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다른 모습: 목계(木鷄), 역린(逆鱗)
투계(鬪鷄)는 어디로 갔는가?
장자는 달생편에서 목계(木鷄)를 등장시키는데 동물이 아닌 동물의 형상을 이야기로 풀어낸 장자의 상상력은 부럽기만 하다. 장자의 전편을 흐르는 요지는 자유로운 영혼이 주제이다. 자유롭다는 것은 변해야 한다는 강요를 토대로 한다. 그런데 변하지 못하는 목계를 등장시켰다는 것은 장자의 전편에 흐르는 역설을 볼 수 있어야 이해가 될 수 있다. 항간에 떠돌았던 재벌그룹의 창업자가 목계를 걸어두고 자신의 마음을 다잡았다고 하는 이야기에는 목계가 상징하는 덕이 있어서 변하지 않는 목계와 같아지려고 했다고 한다. 소위 천변만화한다는 기업계의 생태에서 자신은 변하지 않는 목계와 같은 덕성을 길렀다고 하는 말은 그리 높지 않은 시선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목계라는 고사성어는 다른 시선으로도 보아야 할 것 같다. 장자가 변하지 않는 목계에다가 오늘날 해석하는 그런 인간의 덕목을 부여하려고는 하지 않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목계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만이 변화하지 않는다는 이중의 상징성이 부여되어 있다. 장자의 사유는 변화하는 세상에서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곤(鯤)이 대붕(大鵬)이 되는 것은 변화이고 구만리장천을 하염없이 날아다니는 것은 자유를 얻음을 상징한다. 북해의 바닷속은 끊임없이 변하는 세상이며 삼천리의 파도는 엄청난 세상의 변화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세상의 변화와 엄청난 세파를 견디고 자유를 얻는 대상은 누구인가? 어쩌면 선불교에서 깨달으면 모두가 부처라는 논리는 장자의 이야기를 각색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대붕이 ‘나’ 임을 인식하는 순간 모든 것은 확연해진다.
목계는 닭싸움을 좋아하는 성향이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세상의 변화에 ‘너’도 변해야 목계와 같은 굳건한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음을 설파한다. 이 고사성어에서는 인간들이 조연이다. 목계는 이야기의 무대이면서 주인공 중 하나이다. 또 다른 주인공은 당연히 왕의 요청으로 닭싸움훈련자가 조련하고 있는 ‘투계’이다. 투계는 10일마다 성장한다. 닭싸움훈련자는 투계의 변하고 있는 태도를 왕에게 알린다. 이때 투계가 목계에게 보이는 반응을 장자는 인간 세상의 일로 번역하여 목계에게 불어넣은 것이다. 그래서 투계가 닭싸움을 할 만한 능력이 있음을 장자는 투계가 목계의 덕을 온전히 얻었다고 표현했다. 드디어 세상은 끊임없이 변한다는 변하지 않는 진리의 상징인 목계와 세상의 변화에 끊임없이 변화하고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투계가 하나가 된 것이다. 여기에서 투계가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나’를 상징하는 것을 인식한다면 장자가 상상으로 지어낸 목계라는 한자 성어에 대한 노고가 헛되지는 않은 것이라 볼 수 있다. 목계(木鷄)는 장자가 창작해 낸 끊임없이 변하는 세상을 상징하는 하나일 뿐이다. 인간의 덕성을 불어넣는다면 죽어있는 동물 조형보다는 살아 있는 생물에게 불어넣는 것이 목계라는 고사성어에 대한 다른 이해가 될 것이다. 훈련받고 있는 투계는 세상에 반응하는 ‘나’이다. 나와 관계되는 모든 일에 신경을 쓰고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것이 세상이 아니라 ‘나’ 임을 이 고사성어는 이야기하고 있다. 스트레스를 느끼거나 느끼고 있다고 확신한다면, 목계를 발로 차버리면 된다. 손으로 집어던지면 된다. 그러면 목계는 당장은 눈앞에서는 사라질 것이다. 일시적으로 눈앞에서 사라졌다고 목계가 부서지거나 영원히 없어지지는 않는다. 목계를 그렇게 하더라도 당신의 스트레스가 풀리지 않았다면, 스트레스를 당신 스스로가 유발하고, 거기에 통제당하고 있으며, 그것으로 당신이 살아있음을 느끼면서 스스로 위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은 지금 당신의 스트레스를 해소해 주지 못할뿐더러 앞으로도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면 당신은 또 같은 행동으로 자신에게 실망할 것이다. 즉 목계는 당신이 물리적으로 어찌할 수 없는 어떤 것들을 상징한다. 당신이 어쩔 수 있는 것은 당신의 마음 상태이다. 목계를 대하는 투계의 태도는 날이 갈수록 변해간다. 우리가 투계의 태도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부끄럽지 않을까? 스트레스에 반응하는 것은 투계이지 목계가 아니다. 목계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이 변화하지 않는 진실임을 상징한다. 투계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에서 생존해야만 한다.
디지털시대의 기우(杞憂)
선불교의 창시자라고 하는 달마 조사에게 젊은 이 하나가 찾아왔다. 달마 조사는 만나주지도 않는다. 그러다가 젊은 사람이 어느 눈이 오는 날 눈밭에서 자기의 팔을 잘랐다. 하얀 눈밭에 선혈이 낭자해진 광경을 본 달마 조사가 물었다. 젊은 사람은 자기 마음을 편하게 해달라고 조른다. 달마 조사가 말했다. 너의 마음을 가지고 오면 치료해 주겠다. 젊은 사람이 말한다. 찾아보면 없다고. 달마는 무겁게 이야기한다. 내가 네 마음을 치료해 주었다. 이 이야기는 장자의 목계 이야기의 다른 모습이다. 이 이야기를 오래전 옛날이야기로만 해석하거나 이해할 수도 있으나 어쩌면 현대에 와서 더 드러나는 불편한 사실이 아닐까?
디지털 기기인 휴대전화기의 보급 대수가 인구수보다도 많다는 현재의 우리 사회이다. 기상예보가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기회를 포착한 사람들은 기상예보를 제공하고 있다. 사람들은 그 예보를 바탕으로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기도 한다. 그래서 자기의 행동과 기상예보가 맞으면 웃고 맞지 않으면 짜증을 낸다. 기상예보는 변하는 것이 이치에 맞다. 그래서 예보이다. 기상 상황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의 한 부분일 뿐이다. 기상예보가 변하면 그 변화에 맞춰서 나의 행동을 변화시키는 것 외에는 아무런 대책이 없다. 나의 행동에 기상예보를 맞추는 것은 투계가 목계를 처음 대면한 태도일 뿐이다. 기상예보가 끊임없이 변하는 것임을 인식하고 생활하다 보면 기상예보의 상황에 맞춰서 나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이 편안함을 느끼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러면 비가 오면 오는 대로 햇살이 비추면 비추는 대로 편안한 마음을 유지할 수가 있게 될 것이다.
그래서, 기우에서 자신의 현실의 어리석음을 보다
기우라는 고사성어는 <열자(列子)> 천서 편(天瑞篇)에 나오는 기인우천(杞人憂天)의 준말이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것이 걱정되어 식음을 전폐한 사람과 이 사람을 걱정한 사람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 한자 성어의 창작 후 후대 사람들의 평가는 기(杞) 나라 사람은 어리석은 것으로 완전히 굳어지게 되었고 하늘과 땅에 대한 과학적 근거들을 많이 확보한 현대에 와서는 전혀 들춰보지도 않는 한자 성어가 된듯하다. 그러나 과학적 근거들에는 하늘의 구멍이 뚫리고 땅이 꺼지는 경우가 있음을 제시하고 있기는 하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질 것을 걱정하여 식음을 전폐하고 전전긍긍하던 기(杞) 나라 사람을 예언자라고 할 수 있을까? 어떻게 생각해 봐도 어리석다는 평가밖에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내가 기(杞) 나라 사람이 된다면 남들이 어리석다고 하는 평가를 받지 않으려면 어떤 점을 보아야 할까? 그것은 아마도 내가 나의 걱정거리를 만들고 그것을 또 걱정하고 있다는 자각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기상예보에서 비가 온다고 하면 비가 내림으로 인해 벌어지는 불편함을 걱정한다. 밥을 빨리 삼키고는 각종 병을 걱정한다. 차를 운전하고 다니면서 걷기가 부족하다고 걱정한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부정적인 생각들로 머리를 가득 채우고는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힌다. 이러한 태도에서 나오는 다양한 행동이 자신을 가장 많이 괴롭히고 있음을 모른다는 것이다. 자신이 화가 났을 때 타인에게 내뱉는 말을 누가 제일 먼저 듣는지를 생각해 보면 쉽게 그런 말을 내뱉지 못할 것이다. 사람이 세상과 소통하는 통로인 오감은 최초의 자극과 반응을 자신에게서 일으킨다.
나를 흔들어야 삶의 질과 양이 풍부해진다
내삶의 질과 양을 풍부하게 하려는 사람은 오감의 최초 자극과 나의 반응을 자신의 내부에 자리하게 해야 한다. 내삶의 질과 양을 풍부하게 하려는 것은 나이와 상관없다. 내삶을 나답게 살려는 의지요 태도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삶에서 인간존재의 증명을 보여줄 수 있는 나(己)다. 나는 내삶에서 더 나은 사람이 되겠다는 역할을 감내하는 나(我)다. 나는 내삶에서 가치를 부여하는 태도와 자세를 견지하는 나(吾)다. 사람들을 더 나은 곳으로 인도하는 사람들처럼 내삶의 질과 양을 풍부하게 하려는 노력은 나이와는 상관없다. 그러므로 인생의 어느 시기라도 자신의 인간존재를 증명하겠다는 의지가 발현된다면 내삶의 양과 질을 풍부하게 일구고 가꾸면서 살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삶이라는 것이 단순하게 전개되는 것이 아님은 삼척동자도 알고 있다. 세상이 내 뜻과 같이 흘러가지 않음은 알고 있으나 왜 그런지에 대한 생각이 멈추었기에 자기 인식을 하지 못할 뿐이다.
삶에는 흔듬과 흔들림이 필요하다. 특히 생각으로만 이루어져 있는 인간들의 사유물들을 변하지 않는 진리라고 새기고 있는 사람들은 생각이 고착되어 식견이 좁아질 수 있다. 나를 흔드는 것은 세상의 모든 것이다. 사람들은 나를 흔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나를 불안하게 하며 불안하면 예민해지게 되고 예민해지면 긴장을 하게 되고 긴장하게 되면 생각을 강요받게 된다.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생각을 하게 되면 압박을 받게 되고 그 압박은 스트레스로 이어진다. 이 모든 과정은 순간적으로 일어나기에 찰나적 관찰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에게는 지나가는 평범한 일상일 뿐이다. 흔들림을 예민하게 살피는 일에 익숙한 사람들은 외부에서 흔드는 것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자신을 살피는 과정을 통하여 그 흔듬에 반응한다. 그리고 그 흔들림 속에서 흔들리지 않음을 찾아낸다. 이것은 흔들리지 않는 신념, 즉 고정된 신념에 자신을 가두는 것이 아니라, 흔드는 신념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신념의 실마리를 찾아서 내삶의 리더로 살아간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내삶의 질과 양을 풍부하게 하는 사람들이 흔듬과 흔들림에 대응하는 방법이다. 내삶의 질과 양을 풍부하게 살아가려면 아마도 가장 어려운 일이겠지만, 자신이 자신을 흔들어야 한다. 이는 죽기보다도 싫은 일이 될 수도 있다. 문경지교의 이야기에서 백전노장인 염파장군은 재상 인상여가 가솔들에게 한 말을 전해 듣고 당시의 가장 치욕적인 행위로 인식되는 행동으로 인상여에게 사과하고 자신의 삶을 살아갔다.
역린은 또 다른 나
전설의 동물인 용은 화가 나면 온 세상을 파괴하고 나서 다시 세상을 만든다고 한다. 용이 화가 나는 경우는 턱밑의 어딘가에 있는 거꾸로 붙은 비늘이 있는데 이것을 건드리면 용이 화가 난다고 한다. 여기까지는 상상일 뿐이다. 실제로 용을 본 사람도 세상이 모두 파괴된 적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철갑 같은 비늘로 덮여 있고 늘 자유롭게 허공을 날아다니는 용에게 거꾸로 붙어 있다는 소위 ‘역린’을 어떻게 건드릴 수 있는 것일까를 생각해 보면 이 이야기에서 얻는 게 있다. 용이 상상의 동물임으로 턱밑까지 접근할 수 있는 물리적 존재는 전혀 없다. 그러니 화가 난 용의 모습과 역린이 무엇인지를 상상해 보면 된다. 역린을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은 이미 존재하고 있다. 용은 자신이고 역린은 자신이 죽기보다도 싫은 그 무엇이라고 상상하면 된다. 내삶의 질과 양을 풍부하게 하면서 살아가겠다면 자신의 ‘그 역린’을 건드려야 한다. 오직 자신만이 알고 있는 ‘그 역린’을 건드는 역할을 자신이 해야 하며, 이로써 파괴되는 세상의 흔들림에서 빠져나와야 하는 것도 오롯이 자신의 몫이다. 그리고 창조되는 세상은 분명히 다른 세상이다. 언제나 유유자적하게 허공에서 자유를 누리고 돌아다니는 평화로운 세상에 존재하는 용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