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김의 다른 차원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각주구검(刻舟求劍)
자이가르닉 효과. 미완성이 주는 각인효과라고 이해할 수 있다. 대다수의 사람은 잃었던 것을 찾아다니다 항상 마지막 장소에서 잃었던 물건을 찾았다고 믿는데, 그것은 물건을 찾고 나면 더 이상 찾아다니기를 멈추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항상 잃어버린 물건은 마지막 장소에 있을 것이라는 착각 속에 살아간다는 것이다. 인생의 첫사랑도 미완성이라고 생각하기에 오랫동안 기억된다고 한다. 내가 설명을 읽어도 완전히 이해되지 않는 것은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붙여둔다. 어떤 한자 성어는 그 뜻을 뇌리에 새기는 순간부터 망각에 들어가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한자 성어의 무궁한 이야기를 외면하게 되는 것 같다. 각주구검에서 주(舟)는 작은 배를 이야기한다. 활동반경이 넓지는 않은 배다. 한강이나 낙동강 등의 넓은 강을 오르내리면서 움직이는 배가 아니라 그저 나루터를 건너는 목적에 주로 사용되는 배였을 것이다. 그러니 물속에 빠진 검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상황판단과 자신이 탔던 그 장소에 배를 댄다면 표시해 둔 곳에서 물속으로 들어가면 검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었을 수 있겠다는 동정도 하게 된다. 그러나 물속이 땅과 같은 환경이 아님을 몰랐음에 그의 의도는 헛된 것이라는 민망함이 앞서는 것이다.
한자 성어를 나와의 소통으로 활용하지 못하는 것은 한자 성어의 기존 뜻을 어떤 경로를 통하여 알고 나면 더 이상 그 속에서 무엇인가를 찾아내려 하지 않는 인간의 속성일 것이다. 아니면 지식을 하나 더 얻었다고 만족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반드시 더 찾아낼 필요도 없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무엇인가를 더 찾아보고자 관심을 기울인 사람들에게만 무엇인가가 더 보일 것이다. 한자 성어 속에서 무엇인가를 더 찾아낸다고 해서 즉시 나의 경제적 물리적 환경이 변하지는 않는다. 다만 마음속 깊은 곳에 여유, 고요, 평안 등의 씨앗이 하나 심어지고 그것이 자라는 것은 나만이 알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날마다 새기는 일들을 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그러면서 칼을 찾을 지점을 뱃머리에 새기는 사람처럼 어리석은 생각들을 하면서도 자신은 잘살고 있고 열심히 살고 있다는 착각을 한다. 여인은 자신을 사랑해 주는 사람을 위해 얼굴을 꾸미고, 선비는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 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표현이 있다. 여인을 여자로 선비를 남자로 새겨도 무난할 것 같은 세상을 살고 있다. 남자도 얼굴을 꾸미는 면도가 일상이 되었고, 여자들의 화장법을 따라 하는 것도 일상화되었다. 아주 오래전에는 남자들이 화장하는 것이 일상이었다고 하는 연구들도 있다. 위의 이야기에서 여인을 여자로, 선비를 남자로 새기는 것은 생각의 수고를 하지 않는 느낌을 줄 수도 있다. 특정의 여인과 특정의 선비를 일반적인 여자와 남자로 새기는 순간, 나의 식견은 한없이 깎이게 됨을 명심하자. 언제부터 남자들이 면도를 매일 하게 되었고, 여자들이 화장을 매일 하게 되었는지는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남성 중심의 사회가 유지되는 동안, 남성들은 매일 면도하는 변신을 하면서도 변신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화장으로 변신을 한 여성들에게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는 모호한 판단을 사회에 새겨 놓았다. 그리고 여성들도 사회에 새겨진 그 판단을 일상에서 활용(?)하면서 남성들의 판단에 동조하고 있다.
정리된 외모의 모습으로 일상을 살아가는 것은 중요하다. 혼자서 지내는 무인도가 아니라면 부담되지 않을 정도의 외모를 정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일상이다. 그렇다고 타인의 외모가 나의 일상적인 기준에 맞지 않다고 지적질을 해 대는 것은 최악이다. 가끔은 생각의 끝을 나의 두뇌 속으로 향하게 할 필요가 있다. 변신은 외모의 꾸밈에서 시작하더라도 나의 머릿속을 거쳐서 영혼의 변신을 꾀하는 시도를 해보아야 한다. 내면의 모습을 자꾸만 들여다보는 노력은 필요하다. 여인은 자신을 사랑해 주는 사람을 위해 얼굴을 꾸미고, 선비는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 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표현에서 여인과 선비를 제거하면 외모와 영혼을 동시에 고려하라는 선인들의 지혜를 엿볼 수도 있다. 여인을 여자로, 선비를 남자로만 새기는 사람들은 꼰대가 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고정된 틀 속으로 자신의 생각을 가두기 때문이다. 생각은 뱃전에 새겨두고, 세상 변화의 흐름을 흘려보내고, 외딴 강가의 소용돌이 속만을 응시하는 사람에게서 들을 말은 별로 없다.
아로새겨야 할 기억
마음속에 또렷이 새겨야 할 일이 사람의 생애에 몇 번이나 있을까? 어떤 사람들은 마음속에 새기는 것이 미덥지 못하여 신체에 뭔가를 아로새기기도 한다. 사람들은 매 순간 무엇인가를 새기면서 살아간다. 심지어 잠을 자는 시간에도 꿈속의 장면들을 새기고 그 의미를 알고 싶어 한다. 그렇다면 존재로서 인간이 죽을 때까지 새겨야 할 것들이 있을까?
각골난망(刻骨難忘). 보살핌을 뼈에 새기더라도 잊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좀 다르게 생각해 보자. 보살핌이 잊기 어려워지면 은혜가 된다. 사람이 일생을 살면서, 살갗을 헤집고 뼈에 아로새길 만한 은혜라는 것이 과연 무엇이 있을까? 각자의 시선에 따라서 부모의 은혜, 국가의 보살핌, 회사의 보장, 우연한 선의 등 여러 가지의 일들이 있다.
결초보은(結草報恩)에서 유래했다는 각골난망은 생명 연장 결정이 잊기 어려운 은혜이다. 보은의 실행은 생명이 연장된 사람의 아버지였다. 그리고 보은의 대상자에게는 보답의 상황을 꿈에 나타나서 전해주었다. 생명은 대를 거슬러 올라가서라도 보답해야 할 만큼 중하다는 생각이 반영된 이야기인 것이다.
와신상담(臥薪嘗膽)은 섶에 눕고, 쓸개를 맛본다는 뜻이다. 섶은 여러 가지 뜻으로 쓰인다. 어쨌든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은 제공되지 않는다. 최강의 쓴맛을 체험하려고 굳이 쓸개를 찾을 필요는 없다. 이 한자 성어에는 두 사람이 등장한다. 한 사람은 섶에 누워서 복수하겠다는 마음을 다졌고, 그에게 패배한 다른 주인공은 쓰디쓴 쓸개를 맛보면서 패배의 설욕을 잊지 않았다는 것이다. 속뜻은 인간이 자신의 불편함을 감내하면서 뜻 이루기를 잊지 않는다는 내용이기는 하다. 현대의 우리는 성공을 위한 동기부여의 도구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런데 주인공들이 품은 뜻이라는 것이 왜 하필 사람의 목숨을 노리는 것이었을까? 이야기에 전해지지는 않지만, 인간적으로 굉장히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것이 아니고 당시의 정치 상황과 맞물려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이 이야기의 배경을 오늘날의 상황에 맞게 변경하여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개인의 목숨을 개인이 앗아가는 상황은 벌어지지 않는다. 또한 집안 또는 가족들을 어렵게 만드는 일들을 속수무책으로 당해서 원한을 품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렇다면 개인이 와신상담의 정신으로 각골난망의 태도를 취해야 할 대상은 어디에 있는가? 나는 자신 있게 바로 “나 자신”이라고 지목하겠다. 오직 나뿐이라서 더욱 존귀한 존재임을 깨달은 인간이 죽을 때까지 새겨야 할 것들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의 자극을 근육에 새기고, 그 자극에서 얻은 느낌은 뇌리에 아로새김으로써 살아가는 것이다.
선불교의 선승인 백장선사가 있었다. 백장선사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일일부작(一日不作), 일일불식(一日不食)’을 새긴 서예 작품은 지금은 드물다. 이 가르침은 대부분의 선불교 종단에서 불문율처럼 지켜졌고, 민간으로도 퍼졌다고 한다. 때로는 재력이 있는 사람들의 인격을 포장하는 용도도 되었다. 세월이 흘러 백장 선사의 거동이 제자들의 걱정거리가 되었다. 제자들은 스승에게 일하는 것을 멈추라고 애원한다. 스승은 얌전히 따를 생각이 없다. 제자들은 스승의 농작업 기구들을 감추어 버렸다. 일을 하지 못하게 된 스승은 이번에는 얌전히 자신의 거처로 돌아가서 ‘단식’을 선언한다. 노구의 스승이 일을 하지 않았으니 식사를 하지 않겠다고 하자 제자들이 더 애가 탄다. 며칠 후 백장 선사는 따사한 햇살 아래서 호미를 부지런히 놀리고 있었다.
‘일일부작(一日不作), 일일불식(一日不食)’이라는 표현은 한적한 산속 절간에서 벌어진 스승과 제자들 간의 애틋함이 일어나기 한참 전에 나왔다. 주목할 지점은 왜? 90세의 노구인 스승은 고집을 피웠는가이다. 일생의 대부분을 깨달음을 위해 정진했던 노선사가 단지 자신이 세운 규율을 지키는 것에 자신의 노년 목숨을 걸었을까? 아끼는 제자들의 걱정거리를 만들면서까지 우리에게 전해주려는 것이 단지 검약과 규율을 지키라는 가르침이었을까?
노선 사는 숨이 멎을 때까지 자신의 살아있음을 잊지 말라는 가르침을 몸소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호미 끝에 걸리는 세상의 자극을 근육에 새기고, 그 자극에서 얻은 느낌은 뇌리에 아로새김으로써 살아있는 존재임을 드러내라는 것이다. 그 문자에 얽매여서 헤어나지 못함을 질타한 것은 아니었다고 노선사의 지팡이가 흔들리고 있다.
지금 바로 생각해 보자. 내인생의 가장 찬란한 순간을 본 적이 있는가? 내영혼이 가장 황홀했던 적이 있는가? 언제 누구와 있을 때였는가? 나는 살아 있는가? 그리고 그것을 스스로 나의 뼈에 새길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