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사람

제10강 숙제ㅡ계절의 날씨로 분위기 있는 글쓰기

밤새 도둑눈이 내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포근했는데, 세상은 설의를 입고 시리고 말간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오름은 윤곽이 또렷해지고 한라산은 산등성이를 선명히 드러낸다. 흰색뿐인데 풍경은 오히려 깊다. 아삭한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어, 이내 입술을 타고 흘러나온다. 철없는 아이들처럼 우리는 하얀 세상을 처음 맞이하듯 탄성을 지르며 걷고 뛰었다.


그는 이문세를 닮았다. 그의 친구들은 짓궂었지만, 그는 무덤덤했고 올곧아 보였다. 우리는 단둘이 만난 적이 없었다. 늘 친구들이 곁에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그와의 만남은 설레기보다 오래 알고 지낸 사람처럼 편안했다. 우리는 돌담으로 둘러싸인 과수원 길을 돌거나, 모래사장에서 발자국을 남기며 걸었다. 파도가 밀려와 그 발자국들을 금세 지웠다. 이따금씩 저녁을 물고 오는 새소리를 들으며 헤어졌다.


KakaoTalk_20251224_092227655.jpg

어느 날, 우리는 무작정 버스에 몸을 실었다. 눈이 소복이 쌓인 어리목 광장에서 눈사람을 만들고 눈싸움을 했다. 해가 산 너머로 기울기 전에 내려왔지만, 버스는 이미 끊겨 있었다. 우리는 다리의 감각만 믿고 걷기 시작했다. 지나가는 차 한 대 없었다. 길은 온전히 우리만의 것이었다. 남자들은 여자들의 목도리를 잡고 눈썰매를 끄는 듯 앞장섰다. 지치면 걷고, 다시 끌며 그렇게 반복했다. 나뭇가지에 걸린 노을빛이 이내로 스며들더니, 어스름한 푸른 기운이 어둠을 데리고 왔다. 하얗게 쌓인 눈빛의 반사에 의지해 우리는 길을 더듬으며 걸었다.


그렇게 겨울이 지나고, 추적거리는 봄비가 내리던 어느 저녁.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공중전화박스에서 들려온 그의 목소리는 젖어 있었다. 그는 나올 수 있느냐고 물었다. 저녁 시간 이후에는 전화를 하지 않던 사람이었다. 그날은 언니의 약혼식으로 집안이 분주하고 떠들썩했다. 나는 외출할 수 없다고 말했고, 그는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그 후로 우리는 연락하지 않았다.


이제 그의 이름은 희미하다. 그는 내게 흰빛으로 왔다가, 소리 없이 사라진 눈사람이다.




Merry Christmas

구독자님들과 작가님들~~ 모두 행복한 성탄절이 되세요.

sticker stick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