로 스쳤다. 잔잔하게 머리칼을 간질이는 공기가 조금은 시원하게 느껴졌다. 멀리서부터 불어온 바람결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전망대에는 나 혼자 뿐이었다. 내 입에서 나오는 탄식만 귓가에 울렸다. 평온한 침묵이 어쩐지 어색했다.

그때는 아이가 두 돌을 막 지났을 무렵이었다. 종일 아이와 붙어 있다가 어린이집을 보내면 잠시라도 육아에서 해방될 거라 기대했다. 그런데 적응 기간이 길어지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등원 후, 1~2시간 지나면 다시 아이를 데리러 가야 했다. 오가는 시간까지 포함하면 무엇 하나 제대로 시작하기 어려웠다. 미뤄두었던 일들을 해보려다 결국 손을 놓는 날이 많아졌다. 그렇게 한 두 달이 흐르는 동안, 감정은 눈에 띄게 가라앉았다. 변화를 알아챈 남편은 별 말없이 바람을 쐬러 다녀오라고 등을 떠밀었다.


항공사 사이트에서 여행지를 고르다 문득 생소한 지명이 눈에 들어왔다. 검색도 하지 않은 채, 예약을 했고 그렇게 이곳까지 왔다. 일정도 전혀 짜지 않았고, 그냥 끌리는 대로 아무렇게나 움직이는 혼자만의 여행이었다. 아기를 낳기 전까지 나는 철저한 계획형이었다. 시간표 대로 하루를 살아가는 게 익숙했다. 육아를 시작하고 나서는 하루의 계획이 흐트러지는 걸 수없이 지켜봤다. 리로는 어쩔 수 없다고 여기면서도 마음은 자주 무너졌다.


내가 서있던 곳에서는 아이가 부르는 '엄마'라는 소리도, 온종일 울려 퍼지던 동요도 들리지 않았다. 자유롭게 불어왔다가 또다시 어딘가로 날아가는 바람만이 곁에 있었다. 인생은 원래 마음대로 되질 않는다고 안아주면서, 그래도 괜찮지 않냐고 등을 토닥였다.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려는 듯, 바람은 쉴 새 없이 내 몸을 훑고 지나갔다.


수많은 도시의 목록 중에서 여기를 선택한 건 어쩌면 내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내쉬며 깊은 한숨을 바람에 실어 보냈다. 좀 더 머물고 싶다는 아쉬움까지 모두 털어내고 산을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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