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강 과제: 여행글쓰기- 센소지를 추억하며
여행의 마지막 날은 항상 맑았다. 다음에도 또 와달라는 무언의 손짓 같았다. 이 날도 어김없이 그랬다. 새파란 하늘에 막 짜낸 하얀 물감 같은 구름이 티 없이 펼쳐져있었다. 아무것도 안하고 하늘만 보고 있어도 숨이 탁 트이고 모든 걸 다 가진 듯했다. 마음은 그러했지만 발걸음은 바빴다. 우리는 분명 여백의 미가 있는 여행을 하자고 했으면서도 어쩐지 빽빽한 여행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다. 비행기 타기 직전까지도 명소 하나쯤은 더 들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바쁘게 캐리어를 끌었다. 도쿄 여행하면 빠질 수 없는, 도쿄 최대의, 최고의 사찰 아사쿠사 센소지였다.
명소답게 인근 락커룸에 캐리어를 보관해놓고 우리는 인파 속으로 뛰어들었다. 사찰의 중문까지 길게 이어진 골목길에는 작은 상점들이 들어서있었다. 일본 전통 음식인 당고 같은 간식 같은 걸 사먹을 수도 있었고 행운의 부적이나 기념품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 마침 일본의 명물 아이스크림인 '크레마'도 팔고 있었기에 더 없이 반가웠다. 우리나라에선 쿠크다스 아이스크림으로 유명한데, 이유는 간단했다. 콘이 쿠크다스 재질이기 때문이었다. 겉보기엔 별거 아닌 바닐라 콘 아이스크림이지만 입에 넣는 순간 사르르 녹아 사라질 정도로 기분 좋게 달고 맛있었다. 나는 사람이 북적거리는 장소를 좋아하지 않았다. 명소라고 해서 오긴 했지만 어쩐지 잘못 고른 것 같아 후회도 되었다. 그러나 이 아이스크림의 환상적인 맛은 그런 후회를 한순간에 날려버리는 것도 모자라서 날 불편하게 만드는 모든 사람들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그냥, 다 행복했다. 이 북적거림이, 내 안의 단 맛이, 시리도록 파란 하늘이 다 나를 축복하는 듯했다.
그 때 운명처럼 내 시선을 사로잡는 물건이 있었다. 동그란 얼굴에 펄럭이는 몸뚱아리. 일본의 전통 날씨요정 '테루테루보오즈상' 키링이었다. 아이들이 여행이나 소풍을 앞두고 당일 날씨가 좋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 인형을 걸어놓는다는 풍습에서 유래하였다. 이렇게 완벽한 순간에, 더구나 센소지 앞에서 파는 것이니 더욱 영험할 거라고 믿었다. 유독 내가 여행을 갈 때마다 날씨가 좋지 않아서 동행자들은 나를 '날씨 악마'라고 불렀다. 그 오명을 벗고 싶었기에 나는 일본 여행을 갈 때마다 테루테루보오즈상을 샀다. 여행 가방에 주렁주렁 매달고 다녔는데 사람들이 늘 이상하게 쳐다보곤 했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만큼 나에게 날씨 요정은 간절했으니까. 이번 키링은 느낌이 좋았다. 그려진 표정도 귀엽고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디자인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손으로 키링을 꼭 쥔 채 중문을 넘어섰다. 내년에 여행 갈 일이 있다면 그 땐 꼭 매일매일이 오늘처럼 날씨가 좋기를. 나의 간절함이 테루테루보오즈상에게 전달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중문을 넘자 바로 정면에 사찰의 본당이 보였다. 마당의 양 옆에는 오미쿠지를 뽑을 수 있는 시설이 있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운세뽑기' 같은 것이었다. 100엔을 매대의 구멍에 넣고 통을 흔들어 대나무 막대를 하나 꺼내면 막대기에 번호가 쓰여있다. 그 번호에 해당하는 서랍을 열면 운세가 적힌 종이가 들어있었다. 나는 살면서 뭔가에 당첨되어 본 적이 한 번도 없을 정도로 불운했다. 12월이니 부디 내년에는 좋은 일만 가득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하나 뽑고 싶은 마음과, 괜히 도전했다가 나쁜 운세가 나오면 찝찝할 것 같은 마음 사이에서 갈등했다. 주머니에서 100엔짜리 동전을 꺼내들고 한참을 만지작거렸다. 넣을까말까. 해볼까말까. 이제 돈을 넣는 구멍에 100엔을 넣으려다말다를 반복하자 옆에서 지켜보던 남편이 쑥 손을 내밀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시원하게 하나 뽑고 가. 나쁜 거 나오면 여기에 버리고 가라고 써있잖아."
그랬다. 나쁜 운세가 나오면 매대지 근처 빨랫줄에 걸고 갈 수 있었다. 액운을 탈탈 털고 좋은 기운만 가져가라는 의미일 것이다. 나는 먼저 남편보고 뽑으라고 시켰다. 그는 진지하게, 진심을 다해 통을 흔들었다. 그러고선 아무렇지도 않게 쑥하고 막대를 꺼냈다. 44번이었다. 그는 불안하게 왜 하필 44냐고 궁시렁거리며 44번 서랍을 열었다. 길(吉)이었다. 적당히 좋은 운세. 그다웠다.
다음은 내 차례였다. 나는 통통거리며 온힘을 다해 통을 흔들었다. 떨리는 손으로 막대기를 꺼냈다. 10번이었다. 제일 구석진 곳에 위치한 서랍이었다. 손끝이 부들부들 떨리는 걸 티내지 않으려고 애쓰며 조심스럽게 종이를 꺼냈다. 앞장에는 알 수 없는 한자가 잔뜩 적혀있었지만 뒷면에 드디어 내가 아는 한자가 눈에 띄었다. 무려, '대길(大吉)'이었다. 뽑기 운이라곤 하나도 없는 내가 가장 좋은 운세를 뽑은 것이다. 이듬해에 결혼식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내가 뽑은 운세는 마치 나의 수호령처럼 느껴졌다. 무탈하게 모든 일이 이루어질 거라고. 걱정하지말라고. 나는 집에 올 때까지 행여나 '대길(大吉)'종이를 잃어버릴까봐 주머니에 보물처럼 넣고 다녔다. 본당에서 향을 피우고 소원도 또 빌었지만 이미 나는 '대길(大吉)'을 뽑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충분했다. 집에 와서도 신을 모시듯 냉장고에 운세쪽지를 정가운데에 걸어놓고 새해를 맞이했다.
다음 해인 2023년, 정말로 대길(大吉)을 뽑았기 때문인지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결혼식 보증 인원도 딱 우리가 예상한 인원과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고, 양가 부모님이 모두 행복해하는 완벽한 결혼식을 치렀다. 더불어 예상치 못하게도 새로운 생명까지 연거푸 내 안에 들이닥쳤다.
이제 여행하기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지만 아직도 우리집 냉장고에는 대길(大吉) 쪽지가 붙어있다. 부디 내년에도 좋은 일만 가득하길 바라면서. 연말만 되면 점점 빛이 바래져가는 운세 쪽지에 이따금씩 눈길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