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혹(佳惑)한 마흔 가혹(苛酷)한 불혹

시 한 편의 용기

by 김기황

없지만 있으면 좋겠다! 무릉도원(武陵桃源)

언제까지 남들이 상상한 선경을 동경만 하고 있을 것인가? 진정 나는 무릉도원을 꿈꾸고 있는가? 나에게 무릉도원은 어떤 존재인가? 나는 무릉도원을 부정할 용기는 없는가? 많은 사람들이 무릉도원을 본 적은 없지만 어딘가에는 있을 것이라는 뒤끝을 남기고 있다. 나와의 소통을 하면서 신화도 아니고 실존한 사실을 증명하지도 못한 이곳을 나는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물음에 답하지 못했다. 물론 단순하게 ‘없다’라고 하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실존하지 않는다고 해서 확신하지 못하는 것이 한둘이겠는가? 그렇다면 이러한 이야기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이 이야기를 대하는 나의 태도에서 더 나아갈 수는 없는가? 담백하게 자신을 인정하는 태도는 진정한 용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자는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자는 말할 수 없다고 했다. 이 단순한 말속에는 감히 감당하지 못하는 무게가 있는 것 같다.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이러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다. 알고 지내는 지인 중에서 낚시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쉬는 날이면 강이나 바다로 낚시를 간다. 고기를 많이 잡았냐는 질문에 그는 여러 핑계를 대지는 않는다. 고기를 많이 잡지 못한 이유가 날씨, 물의 온도, 주위환경이 아니라 그저 잡히지 않아서 많이 못 잡았다는 것이다. 자신은 어부가 아니기 때문에 많이 잡지 못하며, 단지 낚시를 다녀왔을 뿐이라고 한다.

세파에 묻힌 시인의 용기

무릉도원은 누가 보았는지 모르지만 그 사람 이후로는 아무도 보았다는 사람이 없다. 하지만 그 역사는 상당히 오래되었다. 그리고 무릉도원을 말한 이유에 대하여 의문을 가진 사람은 없다. 증명하지도 못하는 그곳을 말한 것은 무릉도원을 처음 이야기한 사람의 핑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의문을 시로 남긴 사람이 있었다.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그는 용기 있는 시 한 편을 남겼다. 고려시대로 추정되는 김상한의 [도원도(桃源圖)]라는 시에는 무릉도원을 어떤 어부의 허풍인 것 같다는 시를 전하고 있다.


도원도 도원의 그림

석와주란옥동천(石瓦朱欄玉洞天) 돌기와, 붉은 난간, 옥 같은 동천

도화난락일계연(桃花亂落一溪烟) 복사꽃 어지러이 지는 희부연 시내....

지금세상황당설(至今世上荒唐說) 지금 이 세상의 황당한 그 말이여

도재어인호사전(都在漁人好事傳) 그 모두 일 좋아하는 어부의 전함인 것을.


시인은 무릉도원을 어느 어부의 고기잡이에 대한 합리화에서 나온 말이라고 꼬집고 있다. 자신에게 자신의 행동의 결과에 대해서 인정하는 것이 나와의 소통으로 좀 더 창의적인 삶을 가꾸려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태도일 것이다. 어쩌면 이를 진정한 용기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진정한 용기란 아는 것은 안다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태도이다. 이러한 태도가 필요한 것은 나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호기심을 발동하여 탐구와 관찰로 이어지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럴 것이다라는 태도와 이것이 무엇일까 하는 태도는 차이가 많다. 지식정보와 사회에서 남들이 지식과 정보라고 하더라도 의문이 드는 지식과 정보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접근하지 못한다면 나의 삶은 개선, 진보, 발전은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큰 것은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되며,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말은 우리의 행동을 묘사하는 표현이 아니라, 내 삶의 질과 양을 향상해 보려는 정신적 각성을 요구하는 말이다.

세상을 자신의 시선으로 보고 자신의 느낌을 세상의 언어로 드러냈을 때 시인이 탄생한다. 그리고 세간이 주목하지 않을 때까지 인고의 세월을 감내한 시인에게 내공이 있다고 한다. 우리에게도 시인이 내공을 쌓기 위해 감내한 시간들이 있었다. 시인은 그의 창작자유를 위해 나와 일상을 인식을 했다는 점이, 일상에 매몰되어 생각 없이 사는 사람들과 다른 점이라 하겠다. 일상생활에서 내공을 쌓는 일이 중요하지 않다고 할 수도 있으나, 나를 자각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점은 삶의 있어서 도외시할 수는 없는 일이다.

번잡한 일상 속이라도

선불교에는 화두 또는 공안이라는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도구가 있다. 화두와 공안을 가지고 지속적인 물음과 통상적인 답변을 넘어선 자신만의 대답을 할 수 있다면 깨달음에 이른다고 한다. 깨달음이란 지식의 타당성을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내가 주인공으로서의 우주의 존재임을 자각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경지는 이미 깨달은 사람이 깨달았다고 하는 사람을 인정해주었다 한다. 이것이 선불교에서 깨달음을 공부하는 방식이었다. 불교 경전에는 깨달음은 말이나 글로서는 표현하거나 전달할 수 없다고 한다. 오직 스스로의 용맹정진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주장을 한다. 이러한 방식이 나에게는 조금은 억지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쩠던 이러한 전례는 아직도 남아있고 깨달음의 공부를 하겠다는 사람들은 번잡한 일상의 공간을 벗어나서 고요한 일상의 공간을 찾기도 한다.

내게는 번잡한 일상의 공간에서는 주인공으로서의 우주존재에 다가갈 수는 없을까?라는 물음에 손을 내밀어준 것이 한자성어들이었다. 주인공으로서의 우주존재에 다가가는 것은 나를 인식하고 나와의 소통을 통하여 나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세상이 만들어 놓은 온갖 것들을 제거하고 나면 남는 것은 내가 나로서 살아가고 있는가이다. 그렇다면 일상생활 속에서 나의 무늬와 향기를 간직하고 살아간다면 그것이 곧 주인공으로서 우주존재임을 증명하는 것이 아닐까? 고요한 공간에서의 일상생활을 통하여 깨달음으로 가는 것이 어렵다고 해서, 번잡한 일상공간에서의 일상생활을 무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번잡한 일상공간에서 내삶의 질과 양을 향상하려는 나는 나에게 늘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한자성어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소외되었다고 그 가치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내가 일상생활과 한자성어를 연결하는 가치를 찾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언짢기는 하지만 말이다. 나와의 소통에서는 이제까지의 한자성어에 대한 해석이 절대적이지는 않다. 내가 그 해석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와 그 한자성어에서 어떤 것을 더 읽어 낼 수 있을까가 더 중요하다. 하나의 한자성어에 여러 가지의 해석이 전해진다. 여러 가지 해석은 여러 개의 시선이다. 아주 오랫동안 변하지 않는 해석도 있고, 세월이 흘러서 다른 뜻으로 굳어진 것도 있으며, 다른 해석이 첨가되기도 한다. 한자성어의 이러한 변화성이 나와의 소통에 활용될 수 있는 점이다. 단순히 세상의 모습을 전해주는 한자성어가 있고, 현명한 지혜를 얻을 수 있는 한자성어도 있다. 물론 지혜에 대한 자신의 확실한 이해가 동반되어야 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지혜에 대한 나의 생각을 정립하는 데에도 한자성어가 활용될 수 있다. 내삶의 질과 양이 향상이 되면 자연스럽게 받을 수 있는 선물이기는 하지만 인품과 인격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는 한자성어도 있다. 처세술은 사람들의 비난을 받지만 처세는 누구나 해야 한다. 자신의 아부나 아첨으로 타인에게 불이익을 주는 것을 당사자는 처세나 처세술로 얼버무리려고 하지만 한자성어에는 처세와 처세술에 관련된 한자성어 속에는 그 검은 속내를 볼 수 있는 시선을 감춰놓았다. 다양한 한자성어 속에 담겨 있는 인간의 일상생활과 나의 번잡한 일상생활을 돌아보면서 나와의 소통을 할 수 있게 된다. 하루의 일과를 돌아보거나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순간적으로 한자성어들이 떠오른다면 점수를 따기 위한 학습단계를 넘어섰다고 할 수 있다. 이미 나의 번잡한 일상과 지식을 결합하여 지혜를 얻으려는 무의식적 노력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옛사람들이 그들의 느낌으로 풀이해 놓은 것을 억지로 나만의 느낌으로 해석하는 왜곡, 아전인수, 견강부회등의 해석이 아니라, 내삶의 자문을 얻을 수 있는 것들을 찾아내는 것이 한자성어의 유용성이다.


분노할 수 있는 용기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 김수영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王宮)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오십 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 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 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삼십 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情緖)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14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펀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 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앞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펀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뭇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絶頂)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 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 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이십 원 때문에 십 원 때문에 일 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일 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

정말 얼마큼 작으냐……

작은 것, 사소한 것에 우리가 분노와 분개를 하면서도 이를 드러내지 못하고 시인의 도움을 빌리는 것은 또 어떤가? 그런다고 나의 그 하찮은 분노가 차원이 올라가는가? 분노에도 차원이 있겠는가? 그 사소한 것에 대한 분노는 왜 일어나며, 어떻게 해야 잠재울 수 있는가? 이것을 극복한다면 내삶의 리더로서 살아가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사소한 것에 대한 자신의 내부에서 올라오는 분노를 자신의 외부로 표출하는 분개를 직면하는 것은 죽기보다 싫은 것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내가 그 사소한 것에 분노와 분개를 한다는 것이 인간이 원초적으로 가진 명예로운 존재감을 한없이 초라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명예는 존재로서 개인에게는 별로 의미가 없는 잣대이다. 명예는 나 아닌 나들이 평가해 주는 나의 인품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와 나 아닌 나들이 사는 세상에서 내가 나 아닌 나들을 평가하는 명예를 나에게 적용시킬 때 그 사소함에 대한 평가는 한없이 초라한 나를 대면할 수밖에 없게 된다. 사소함의 정체는 사소하지만 나를 나답게 만들어 주어 사소하지 않은 것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 사소함의 정체를 궁금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왜 그 사소한 것들 때문에 내가 분노하고 분개하는가?이다.

모든 인간은 부모에게서 태어난다. 그리고 부모가 가진 유전적 특징을 반반씩 물려받는다. 그리고 그 유전적 특징을 가지고 평생을 살아간다. 유전적 특징에는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포함한다. 그 유전적 특징을 기초로 하여 개인의 노력에 따라서 달라진다고 하나 그 유전적인 특징은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개인의 노력여하에 달라지는 것이 가리키는 것이 “자신과 얼마나 대면하였는가?”이다. 이 말은 사회나 역사가 만들어 놓은 가치, 규범, 도덕, 법, 질서에 맞추어 객관적으로 자신을 평가한 것이 아니라, 개인적 존재로서 주관적인 사유를 얼마나 깊이 하였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단순히 사회나 역사가 만들어 놓은 질서를 따라가기만 하여도 인간은 소유적 생존은 할 수 있다. 그러나 소유적 생존은 육체적 감각과 경험의 차원의 생존이다. 인간이 가진 영적 존재로서의 삶을 위해서는 다른 차원의 존재적 생존이 필요하다. 사소함에 대하여 분노, 분개하는 하는 것은 유아적 이기주의에 머물고 있는 나의 정신적 차원이 문제 있은 것이었다. 차라리 구우일모나 천하를 위하여 다리털 한 오라기도 뽑지 않겠다는 양주의 철학이 위대하게 보이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인류가 시라는 형식을 발명한 것은 분명히, 분노에서 자유롭기 위해서일 것이라고 확신한다. 아마도 짧은 형태가 문명을 전달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시는 창조와 파괴의 전형이다. 파괴할 때 분노가 흘러들어 간다. 이는 문학적, 비평적 차원의 이야기이다. 시에 대한 이러한 서술이 많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일상에서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즉, 시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어서 평생 동안 시집 한 권 찾지 않는 사람들에게 시의 효용성을 삶의 영역에서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시적 상상력은 파괴와 창조의 끊임없는 흐름이라면 개인에게도 끊임없이 파괴와 창조의 흐름이 흐르는 것이 있다. 시는 자극에 반응하는 감정이다. 시는 오감에 반응하여 감각을 정리하고 감정을 정돈하는 것이다. 우리 삶에서 시의 창조와 파괴의 효용을 받아들여 삶의 양과 질을 넓히고 높일 수 있는 것은 감각과 감정의 관계이다. 오감을 자유롭게 쓸 수 있다는 것은 시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새가 자유롭다는 것은 기존의 개념, 억압을 깨는 데 있다. 이는 시인들이 자신의 감각에 대한 감정을 적확하게 표현한다는 것이기도 하고 감각을 자유롭게 활용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라고 본다. 감각을 자유롭게 활용하고, 사용한다는 것은 물론 영혼의 영역에 해당될 것인데, 시적표현은 오감이 각각의 고유한 주요 기능에 얽매이지 않을 때 쏟아져 나온다. 그래서 시인은 자유롭다는 것이다. 자유로움은 용기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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