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나의 은행 동지들

9주 차 과제 - 비유하는 글쓰기

by 나야

회의에 참석할 이 생겼다. 사실 며칠 전부터 망설인 자리였다. 참석자들이 낯설기도 했고, 거리도 제법 멀었다. 시외버스로 2시간 여를 달려가야 했다. 운전이라도 잘하면 편하게 갔을 텐데. 이리저리 빠져나갈 궁리를 하던 끝에 마음을 정했다. 당장의 성과보다 이다음을 위해 가보자고.


터미널 앞 횡단보도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파란불을 기다리는 동안 칼바람에 코가 맹맹해졌다. 곧 신호가 바뀌고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은 사람들이 우르르 스쳐갔다. 무리에 섞여 나도 종종걸음으로 길을 건넜다.


매표소를 향해 가던 중 발이 미끄덩했다. 뭐지? 바닥에 누런 은행열매들이 양탄자처럼 깔려 있었다. 꾸리한 냄새가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되도록 열매를 밟지 않으려 했지만 도로는 이미 황색 폭탄에 점거당한 뒤였다. 지뢰를 피해 가듯 뒤꿈치를 들고 겅중겅중 매표소로 다가갔다. 키오스크 결제를 마쳤는데도 표가 나오지 않았다. 오작동인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매표소 직원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문을 열고 나온 직원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기계 아래쪽에 손을 스윽 집어넣었다.


여기 나와 있는데요?


그녀의 손에 차표가 들려있었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표를 받아 들고 대기실 의자에 기대앉았다. 출발까지 10분 정도 여유가 있었다. 그 사이 연락온 게 없는지 휴대폰을 열었다. 곧 출발합니다. 카톡에 답장 한 줄을 채 쓰기도 전에 역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런! 운동화 밑바닥에 터진 은행 껍질의 잔해가 껌처럼 들러붙어 있었다. 단전 깊숙한 곳에서 낭패감이 솟구쳤다. 저벅저벅 앞으로 걸어가 보도블록에 신발 밑바닥을 세게 문질렀다.


껍질은 금방 떨어졌지만 나도 모르게 인상이 구겨졌다. 악취 때문이었다. 어디서든 환영받지 못할 냄새였다. 이제라도 회의에 못 간다고 할까? 급한 일이 생겼다고? 아니야, 이미 늦었어.


머릿속으로 주사위를 굴리고 있을 때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짧은 치마를 입은 젊은 여성이 구두 굽을 보도블록에 비비고 있었다. 한쪽에선 집채만 한 가방을 멘 군인이 검정 군화를 털그럭 소리 나게 털어댔다. 아예 신발을 벗어 들고 바닥을 치며 냄새를 쫓는 할머니도 보였다.


출발 5분 전. 사람들의 동작이 빨라졌다. 나도 좌우로 몸을 돌려가며 열심히 바닥을 즈려밟는 중이었다.


설핏 고개를 들자, 벽면 거울에 대기실의 광경이 비쳤다. 슬며시 웃음이 났다. 다들 어디서, 어떤 이유로 모였는지 몰라도 이 순간만큼은 같은 마음이지 않을까. 목적지까지 고약한 냄새를 싣고 갈 수 없다는 절박함이 몸을 계속 움직이게 했다.


어쩌다 밟은 은행 열매처럼 우리 인생에도 뜻밖의 시련이 지뢰처럼 터지는 경우가 있다. 누구나 한 번쯤 겪게 되는 삶의 그늘. 그럴 때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 만으로도 심각했던 상황이 별 거 아닌 일이 되기도 한다. 튼튼한 공감의 울타리 안에서 불편한 감정을 털어내고 새롭게 일어설 힘을 얻는다.


참고로 은행열매의 악취도 알고 보면 속알맹이가 오염되는 걸 막기 위해서라고 한다. 자연스러운 생명순환의 일부인 것이다. 물론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지만.


잠시 후 우리가 탈 버스가 도착했다. 은근슬쩍 자연의 향기를 풍기는 동지들과 함께 줄지어 차에 올랐다. 묘한 동질감이 버스 안을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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