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주 차 과제- 감정을 감각으로 번역하기
<감각 자극 글쓰기>
정윤 작가님의 글쓰기 수업 4주 차 과제입니다.
신호등이 빨간 불로 바뀌었다. 질주하던 택시가 정지선을 물고 멈춰 섰다. 뚜뚜뚜 뚜우- 라디오에서 새벽 2시 정각을 알리는 시보가 흘러나왔다. 옥선은 뒷좌석에서 슬며시 구두를 신었다. 발바닥이 욱신거려 차에 타자마자 몰래 벗어놓고 있었다. 택시기사가 뒤를 흘깃 쳐다보며 말했다.
어디 좋은데 다녀오시나 보네요.
옥선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대답을 삼킨 대신 옆에 세워둔 캐리어의 손잡이를 감싸 쥐었다. 남들이 모르는 비밀이 생긴 것 같아 가슴이 두근거렸다. 곧 아파트 입구에 다다랐다. 옥선을 내려준 택시는 어디론가 부리나케 사라졌다.
한 두 집을 제외하곤 불 꺼진 창이 대부분이었다. 고요한 아파트 단지에서 옥선의 캐리어 끄는 소리가 새벽을 깨웠다. 드르르륵, 드르르륵... 아무리 조심해서 끌어도 막을 수 없는 소리였다. 가다가 중간에 '드득' 멈추기에 돌아보니 보도블록이 파손된 지점이었다. 옥선은 두 팔로 가방을 힘껏 잡아당겼다. 또다시 굴러가는 드르르륵... 드르르륵... 바퀴소리.
어둠 속에서 노란 가로등 불빛이 분수처럼 쏟아졌다. 지나쳐가던 옥선이 뒤돌아 가로등 밑에 섰다. 오른손을 마이크 잡듯이 동그랗게 말아쥐었다. 서늘한 공기를 한 차례 들이마시곤, 왼손을 옆으로 쭉 뻗었다. 마치 날개를 펼친 것처럼. 그대로 넙죽 허리 숙이고 1초, 2초, 3초 뒤에 고개를 들었다.
두 볼이 붉게 상기되었다. 숨 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왔지만 정작 본인은 추운 줄도 몰랐다. 두 눈을 질끈 감고 손바닥으로 이마를 문질러댔다. 아까 무대에서 긴장한 나머지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허겁지겁 내려온 장면이 계속 떠올랐기 때문이다. 다시 하면 정말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노래는 3분 드라마예요. 가창력? 요새 노래 못하는 사람 누가 있어. 그런 건 기계가 다 만져줘. 진짜 프로는 무대에서 손짓 하나, 눈빛 하나로 관객을 홀려야 된다니까!
협회에서 소개해 준 작곡가는 옥선에게 자꾸 '깁스를 풀라'고 했다. 무대에만 서면 뻣뻣해진다고. 옥선도 물론 안다. 몸이 안 따라주니 문제지. 관절염이 있어 그런가. 무대에서 자유롭게 훨훨 날고 싶은데 아직 애벌레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무명가수일 뿐이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날개가 없어도 무대에 서면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 우레 같은 함성소리, 기대에 찬 사람들의 눈빛, 머리 위를 비추는 조명과 심장을 때리는 반주가 그녀를 살게 했다. 그 순간만큼은 지긋지긋한 관절염도, 내일모레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도, 엄마를 이해하지 못하는 가족들까지, 자신을 옭아맨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었다. 오직 노래와 그녀 자신, 둘만 남았다. 그래서 포기할 수 없었다.
흥, 조용필은 처음부터 잘했나. 하다 보면 느는 거지.
다부지게 옷깃을 여민 옥선이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드르르륵... 바퀴소리가 부지런히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비밀번호를 누르기 전, 심호흡이 필요했다. 저 문을 열면 현실 세계로 돌아간다. 반짝이는 무대복을 벗고 김치국물 얼룩덜룩한 앞치마로 갈아입을 시간이었다.
현관에는 신발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그중 병아리색 신발을 들어 손바닥에 올렸다. 깃털처럼 가벼웠다. 이걸 신고 나풀나풀 뛰어다녔을 손자를 생각하니 심장이 사근거렸다. 유치원생인 손자는 신발 신는 걸 어려워했다. 항상 옥선이 발 뒤꿈치를 받쳐주었는데, 오늘은 어떻게 했을지.
딸의 굽 높은 신발, 사위의 검정 구두도 옆에 가지런히 놓아주고 일어서는 순간이었다. 먼 기억 속에서 아버지의 검정 고무신이 옥선의 등짝을 때렸다.
오래전 그날, 읍내에 악단이 들어왔다는 소식에 친구와 구경을 갔었다. 넋을 잃고 보다가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와 대문을 열자 아버지의 고무신이 날아왔다. 한 번만 더 그런 딴따라를 따라다니면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리겠다는 엄포가 정수리에 내리 꽂혔다.
어쩌면 아버지는 그때 이미 알고 계셨던 게 아닐까. 어린 딸의 영혼을 뒤흔든 울림의 정체를. 노친네 기세에 눌려 참고 살았지만 언제부턴가 옥선은 자신이 가수가 된 건 집안 내력이 아닐까 생각했다. 무섭게 호통칠 때 아버지의 음성은 천둥이 치는 듯했으니까. 예사롭지 않은 발성이었다. 한번 마음먹으면 쉽사리 물러서지 않는 고집마저도 쏙 빼닮은 부녀였다.
집안에 들어선 옥선이 캐리어를 번쩍 안아 올렸다. 식구들이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 방문을 열었다. 피곤이 몰려왔다. 얼마나 종종거리고 다녔는지 다리가 저리고 허리도 뻐근했다. 내 손이 내 딸이지. 중얼거리면서 종아리를 주물렀다. 엄지발가락이 스타킹 밖으로 불쑥 나와 있었다. 피식 웃음이 났다. 꼭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 아무리 막아도 불쑥불쑥 솟구치는 뜨거운 무언가가 거기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