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다움으로 서는 사유

우듬인

by 김기황

내삶을 일궈 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인류의 모든 역사이다. 온 우주에 드러난 존재는 그 하나하나의 존재가 나름의 소중한 존재였음을 인류의 현인들을 말한다. 그리고 드러난 존재의 존재 증명 이야기는 아름다운 기록이라서 뒤따르는 인류는 그 향기를 맡고자 애쓴다. 장자에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고독한 존재는 대종사(大宗師)이다. 대종사의 깊은 사유에서 나온 탁월한 존재는 붕(鵬)이다. 공자에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고독한 존재는 성인이다. 성인의 넓은 사유에서 나온 존귀한 존재는 봉(鳳)이다. 대종사나 성인에게는 자신이 고귀한 존재임을 깨닫고 긴 시간 자신을 잊지 않은 특별함이 있었다. 이 특별함이 길고 기나긴 긴 세월 인간의 길을 지킨 탁월함을 가능하게 했다. 이 지점에 아직도 인간의 노력을 응원하는 장자와 공자의 간절함이 깃들어 있다.

이러한 탁월함은 분명히 색깔이 다양하다. 하지만 태양 빛 속에 들어 있는 다양한 색깔을 쉽게 볼 수 없듯이 붕과 봉을 만나기는 어렵다. 이는 인류가 오랜 역사에서 대종사와 성인을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요새(要塞)에 가두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인류 역사에서 난공불락의 요새가 함락되었던 것은 수많은 작은 시도들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먼저 태어난 인류는 다양한 탁월함을 추구하던 수많은 작은 시도를 남겨 놓았다. 많은 사람들이 내삶을 일궈가며 남겨 놓은 감상이 그것들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신이 포함된 세상과의 소통에서 느끼는 감상을 남기는 것은 결단코 무의미하지 않다. 어쩌면 이것은 인간으로 태어난 당연한 의무일 수도 있다. 어쩌면 가장 낮음을 고집했을 것 같은 천상병 시인은 자신의 삶을 ‘소풍’으로 풀어냈다.

내삶을 일궈가는 복잡한 과정을 단순한 단어로 표현한다는 것은 쉬운 것은 아님이 분명하다. 이것은 내삶을 일궈가는 복잡한 과정에서 인간의 본성과 자신의 존재와 자신의 취향을 소홀히 여기지 않는 태도를 유지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복잡한 과정들 속에서 터져 나오는 탄성들을 모아서 내면을 들여다보아야 비로소 나타나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 순간 매일의 일상에서 우리는 작은 탄성들을 쏟아내고 있다. 다만 우리는 그러한 순간이나 느낌을 사소하다거나 하찮다고 여기곤 한다. 우리가 일상에서 쏟아내는 탄성들을 인류는 많이 모아서 지혜라고 하기도 하고 행복이라고 하기도 한다. 일상이라는 평범함 속에서 만나는 작은 탄성들에 대하여 나의 내면이 반응하여 지혜와 행복의 느낌으로 바뀌는 순간 평범함은 위대함이 된다. 위대함의 여정은 평범함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숙명이 사람들의 마음을 바쁘게 하지만 내삶은 위대함이 목표가 아니라 삶 자체이다. 모두가 가지고 있는 내삶의 한 측면을 보여주는 이야기는 모두가 소중할 수 있다. 그것이 소중함의 빛깔을 띠고 있다면.

듬, 두메는 같은 뜻을 가진 말이다. 모두가 생각하는 그러한 산골짜기의 한적한 곳을 말한다. 듬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내고 산골짜기들을 따라서 흘러 나가던 청운이라는 뜬구름을 따라서 듬을 벗어났던 사람들이 어쩌다가 하나씩 듬으로 들어온다. 물론 청운은 도시의 밝은 어둠 속에 내려놓은 지 오래되었다고들 한다. 세월을 거슬러 오르면 나의 모습도 평범한 그들 속에서 찾아진다. 듬, 두메에서의 단순하고 답답한 생활이 견디기 힘들다고들 말하는 사람들은 복잡하고 활발한 도시에서 내삶을 일궈가고들 있다. 내삶의 영역이 듬이나 도시에서나 큰 차이가 없는 것을 알아차린 것은 듬에서의 생활을 한 몇 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찾아왔다.

인간들의 욕망과 이기심의 강요와 억압을 상대적으로 덜 받은 듬에는 마을마다 거대한 장수목인 노거수들이 길고 기나긴 세월 동안 자신의 존재를 증명이라도 하는 듯이 마을 어귀에 자리하고 있다. 노거수들은 그 긴 세월 동안 그 마을을 거쳐 간 사람들에게 뱃사람들의 등대와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이러한 노거수들은 한 그루만으로도 마을이라는 그릇을 듬뿍하게 해 준다. 노거수는 마치 됨됨이가 가볍지 아니하고 속이 깊숙하게 차 있는 사람처럼 듬쑥하다. 여름의 무서운 태풍이 몰려와도 작은 나무들처럼 가볍게 흔들리지 않는다. 겨울이면 잎이 떨어진 가지들 사이로 내려앉는 차가운 눈 꽃송이들을 포근하게 안아준다. 마을 어귀의 노거수들은 오랜 세월 동안 듬직하게 마을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말이 잦지 않아서 경솔하지 않은 마을 어른들처럼, 늘 자상했던 아버지처럼 늘 수더분했던 어머니처럼. 그래서 그 마을에서 태어났던 사람들은 듬직했던 노거수에서 다른 나무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외양과 무게감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 느낌을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은 다른 것은 대부분 달라졌어도 마을 어귀에 자리한 노거수는 잊을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대(竹)나 나무의 우두 머리가지를 우죽이라고 하며 나무의 맨 꼭대기의 줄기, 말초(末梢)를 우듬지라고 한다. 노거수를 가까이에서 대면하면 이러한 단어의 뜻은 사라지고 외경심이 우러나온다. 아마도 이 외경심은 대지에서는 우뚝하고 공간에서는 우람함에서 나오는 것이리라. 대지에 우뚝하니 서 있는 노거수는 우량(踽涼)함이 묻어 나오는 것 같다. 이 외롭고 쓸쓸함은 고독한 존재임을 증명한 세월을 담고 있다. 노거수는 큰 모양의 웅장함에 위엄을 담고 있어서 사람들은 압도당하지 않을 수 없다. 노거수가 우람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온갖 험난한 상황과 환경에서도 생존을 위한 활동과 본성을 우그러뜨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이 세상의 온갖 강요와 억압에 우그러들지 않고 오히려 세상의 강요와 억압을 우그러뜨리는 용기를 보는 것 같다. 인간이 세상의 강요와 억압으로 우그렁쭈그렁 해짐을 견디어 내는 삶을 살아 내듯이 노거수는 초목이 우거진 어울림의 환경을 동경하지 않고 우리는 한낮의 햇볕을 오롯이 혼자서 견디어 내었다.

노거수의 생존을 이끌어 온 동력은 무엇일까? 하는 궁금증과 호기심이 우러나오면 사람들은 시선을 하늘로 보낸다. 마을 어귀의 평지임에도 우뚝하고 우람한 노거수의 생존을 책임진 가지를 찾아보는 시도를 한다. 노거수가 가장 우람하게 다가오는 여름철에는 이러한 가지를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잎이 모두 떨어지고 삭풍도 불지 않는 잠잠한 겨울철에도 이러한 가지를 찾는 것은 우련하다. 수많은 가지가 엉키고 겹쳐서 보일 듯 말 듯 희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노거수의 생존을 절대적으로 책임지고 있다고 생각되는 가지를 발견했을 때 우둔우둔해지는 느낌은 불편할 수도 있다. 이는 노거수의 몸속으로 시선을 보내서 중요한 것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평소와는 불편한 느낌이나 감정이 몰려올 때가 있다. 그것은 자신의 내면으로 보낸 시선에 자신이 보일 때이다. 마치 노거수에서 우듬지를 찾았다고 느낄 때와 같이 자신에 대한 인식을 인지하는 순간에 사람들은 우둔우둔해진다. 그러므로 노거수의 우듬지는 우거진 초목들 속에 존재하는 우죽이나 우듬지와는 다른 차원을 갖는 것이다.

노거수는 우경(右傾)을 하게 되어 우당(友黨) 하지는 못한다. 한쪽에 치우치게 자리하여 다른 나무들과는 공생을 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장대비, 태풍, 동장군이 윽박지르더라도 우두망찰 하지는 않는다. 홀로 외로이 고립되어 있어도 듬직함을 잃지 않는다. 아마도 우듬지가 오로지 생존에 몰두하기 때문이리라. 우듬지는 비가 오면 맨 먼저 맞을 것이고, 태풍이 불면 가장 먼저 흔들릴 것이고, 동장군이 몰려오면 가장 늦게 휴식을 취하고 그들이 물러나면 가장 먼저 일을 시작할 것이다. 우듬지에게는 어떠한 역경이 닥쳐도 흔들리지 않는 하나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생존이다. 내삶을 일궈가는 사람들에게도 우듬지와 같은 역할을 하는 하나가 있어야 한다. 이는 단순히 생존이라는 단어로는 부족하다. 모든 인간에게 있는 생존에 대한 의지는 기본이다. 그러므로 생존이라는 무색의 바탕에 어떤 무늬와 색깔을 입힐 것인가 하는 태도와 자세가 필요하다. 인류는 외로움과 쓸쓸함을 극복하기 위하여 많은 관계들을 만들어 냈다. 그렇기에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지혜롭다고 하고 원만한 관계 속에는 얻는 평안함을 행복이라고 한다. 이러한 관계들은 우두망찰 하는 상황에서 흔들림을 최소화해 주는 매우 훌륭한 인류의 발명품이다. 그러나 변화가 모든 것인 세상에서 갑자기 닥친 일에 정신이 얼떨떨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은 언제 닥칠지 모른다.

그래서 노거수는 우아스럽다. 젊잖고 아담(雅淡)하다. 노거수는 자신만이 생존하겠다는 우완(愚頑)함이 없다. 내삶을 일궈가는 집 앞의 노거수는 아침이면 참새떼들의 우르적거림을 묵묵히 품어줌으로써 혼자만이 생존하겠다는 어리석은 완고함을 내려놓는다. 한낮 우리는 더운 볕을 가려줌으로써 나무 주변을 우부룩하게 풀들이 자리하도록 하지만 우집하 지는 않는다. 강한 볕과 비바람을 막아주는 우직(愚直)함으로 다른 존재들을 업신여기지 않는 것이다. 인간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우집질은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 같아 보이기도 한다. 이래서 우집질을 하지 않는 노거수의 이런 면은 고아(高雅)하고 담박하다. 노거수 우듬지는 높은 지조와 깨끗한 잎이 젊잖고 맑아서 속된 병충해에 굽히거나 휩쓸리지 않는다. 자신에게 해를 가하는 작은 생명체들에게도 몸을 내어주고 참새떼를 품어주며 다른 종인 풀들까지도 품어주는 태도는 마음이 깨끗하여 욕심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우연히 일어나는 생각들이 정리되지 않는 우여곡절을 겪게 되면 사람들은 고집을 부리고 억지를 쓰기도 한다. 그런데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면서 시끄럽게 울거나 이 사람 저 사람들을 울면서 찾아다니게 되면 타인들이 바보를 만들어 놀림을 받게 된다. 이는 자신이 겪고 있는 우여곡절을 다른 사람들이 해소해 줄 것이라는 어리석은 생각 때문이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우여곡절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의론일 수 있다. 나에게는 어쩌면 우연한 노거수와의 만남이 이러한 태도를 벗어나게 하여 지혜와 행복을 숙고하게 해 주었던 같다. 자초한 고립과 고독이 나만의 어리석은 생각에 빠지는 어리석음을 경계하는 예민함을 유지하게 하는 것 같다. 노거수의 우듬지는 상황에 따라 우듬지가 될 수 있는 수많은 우듬순을 거느리고 있다. 노거수의 우듬지는 우열을 가리지 않고 우애롭다. 노거수의 모든 가지는 매년 다른 순들을 내보낸다. 매년 새로 존재를 드러내는 순들은 어떤 상황이 닥치면 우듬지의 역할을 해야 할 수도 있다. 벼락이나 바람, 그리고 인간이 강요하는 상황 변화는 나무의 생존을 결정할 수도 있다. 그래서 우듬지는 우애롭게 그 많은 순을 보살펴야 한다. 그럼에도 우듬지는 우질부질한 숙명을 타고났다. 성질이 곰살궂지 않아서 소낙비와 우리는 볕, 매서운 한파에 굴복하지 않는다. 그리고 소낙비와 우리는 볕, 매서운 한파를 이겨보겠다는 활발하고 모험적인 삶을 일궈가고 있다. 그래서 노거수는 우부룩한 존재들보다는 탁월한 존재가 된 것이다. 우연히 듬을 지나가다가 노거수를 만나는 순간이 온다면 지나치지 말고 우듬지를 찾아볼 것을 권한다. 우듬지를 찾는 순간 우현해 질 것이다. 우듬지가 노거수를 지탱해 왔던 원동력이었듯이 나를 지탱하는 우듬적 생각이 무엇인지를 지속적으로 시도하다가 보면 난공불락과 같던 나의 내면의 우듬적 시선들이 나타날 것이다. 우듬적 시선을 시도하는 사람들은 세상에 대한 타인들의 해석을 존중하지만 경험에 매몰되지 않고 경력에 매몰되지 않으려고 한다. 작은 묘목에서 시작하여 노거수가 된 과정에 나를 이입하여 우듬지로 우화등선(羽化登仙)하여 멀리 아래를 내려볼 수 있으면 나의 가슴은 뻥 뚫리어 후련한 시원함을 만끽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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