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다움으로 서는 사유

이소(離騷)와 천문박명(天文薄明)

by 김기황

이소(離騷). 새들의 성인 인증식. 부화한 둥지에서 어미 새가 물어다 주는 먹이를 받아먹던 새끼 새는 이제 떠나야 한다. 새끼는 비바람과 추위를 피하고 어미의 온갖 보살핌이 제공되던 보금자리 떠나기를 거부한다. 이 과정을 촬영한 영상에는 안절부절 애잔한 모습으로 떠나기를 거부하는 새끼와 떠나보내야 하는 어미의 애절한 소리가 난무한다. 이방자인 인간 해설자의 목소리는 화면 속의 긴장을 더욱 고조시킨다. 어미는 둥지까지 먹이를 물어다 주고 떠나라고 격려해 보지만 새끼는 거부한다. 몇 차례의 시도에도 새끼가 거부하면 어미의 태도는 단호해진다. 어미는 둥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새끼가 둥지 밖으로 나올 때까지 먹이를 건네지 않는다. 새끼는 먹이에 대한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둥지 밖으로 나온다. 그제야 어미는 먹이를 건넨다. 새끼는 다시 둥지로 돌아간다. 이러한 상황은 얼마 동안 반복된다. 둥지에서 조금씩 멀어지는 어미의 먹이 건네주기는 떠나야 하는 새끼의 날갯짓 훈련도 겸한다. 새에게 날 수 있는 능력은 곧 생존 능력이다. 여러 날이 지나고 마침내 어미가 결심을 굳힌다. 먹이를 물고 새끼가 둥지에서 완전히 멀어지도록 유도한다. 둥지에서 충분히 멀어졌을 때 먹이를 건넨다. 그것이 어미가 물어주는 마지막 먹이임을 직감한 새끼는 둥지로 돌아가지 않는다. 새끼가 마지막 먹이를 먹고 둥지가 아닌 곳으로 날아가는 모습을 보고 어미는 미련 없이 둥지를 떠난다. 이제 새끼는 넓은 세상의 한 구성원이 되었다. 이제부터 모든 것은 새끼의 선택이고 책임이다. 한 생명의 세상에 대한 도전이 시작됐다. 세상으로 날아간 새끼의 모든 도전은 새의 삶의 무늬가 된다.

우리 사회는 고교졸업장이라는 마지막 먹이로 어미 새의 보살핌과 같은 사회적 배려를 거둔다. 그리고 세상에 홀로 설 수 있는 용기와 책임을 요구한다. 이제부터는 제거된 안락한 보호막에 미련을 둘 것인지 스스로 그린 무늬로 튼튼한 보호막을 만들지는 오롯이 개인의 몫이 된다.

고교졸업 후. 완전한 자유까지는 아닐지라도 자율의 범위가 넓어질 것이라 기대하지만 그렇지 않다. 삶의 영역이 넓어지면서 이전과는 다른 역할을 요구하는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편입되기 때문이다. 모든 공동체는 질서를 유지함으로써 생존을 도모한다. 공동체는 질서 유지의 다양한 방법을 보유하고 있다. 공동체의 질서와 개인이 이해관계로 얽히면 제한과 제약이 뒤따른다. 대다수 사람은 고교졸업 때까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크고 작은 공동체에서 이런 마찰을 경험한다. 그런데 가족, 유치원, 초중고교에서는 개인과의 마찰을 줄이는 비용으로 배려라는 방편을 사용한다. 모든 공동체는 구성원에게 일정한 역할을 요구한다. 그러나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요구하는 역할을 미숙하게 수행하더라도 배려를 완전히 거두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이때까지는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을 무난히 수행하면 대부분 각 과정의 졸업장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고등학교 졸업장에는 다른 졸업장과는 다른 무게가 실린다. 고교졸업장은 현대판 성인인증서다. 이것을 받지 못한 그 나이의 사람들에게도 같은 효력이 적용된다. 이때부터 공동체는 개인에게 베풀던 배려를 급격히 거둬들인다. 사회초년생들은 그동안의 배려를 거둬들이면 그동안의 제약과 제한이 완화될 것으로 생각한다. 따뜻함을 포기하고 차가움을 선택하는 대가로 자유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율의 신선함을 기대한다.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사람 중에는 여전히 따뜻한 배려를 기대하는 사람도 있으나 현실은 자율에서마저도 덜 따뜻하다. 어느 순간 변화된 일상에 당황하여 이전의 따뜻한 손길에 매달리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음을 알아간다. 그들은 그때 서야 비로소 공동체가 배려를 통하여 자신의 판단을 대신하였음을 알아차린다. 그래서 배려는 판단의 다른 측면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동안 공동체의 배려는 더 큰 역할을 요구하기 위한 훈련이자 수련이었다. 이제 공동체는 그동안의 배려는 거둬들이고 새로이 보충된 구성원에게 이전과는 다른 태도를 요구할 수 있게 되었다. 공동체는 공동체에 대한 이해를 요구한다. 이는 공동체가 배려로 판단해 주던 것보다 더 무거운 요구이다. 그러나 마지막 먹이를 먹은 새로운 구성원도 이제는 피하지 않는다.

공동체는 새로이 편입된 성인에게 인격과 도덕성, 지혜와 판단력, 책임감과 독립심 등 공동체의 유지 존속 발전에는 중요한 자질들을 요구한다. 정직과 신뢰의 바탕에서 예의범절이 생기고 인내와 절제를 바탕으로 나눔과 배려의 태도를 내면화할 수 있다. 경험과 경력은 사리분별력을 키움으로써 공동체의 발전에 기여(寄與)한다. 자신에게 요구하는 역할의 수행과정에서 독립심을 배양하고 독립적인 생활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 공동체는 이러한 자질들을 갖춘 건강한 육체와 건전한 정신을 갖춘 성숙한 구성원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건강한 육체를 기르고 건전한 정신을 함양하는 구성원으로서 역할을 요구한다. 건강한 육체와 건전한 정신은 공동체를 발전시킬 수 있는 자질을 갖추는 토대다. 이제까지는 공동체가 제시하는 가치를 따를 것을 강요하였지만 이후부터는 개인이 가치를 만들 것을 요구한다. 공동체는 오랜 기간 건강한 육체와 건전한 정신을 함양한 구성원을 길러내고 확충하는 시스템을 다듬어 왔다. 우리는 이 시스템을 통하여 공동체가 개인에게 기대하는 바람을 이해하고 실행함으로써 건강한 공동체의 일원으로 성장해 간다. 그래서 성인으로 인증받은 시점부터 공동체는 보살핌의 배려보다는 도전과 책임의 무게를 강조한다.

그래서 사회적 배려는 개인의 판단력을 기르는 일종의 훈련이다. 공동체의 건강하고 건전한 구성원이 되려는 의지에는 판단이 필요하다. 모든 개인에게는 타고나는 인간 본성과 천성이 있다. 이를 바탕으로 개인이 처한 상황에 따라 삶을 시작한다. 이때 나타나는 개인의 행위와 태도 등에 관한 성향이 개성이다. 따라서 개성은 선천적인 자질이 아니다. 개성에는 개인의 판단이 개입된 후천적인 경험의 축적이 강하게 얽혀있다. 사회적 배려를 거둬들이는 시점이면 각 개인의 개성도 일정한 모습을 드러낸다. 그래서 이 무렵에 공동체는 새로 유입되는 성인 구성원에게 묻는다. 너의 지금의 개성으로 너의 앞으로의 삶을 가꾸어 갈 수 있는다고 정말 믿을 수 있겠냐고. 이 물음은 어미 새가 새끼 새에게 물어주는 마지막 먹이다. 이 마지막 먹이는 어미 새의 판단과 새끼 새의 판단이 일치하는 지점이다. 이 지점에서 미련 없이 서로의 삶을 찾아가는 새와 달리 인간은 흔들린다. 과연 지금의 나의 개성이 정말 나의 개성일까?라는 의문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이제까지 나오지 않았고 앞으로도 나오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점이 있다. 자신의 천성을 알아가려는 노력이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며, 자신의 개성을 예민하게 관찰하면 자신의 천성을 알 수 있다는 사실이다.

천문박명(天文薄明)은 매일 해가 뜨기 전과 해가 지고 난 직후에 나타난다. 태양이 지평선 아래에 있는데 대기는 희미하게 밝은 상태이다. 별과 은하수의 관측은 일몰 박명에서 일출 박명 사이에 이루어진다. 간접 조명이 없다면 하늘의 모든 별의 관측이 가능하다고 한다. 태양이 수평선 위로 올라오면 희미한 밝음은 사라진다. 태양이 지평선 아래로 내려가면 희미한 밝음은 어둠에 묻힌다. 지식으로써 천문박명은 별과 은하수의 유혹으로 관측자를 모은다. 인문적 사고로써 천문박명은 우주 속 빛나는 존재가 ‘나’ 임을 깨닫게 한다. 모든 사람은 천문박명 속에 있다. 현재 상황이 일몰 천문박명인지 일출 천문박명인지의 판단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특히, 자신이 명확해지는 성장의 시작에 서 있음을 인식하는 사람은 천문박명의 지식으로 인문적 지혜를 얻는다. 세상에는 어둠과 빛이 공존하며 인간의 삶은 혼란과 통찰이 공존한다. 세상의 미묘한 변화는 세심한 관찰에서 얻을 수 있으며 자신의 미묘한 변화는 세심한 자기 사랑에서 느낄 수 있다. 해가 떠오름은 자신의 성장 가능성으로, 해가 짐은 성찰의 시간이 주어짐을 인식하게 된다. 천문박명은 아직 빛나고 있지 않지만 이미 빛이 오고 있는 신호이기도 하다. 또한 아직 빛나고 있는 빛이 비워져야 새로운 빛을 채울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는 성찰을 얻게 된다.

사회적 배려에는 미래의 성숙한 구성원으로 성장하도록 하기 위한 판단이 들어있다. 미성년은 사회적 배려로부터 옳고 그름, 타인과의 관계, 자율성과 책임감의 형성, 주어진 정보 분석고 대안 모색 등의 판단을 성인으로써의 삶을 가꾸는 핵심 판단 능력으로 발전시키게 된다. 현대 과학 기술의 계산과 알고리즘이 제공하는 편의는 선택을 강요하는 측면이 강하다. 기존의 지식에 근거하여 제공된 정보 속에서 선택함으로써 편협하거나 편중된 태도를 가질 수 있게 될 수도 있다. 이러한 태도가 지속된다면 맥락적 이해를 통한 맥락적 판단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맥락적 판단력은 세상의 역설을 이해하고 자신의 판단에 따른 선택이라야 책임의 당위성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한다. 선과 악, 밝음과 어둠, 보수와 진보같이 세상은 온통 반대되는 성질과 그것들이 얽힌 관계로 복잡하다. 이 복잡한 세상에서 자신의 삶을 가꾸기 위해서는 세상을 이해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이 능력에 따라 삶의 무늬가 달라진다.

세상을 이해하는 도구인 지식 정보의 생산에서 효용, 효과, 효율을 고려한다면 ‘구분’은 아주 매력적인 수단이다. 복잡하게 얽힌 세상사를 특정한 기준과 원칙으로 분리하면 보이지 않던 것들을 볼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맥락적 이해는 사실이나 진실에 더 근접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렇게 생산된 지식과 정보가 개인의 삶에 효용이 있으면 더 많은 사람에게 전달되고 그 경험은 축적되어 다음 세대에게 전달된다. 구분은 세상과 사물을 이해하기 위한 많은 수단 중 하나이다. 수단으로써의 구분이 구별을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어 차별의 태도를 가지게 될 때 인간은 옹색한 시야에 갇히게 된다. 하나에서 하나를 구분하면 둘이 되어 구별을 할 수 있다. 구별을 통하여 선택된 하나를 남기고 다른 하나는 버리거나 제외, 제거, 무시 등의 방법으로 차별을 택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전체를 이해하기 위한 수단으로써의 구분은 반쪽만을 이해하는 옹색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하나에서 하나를 구분하고 그 하나하나를 살핀 다음에는 다시 둘을 하나로 살피는 태도라야 더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전체인 하나에서 구분한 하나를 버리지 않고 다시 전체로 통합해서 보겠다는 태도는 수동적 선택보다는 능동적 판단에 기인한다. 우리의 일상은 판단보다는 선택에 의존하여 이루어진다. 모든 선택에 판단이 개입되기는 하지만 의식하지 못하거나 애써 외면한다. 굳이 구분하자면 선택은 일상적 생각의 영역에서 활용되고 판단은 형이상적 사유의 영역에서 사용한다고 하겠다. 그래서 구분된 하나를 버리지 않는 태도를 지향하겠다는 판단은 의미가 커진다. 전체를 살핌, 맥락적 이해, 입체적 사고, 통찰 등의 공통점은 편벽한 판단의 지양이다. 편중된 사고는 잃어버린 반쪽에 대한 변명이다. 편벽한 태도의 강함은 나머지 반쪽이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진실의 힘에 대한 두려움의 강도다. 그래서 편벽한 사고는 옹색하고 편중된 태도는 옹졸하다고 한다. 막힘과 답답함에 안주하기는 쉬우나 벗어나려고 할 때는 불안하고 불편해진다. 그러함에도 벗어나려는 의지에는 가벼운 선택이 아니라 무거운 판단이 개입되어야 한다. 선택에는 비난이 따라올 수 있지만 판단에는 책임이 따른다. 따라서 판단력을 배양하는 노력을 지속해야 자신을 지키고 스스로 설 수 있는 삶을 가꾸어 갈 수 있다.

맥락적 판단이 필요한 추상적 사유의 유용한 수단으로 시야와 시선이 있다. 가상의 공간에 시야를 횡단 축의 사고로 시선을 종단 축의 사고로 설정하고 두 축이 만나는 어떤 점에 자신의 판단이 개입되면 입체적 사유가 형성된다. 횡단 축에는 세상에 나타나는 다양한 사건과 사실을 나열할 수 있다. 특히 이러한 시도는 양극단으로 구분되는 것들을 살필 수 있는 능력이 배양된다. 선악, 명암, 미추, 전후, 진보와 보수, 옳은 것과 그른 것, 좋은 것과 나쁜 것 등. 시선은 시야에 포착되는 것들의 상황이나 상태를 살필 수 있는 능력을 배양시켜 준다. 시야와 시선의 교차하는 지점은 나의 판단이 개입될 때 비로소 생긴다. 이것을 사유라하고 이러한 사유들이 모여서 자신 내면으로 향할 때 ‘나’에 대한 질문이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이 현상은 너무도 자연스럽지만 너무나 미묘하고 미세하여 일상에서 포착되기 쉽지 않다. 인간의 뇌는 일상의 큰 흐름은 좋아하지만 작은 흐름은 무시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어렵게 포착한 ‘나’에 대한 질문은 사유의 도움을 받아 호기심으로 구분하고 궁금증으로 통합하여 통찰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집중하는 호기심과 확산하는 궁금증의 사유가 토해내는 질문은 ‘무엇’에 관해서이다. 세상은 무엇이고 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인류의 정신문화는 발전해 왔다. 무엇이 무엇인지. 그 무엇의 의미는? 그 의미에 부여할 수 있는 가치는? 그 가치로 내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는지? 그래서 결국 자신으로 설 수 있는지의 의문에 도달하게 된다.

모든 학습을 통해서 배운 지식으로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 무엇을 해야 하나? 왜 그것을 하는지에 관한 대화를 우선은 나와 시작해야 한다. 그동안 나를 세워준 것들에 대한 수동형의 자세보다는 스스로 서는 능동형의 자세를 고민해야 한다. 내가 속한 공동체는 성인인증을 통하여 성숙한 구성원으로서의 성장을 기대한다. 그동안 안내자 역할을 충실하게 해 주었던 지식을 지원자로 바꾸고 스스로 안내자 역할을 자임해야 한다. 그동안 공동체의 배려는 건강한 구성원으로 성장해 주기를 바라는 목적이 있어서였다. 이제 공동체의 목적을 이해하게 된 사람은 분명하게 자신의 갈 길을 고민하여야 한다. 포괄적인 관찰의 태도는 순응적 의미가 아니라 지속 가능한 판단을 위한 정보수집의 차원으로 활용해야 능동적 태도가 길러진다.

천문박명의 상황에서 우주 속 빛나는 존재로서 나를 인식한 사람의 태도는 달라져 있다. 나는 분별 있고 인식하고 배우고 일을 처리하고 느끼는 존재로서 과학이 완벽하게 설명서를 제공하기 전에 판단할 수 있다. 이 판단을 키우기 위해 자신과 대화하고 타인의 판단에 대하여 토론함으로써 나와 타인 즉,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생각하게 된다. 현대 과학 기술이 제공하는 계산이나 알고리즘에 의존한다면 판단력을 배양하는 이러한 요소들은 결핍된다. 그 결과 자신의 삶을 소비에 집중하는 행위에 몰두하도록 만든다. 가장 큰 폐해는 자신의 감정까지도 소비하면서 그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쾌감이라는 강렬함에 집착하면 말초적 욕망을 갈구하게 된다. 맛집을 찾고 나서 맛을 찾는 개성을 발휘한다면 소비보다는 음미에 관심을 두는 자질이 길러질 것이다. 인간의 오감이 반응하는 문화는 모든 인간의 삶의 무늬를 통합하는 개념이다. 문화가 화두가 되는 것은 소비와 창조가 동시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소비하면서 창조하고 창조하면서 소비하는 행위 자체가 문화이다. 소비하는 쪽으로 너무 가까이 가면 감정 소모를 하게 된다. 창조하는 쪽으로 가면 감정을 음미하게 된다. 아주 미세한 감정들을 자신의 기존 감정에 더함으로써 새로운 감정을 창조하는 것이다. 타인의 문화생산물을 소비만 하는 태도를 줄이면서 나의 문화생산물을 만들어 내는 행위 속에서 감정을 음미하는 태도를 지향하는 적절한 판단이 시선이다.

내삶에서 어떤 무늬를 어떻게 그릴 것인가? 이는 정해진 목표를 달성하는 단기간의 노력과 성과로는 판단하기에는 어려운 물음이다. 우선은 무늬를 만들 수 있는 도구와 재료들을 모아야 한다. 학습을 통한 지식으로 자신의 무늬를 그리는 도구와 재료의 양은 얼마든지 채울 수 있다. 시각적 무늬에는 다양한 색깔이 더 유용하고 청각적 무늬에는 풍성한 소리가 더 효과적이다. 그러나 다양하고 풍성한 재료들이 양으로 머물러 있는 한 옹색한 생각을 벗어나기는 어렵다. 양으로 확보한 재료를 질로 변화시켜야 확연한 나만의 무늬를 그릴 수 있다. 변화를 위해서는 지식을 학습하는 시야와 지혜를 공부하는 시선을 통합할 수 있는 사유라는 도구가 필요하다. 이 도구에는 계산과 알고리즘이 제공하는 편의에 순응하지 않고 시야를 넓히고 시선을 높이겠다는 고독한 인내의 의지가 들어있어야 한다.

출생에 대한 의학적 설명은 내가 그리는 무늬 속의 한 점이다. 출생 후 거쳐 온 여러 공동체도 한 점이다. 우리는 이 점들에 많은 관심을 쏟는다. 이미 있는 점을 확장하고 다른 점을 찾고 점들끼리 연결하기도 한다. 이렇게 열의를 보인 나의 활동으로 선이 그려진다. 많은 점과 선으로 연결된 구조는 복잡하다. 구조가 복잡해지면 형체가 드러난다. 드러난 형체를 점과 선으로만 표현하는 것이 한계에 다다른다. 형체 위에 실물이 없는 형상이 보이게 된다. 이제는 다른 도구가 요구된다. 출생 사실을 출생과 죽음, 의미와 가치, 삶과 존재 등 형이상(形而上)의 물음으로 전환해야 한다. 공동체가 요구하는 자질은 지식으로 이해할 수 있으나 자질을 내면화하는 것은 지식의 영역을 벗어난다. 그러므로 골격으로 이루어진 형체에 빈틈을 메워 형상을 입히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 작업에 필요한 도구가 인간의 사유다. 형상을 입힌다고 형체가 제거되지는 않는다. 다만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형체는 형상을 지탱해 주는 버팀목의 역할을 한다. 지식으로 지탱하는 형체를 넘어서는 형상을 입히는 사유가 등장한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무늬가 완성되기를 소망하고 노력한다. 하지만 모든 인간의 무늬는 미완성으로 끝난다. 그렇다고 죽음을 두려워하여 삶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설사 미완성의 무늬라도 그리겠다는 삶에 대한 의지를 가질 수 있기에 인간이다. 삶은 출생과 죽음 사이에 그려진 자신만의 무늬다. 출생이 우연히 이루어졌듯이 죽음도 우연히 이루어진다. 내삶이 비록 우연이지만 숙명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에는 인문적 시선이 스며들어 있다. 인문은 사람의 무늬이자 사람이 그리는 무늬다. 즉, 개인의 개성과 그 개성이 세상에 펼쳐 놓는 흔적이다. 개인과 공동체가 조화를 이루면서 그리는 무늬를 삶이라 한다. 내가 그리는 삶의 무늬가 아름답기 위해서는 공동체의 요구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그래야 인간은 자신의 생존을 아름답게 여기고 삶을 가꾸어 간다. 이 사실을 깊이 받아들이는 시점이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아 든 때라면 공동체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기뻐할 것이다.

천문박명의 상황에서 별빛이 잘 보이게 된 것은 상황의 변화이지 인간의 시력이 갑자기 좋아진 것은 아니다. 천체를 관찰한 사람들보다 더 시력이 좋은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 중에는 천문박명에 대한 지식을 풍부하게 갖춘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그러한 지식과 자신 삶을 조화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천체를 관찰한 사람은 지식의 영향을 막연히 기대하기보다는 천성을 발휘하여 자신의 경험, 또는 살아있는 기쁨을 얻은 사람이 되었다. 그들은 천문박명을 지식으로 끝내지 않았다. 지식을 나의 삶의 변화를 살피는 방관자로 방치하지 않고 그 변화에 나를 직접 투입한 것이다. 지식이 채워주지 않는 틈새는 출생의 의미, 존재의 의미에 대한 나의 사유가 메워주었다.

나의 출생의 생물학적인 설명은 고교까지 학습한 지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인간의 유래에 대한 설명은 진화학의 도움으로 가능하다. 인간의 의미에 대한 설명은 철학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나의 출생의 의미를 여러 학문의 지식으로 설명한다고 해서 충분하지는 않다. 나는 여러 학문의 설명을 넘어서는 존재이다. 이 한계를 넘기 위해서 인간이 발달시킨 사유가 인문적 사고이다. 인문적이란 인간의 의미를 최대한 넓고 깊게 그리고 높게 다다르기 위한 태도이다. 따라서 인문학이란 이러한 태도를 길러주는 성향이 강한 학문이 포함한다. 문학 역사 철학이 구분되면 하나씩이 되지만 통합하여 하나가 되면 인문학이 된다. 이들은 고정되거나 확립된 지식보다는 인간의 상상력에 의존하는 성향이 강한 학문이다. 문학은 기억과 상상에 의존하여 지금 있을 법한 이야기를 창작한다. 역사학은 사실(史實)과 사실(事實)에 대하여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면서 살피기에 열린 판단이 요구된다. 철학은 나와 다른 사람이 시공간을 초월하여 나누는 생각의 꼬리물기이다. 그래서 인문적이란 학습된 지식으로 설명하는데 머무르지 않는다. 지식으로 얻은 경험과 거기에서 촉발된 궁금증과 호기심에 대한 답을 하려는 태도에 쏠리게 된다. 이러한 태도를 ‘학습’과는 구별하여 ‘공부’라 한다. ‘공부’의 시작은 존재로서의 ‘나’에서 시작된다.

모든 존재는 우주에서 시작되었다. 우주에 대한 깔끔한 느낌을 주는 정의는 기원전 『회남자(淮南子)』에 나온다. 우(宇)는 사방상하(四方上下)의 공간이고 주(宙)는 예로부터 지금까지(往古來今)의 시간이라고 정리한다. 현대 과학도 이 정의의 도움을 받는다. 인간은 왜 우주라는 개념이 필요했을까? 오늘날보다 생존의 위협이 더 심했을 그 오래전에 생존과는 별로 연관이 없는 그 개념을 발명했을까? 이 발명의 의미는 어떤 것인가? 이러한 종류의 개념을 발명함으로써 사람은 다른 생명체와 구별되는 특징을 가지게 되었다. 존재가 존재를 생각하는 존재, 즉 인간이라는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인간의 지위를 차지하는 사유를 한 사람 중에 『태사공서』를 지은 사마천이 무소불규(無所不窺)라고 평한 장자가 있었다. 젊은 시절 그는 폭정을 행하라고 강요하는 상관에게 반발하여 관직을 버렸다. 이후 자신의 천성에 따라 살았다고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들의 살림이 넉넉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장자의 아내가 죽었다. 친구들과 지인들이 조문하러 왔다. 그런데 그는 박자에 맞춰 소리를 하고 있었다. 그의 친구가 아내의 죽음 앞에서 행동으로는 부적절하다는 볼멘소리를 한다. 이에 장자는 아내는 죽음으로 그 시작(始作)으로 돌아갔으니 축하할 일이고 기뻐할 일이라는 자신의 통찰을 설파한다.

우주를 떠돌던 알 수 없는 어떤 기(氣)가 아버지와 어머니의 몸속으로 들어가서 모인다. 아버지 몸속에 모인 기는 어느 날 어머니의 몸속으로 옮겨가 서로 섞인다. 그렇게 발생한 아내는 예상할 수 없는 때에 세상으로 나왔다. 그 존재는 젊어서 힘써 노력하며 살았고 늙어서 편안히 쉬었으며 죽어서 원래의 기운으로 돌아갔다. 이것이 자연의 흐름이며 이 원래의 흐름으로 아내는 흘러 들어갔다. 그러니 자신의 소리는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을 위해 죽은 사람이 보내는 위로라고 하며 술잔을 기울인다. 친구의 황망한 표정을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예상할 수 없는 새로운 것이 나타났다는 것이 시작의 본질이다. 죽음도 출생도 새로운 것이다. 모든 사람이 죽음을 끝이라 하였으나 장자는 시작을 보았다. 시(始)는 극(劇)이다. 극(劇)은 전과 후의 전환을 알 수 있는 상황이다. 전환을 통하여 우리는 시작을 볼 수 있다. 시(始)는 어떤 것의 멈춤이면서 어떤 것의 나아감이다. 장자는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이 정리된 아내의 죽음에서 아내의 시작을 되짚어간다. 장자는 죽음에서 태어남을 태어남에서 죽음을 살핀 것이다. 존재의 태어남은 무한으로 연결이 일시 정지된 상태이고 존재의 죽음은 무한으로 연결이 재생된 상태이다. 장자의 이러한 통찰을 『회남자』는 깔끔하게 우주에 보존했다.

이제 나에게도 우주가 의미가 있게 되었다. 나는 무한의 우주에서 시작되었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의 영역은 무한의 우주로 넓어졌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해볼 수 있다. 그렇더라도 ‘굳이’ 상상만으로 가능한 무한의 우주로부터 인간을 데리고 와야 했는가? 지상의 신성한 공간을 상상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러면 오히려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더 많은 관심을 가질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자신의 삶을 더 알차게 가꿀 수도 있었지 않을까? 그런데 인간의 지위를 차지하는 사유를 했던 인류는 모든 생명체를 움직이게 하는 힘에도 궁금증을 가졌다. 그 힘이 빛에서 나옴을 알았다. 빛은 지상에서 발원하지 않는다. 빛은 무한의 우주로부터 온다. 그리하여 인간은 지상과 우주를 연결하는 사유를 얻게 되었다. 우주에는 무한한 힘의 원천이 있다. 나는 무한의 우주와 연결되어 있기에 힘을 얻어 살아간다. 무한의 우주에서 힘을 얻음에도 살아가지 못하는 예상하지 못한 새로움이 죽음이다. 삶과 죽음은 예상하지 못한 새로움일 뿐이다. 죽음이 두려운 것은 새끼 새가 둥지를 벗어나지 못하는 미련이자 예상하지 못한 새로움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래서 죽은 자는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건넬 수 있다.

달구소리. 죽은 이를 위한 산자의 위로라는 해설이 담긴 이 소리는 지금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상여를 메고 장사를 지내준 경험이 있는 사람 중에서, 어쩌면 슬프고 어쩌면 흥겹기도 한 이 소리의 미묘한 느낌을 지우지 못한 이도 있을 것이다. 살아가야 하는 이들에게는 떠나보내는 이에 대한 아쉬움과 서운함의 소리이고 죽은 이에게는 평안과 안식의 소리다. 무한한 우주의 한 모퉁이에서 죽음을 단절의 슬픔이 아닌 보이지 않는 연결로 돌아감을 되새기는 소리다. 이 소리의 내용은 현장에서 급조되기에 소리를 메기는 소리꾼의 창작 능력은 대단하다. 소리꾼은 상여를 꾸미고 장지에 도착하는 동안 상주와 가족들의 분위기를 파악한다. 여기저기에서 술잔을 주고받으면서 상을 당한 집안과 가까운 동네 사람들에게서 들은 몇 가지의 사실과 일화를 챙긴다. 적당한 취기로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관이 완전히 흙으로 덮이고 땅 위에 죽은 이의 흔적이 보이기 시작하면 소리꾼의 소리가 들린다. 구성지고 따뜻한 소리는 무겁게 가라앉은 가족들의 심정을 어루만져준다. 단조롭고 활기찬 소리는 죽은 이의 흔적을 남기려고 장시간 애쓰는 일꾼들의 힘든 기분을 덜어준다. 때로는 상주들의 꽉 막힌 슬픔을 터트려 주고, 때로는 가족들의 아쉬움을 어루만져준다. 미묘한 상황 속에서 입담이 계속되면 가족 친지가 아닌 사람들의 감정도 건들게 된다. 이러한 분위기에 이르게 되면 달구소리는 죽은 이를 위한 산 사람들의 위로가 아니라, 살아가야 하는 이들을 위한 죽은 이의 위로로 들리게 된다. 그래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은 한 사람의 죽음에서 삶과 죽음이 연결되어 있음을 어렴풋이 가슴에 담는다. 이 어렴풋한 느낌은 예상하지 못한 새로움이다. 사람들은 무엇인가가 시작되었음을 알아차린다. 내일도 내삶을 일궈가야 하는 사람들은 존재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강화한다. 내삶을 일궈가는 사람은 자신에게 영혼이 있는 뿌듯함을 내면화한다. 자신을 예상하지 못한 새로움에 던져서 내삶의 무늬를 독특하게 그리며 살아가려는 의지는 더 강렬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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