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다움으로 서는 사유

독백, 내 속의 너무 많은 나

by 김기황

가수 하덕규는 가시나무 새를 빌려서 내 속엔 너무 많은 나가 있다고 노래했다. 노자는 태초에 혼돈이 있었다고 했다. 태초에 정적은 없었다. 태초의 혼돈 속에 내가 있었다. 나를 찾기 위해서는 그 혼돈 속으로 시선을 옮겨야 한다.

우주는 흐름.

빅뱅. 인간의 지식으로 상정한 지나간 어느 순간의 이름이다. 이 순간 모든 것이 한 점에서 터져 나왔다. 그 거대한 울음, 빛과 어둠이 함께 태어난 첫 호흡이었다. 이 우주의 호흡은 이후로 한순간도 멈춘 적이 없다. 별들은 팽창하며 식어가고, 먼지들은 다시 별의 씨앗이 된다.
공간은 어두웠고 시간은 쌓이지 않았다. 지속적으로 호흡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인간이 등장하였다. 인간은 이를 두고 흐름이라고 이름하였다.
흐름은 단지 사건이 아니라, 존재의 양식이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은 흐름 안에서 순간적으로 빛나는 한 파동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짧은 떨림 속에 우주의 모든 역사가 스며 있다. 피가 돌고, 숨이 드나드는 일조차 그 오래된 리듬의 잔향이다. 그래서 인간의 몸은 우주의 첫울음을 기억한다. 살아 있는 것은 모두 흐르고자 하는 성질을 품고 있다. 돌은 굳어도 부서져 흙으로 흐르고, 나무는 뿌리를 내리되 바람에 몸을 맡긴다. 그러나 인간만은 그 흐름을 자주 잊는다.

우리는 멈추어 서서 ‘나’를 세우려 하고, 이름을 붙여 흐름의 방향을 바꾸려 한다. 그러나 이름은 고정의 표지일 뿐, 흐름의 본질이 아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시 길을 나서야 한다. 길 위에서만 흐름의 기억이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여행은 어쩌면 그 원초적 흐름으로 되돌아가려는 몸의 회귀다. 세상은 넓어지지 않는다. 다만, 나의 굳은 경계가 허물어져서 흐른다. 떠남은 흩어짐이 아니라, 흐름과 다시 호흡하기 위한 준비다. 그리하여 인간은 끊임없이 흘러가며, 다시 중심을 세우고, 또다시 흘러간다. 내 속의 나를 만나는 여행은 의미가 있다.


죽은 자의 산 자를 위한 위로, 여행

여행은 세상으로 나가는 길이 아니라, 나의 깊은 곳으로 되돌아가는 길이다. 우리의 매장 문화에는 죽은 이를 묻으며 하는 덜구소리가 있었다. 그 소리는 산 자가 죽은 이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신을 불러내는 소리다. 떠난 이의 자리를 애도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멈춘 흐름을 깨우는 일이다. 그래서 그 소리는 애도의 노래가 아니라 회귀의 노래다. 삶이란 곧 흘러야 하는데, 언제부턴가 우리는 그 흐름을 잊고 있었다. 죽은 이는 남겨둔 마지막 숨결로 살아 있는 자를 일깨운다. “흘러라, 흘러라.”

여행. 사람들은 세상을 보기 위해 떠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보지 못했던 나를 보기 위해 길을 나선다. 낯선 풍경은 내면의 풍경을 비추는 거울이 되고, 길 위의 타인은 내가 잊고 있던 ‘또 다른 나’의 얼굴로 다가온다.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세상은 멀어지고, 나는 점점 나의 중심으로 흘러간다. 그래서 여행의 목적지는 바다가 아니고, 산이 아니고, 나라가 아니다. 그것은 나의 시원(始源)이다. 그곳에 닿으면 안과 밖의 경계가 흐려지고, 삶과 죽음, 시작과 끝이 한 줄기의 흐름으로 이어진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안다. 여행이란 세상을 버리고 떠나는 일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나의 본래 흐름을 다시 발견하는 의식임을. 그래서 어떤 이는 여행을 뿌리가 송두리째 뜯어져 나가는 아픔을 견디는 일이라고도 했다. 우주가 처음 터져 나올 때 뜯긴 그 자리에서 이어져 온 그 리듬, 그 오래된 울림이 길 위에서 다시 몸을 통과한다. 그때 우리는 문득 깨닫는다. 떠나온 길의 반대편에 도착한 것이 아니라, 흐름 그 자체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그래서 칠흑 같은 순례길에서 만난 별똥별은 흐름으로 돌아가라는 나의 신호이다. 광활한 사막에서 본 해골은 흐름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나의 경고다.

내 속의 나, 기(己)·아(我)·오(吾)

여행이 끝난 자리에, 나는 나를 만난다. 그 만남은 언제나 세 갈래로 나뉘어 있다. 몸의 깊은 곳에서 자리한 기(己), 세상 속에 드러나는 아(我), 이 둘을 비워 다시 하나로 돌려보내는 오(吾).

기(己). 우주는 흐름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사람 중에 장자가 있다. 장자는 ‘대지는 나에게 몸을 주어 살게 하고, 삶으로 수고하게 하며, 늙음으로 편안하게 하고, 죽음으로 쉬게 한다’고 하였다. 그의 아내가 죽었다. 아내의 죽음 앞에서 초연한 그는 친구에게 아내는 자신의 시원으로 돌아갔다고 하였다. 그곳으로 흐름이 몰린다. 몰린 흐름에 기(氣)가 실린다. 그래서 기(氣)는 태곳적 숨이다. 우주가 처음 숨을 내쉴 때, 그 기운의 한 조각은 어머니에게로 또 한 조각은 아버지에게로 깃들었다. 이 두 기운이 우연히 만나 나(己)가 된다. 그래서 숨을 들이쉴 때마다 나는 우주의 처음을 되풀이한다. 나의 몸은 단지 살과 피가 아니라, 흐름이 머물렀다 다시 흘러가는 임시의 그릇이다. 몸을 의식한다는 것은 곧 나를 우주의 호흡 속에서 다시 느끼는 일이다. 나(己)는 존귀하다. 음양오행설에서 무기(戊己)는 오행의 중심에 해당하는 토(土)를 대표하는 글자이다. 이들은 오행의 순환에서 중심을 잡는 역할을 하며, 만물이 그 몸을 굽혀서 숨기는 형상을 본떠서 만들어졌다고 전해진다. 또한, 무기(戊己)는 원래 왕비가 거처하는 중궁(中宮)을 나타내는 글자였으나, 이후에는 타인에 대해 안에 있는 나를 가리키는 글자로 굳어졌다고 한다. 부처는 이를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은 몸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몸에서 흘러나온 기(己)는 이름과 언어, 관계를 만나 세상 속에 드러나는 나(我)를 만든다.
아(我). 아는 타인의 눈 속에서 자라고, 사회의 질서 속에서 굳어진다. 아는 흐름의 모양을 따라 흘러야 하지만, 종종 흐름을 붙잡아 나만의 강줄기를 만들려 한다. 그때 ‘나는 나다’라는 말은 흐름의 진실이 아니라, 고여버린 웅덩이가 된다. 인간의 어리석음을 말할 때 어김없이 등장하는 사람이 있다. 고대 중국의 송나라의 양공(襄公)이다. 또 한 사람은 천하의 패권을 겨루었던 항우(項羽)다. 이들의 어리석음은 나(我)에 집착한 공통점이 있다. 형식을 중히 여기던 고대 중국에는 전쟁에도 예(禮)가 있다고 한다. 전투가 진행되는 상황에 따라 명칭이 달랐다. 그러나 이미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시대였다. 백성의 안위를 지키지 못하고 자신의 지식에 얽매인 송양공에게 내린 평가는 정당했다. 항우는 한 고조 유방을 제거할 기회가 있었으나 망설였다. 항우는 의리와 명예를 중시하여 상대가 항복하거나 무방비 상태일 때 공격하는 것을 비겁하다고 여겼다. 즉, 유방이 항복하거나 상황이 불리할 때 공격하는 것을 군자의 도리가 아니라는 도덕적 정당성을 잃을 수 있음에 망설였다고 추정한다. 그래서 그는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서성일 수도 없었다. 물 고인 웅덩이의 변화는 말라야 시작된다. 그들은 물 고인 웅덩이를 말리지 못했다. 그 웅덩이가 마를 때, 비로소 또 다른 나(吾)가 눈을 뜬다.

오(吾). 오는 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 안에 있던 흐름이 스스로를 깨닫는 순간이다. 아를 비워내고, 기를 다시 느낄 때, 그 둘은 하나의 원으로 맞물린다. 몸과 세상, 나와 타인, 생과 사의 경계가 사라진다. 그때 인간은 흐름과 일치한다. 그것이 곧 깨달음이자, 나다움의 근원이다. 장자는 제물론 편에서 남곽자기의 입을 통하여 나는 나를 장사 지냈다(吾喪我)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기(己)가 아닌 아(我)라는 글자를 사용한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 말은 기존의 고정된 자아(我)를 내려놓고, 본래의 참된 자아(吾)를 회복하는 과정을 나타낸다. 송양공과 항우의 나(我)는 물 고인 웅덩이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나다움.

모든 흐름은 결국, 한 점으로 돌아온다. 그 점은 시작이면서 끝이고, 끝이면서 다시 시작이다. 나는 그 점을 ‘나다움’이라 부른다. 나다움은 고정된 성격이나 개성이 아니다. 그것은 매 순간 흐름 속에서 새로 태어나는 중심이다. 중심이란 멈춤이 아니라, 흐름 속에서도 스스로 무너지지 않는 살아 있는 균형이다. 숨을 쉬듯, 우리는 순간마다 중심을 세우고 다시 내려놓는다.
그리하여 매 순간 새로워진다. 군자는 그 중심을 ‘예(禮)’라 불렀다. 부처는 그것을 ‘공(空)’이라 하였고, 성인은 ‘도(道)’라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같은 것을 가리켰다. 흐름과 일치된 자기, 즉 ‘나다움’의 자리다. 나를 세우는 나다움이란 나를 흐름에 내맡기되 흐름 속에서 나를 잃지 않는 일이다. 그래서 그것은 단단함이 아니라 유연함이며, 자기 확립이 아니라 자기의 투명함이다. 우리가 길 위에서 불안을 느끼는 것은, 흐름이 우리를 밀어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흐름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다움을 아는 순간, 흐름은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니다. 그것은 나를 삼키는 물결이 아니라, 나를 지탱하는 호흡이 된다. 그때 인간은 깨닫는다. 나다움은 목적이 아니라, 살아 있음의 형식이라는 것을. 흐름을 따라 나를 잃지 않고, 나를 따라 흐름을 막지 않는 그 상태 그것이 곧 성인의 평안이며, 군자의 품격이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단지 한 가지 이름으로 남는다. ‘나다움.’ 세상에 흘러가면서도 스스로의 중심을 새로 세우는 자. 흐름 속에 머물되, 흐름과 하나 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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