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다움으로 서는 사유

본성(本性)과 천성(天性) 그리고 개성(個性)

by 김기황

사유(思惟)는 시야(視野)와 시선(視線)이 엇갈릴 때 일어난다. 생각은 일상에서 돌발하는 의문을 해소하는 정신활동이다. 사유는 의도적 호기심과 궁금증으로 생각에 대해 생각하는 정신활동이다. 특히 내 삶의 질적 변화가 필요하다고 판단될 인간의 지적(智的) 호기심과 궁금증이 증가한다. 그리고 일상보다는 좀 더 견고한 의미를 찾아내고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나만의 고유한 정신활동이 된다. 사유는 보이는 것을 단순히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과 보는 방식 사이의 긴장 속에서 발생하는 움직임이다. 사유를 움직이는 힘은 시야와 시선이 만들어 내는 입체적 구조에서 나온다. 이를 통하여 입체적 이해, 맥락적 이해, 통찰 등의 정신활동이 풍부해진다.

시야는 높이를 염두에 두지 않는 횡단적 사고에 유리하다. 시야는 세상의 넓이에 대해 내가 접하고 인식할 수 있는 경험과 정보, 관점의 스펙트럼이다. 타인의 관점, 사회적 맥락, 시간의 흐름, 문화의 다양성 등은 개인의 판단 기준을 중심으로 좌우로 확산해 있다. 시야는 나의 현재 관점에서 얼마나 넓게 세상을 포착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능력이다. 시야가 좁다면 편협해지고 균형을 잃는다. 시야가 넓으면 세상은 더 복잡하고 입체적으로 다가온다.

시선은 넓이를 염두에 둔 종단적 사고에 이점이 있다. 시선은 횡단적으로 포착된 세상을 입체적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다. 같은 사안이라도 어디에 주목하느냐에 따라 의식의 방향성과 깊이는 차이가 드러난다. 타인의 관점, 사회적 맥락, 시간의 흐름, 문화의 다양성은 어느 한순간 세상에 나타난 것은 아니다. 인간의 경험을 시공간의 흐름 속에 쌓아둔 지적 재산들이다. 시선은 이것들을 나의 현재 관점에서 얼마나 높게 세상을 포착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능력이다. 같은 시야를 공유한다고 하더라도 시선은 사람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고통에 주목하고 누군가는 질서를 또 누군가는 변화에 시선을 고정한다. 시선은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를 드러내는 주체의 언어다. 시선은 나의 신념이며 감각이며 태도다.

사유는 시야와 시선이 교차하는 그 한 점에서 시작된다. 시야라는 배경과 시선이라는 초점이 교차하는 그 지점에 나의 판단이 개입될 때 사유가 발생한다. 이 판단은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해석이며 나의 존재를 투영하는 방식이다. 나는 무엇에 주목할 것인가? 무엇을 물을 것인가? 이러한 질문이 던져지는 순간부터 사유는 살아있는 일로 변모한다. 사유의 발생은 의미가 생성되고 가치가 부여되었음을 뜻한다. 그러므로 사유는 정적인 구조물이 아니라 시야를 넓히고 시선을 조절하며 교차점을 재구성하는 반복적 과정이다. 이렇게 해서 사유는 입체성을 획득한다. 단순히 정보나 감정을 이해하는 차원을 넘어선다. 사유는 맥락적 이해와 깊이 있는 통찰로 판단의 품격을 점차 높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아마 성숙이란 이러한 교차점에 책임 있게 머무를 수 있는 능력, 곧 사유의 무게를 감당하는 태도일 것이다. 그래서 성숙한 성인은 사유의 무게를 가벼이 여기지 않는다.

‘존재가 존재함을 사유하는 존재’가 되고자 하는 의지로 인간은 인간의 지위를 획득했다. 이 과정에서 존재함을 사유하는 존재인 인간은 본성(本性)과 천성(天性) 그리고 개성(個性)이라는 개념들을 발명하고 발전시켜 왔다. 인류가 이룩한 문명의 아주 단순한 정의는 이 개념들의 각주다. 각주는 타인의 사유에 나의 사유를 덧붙이는 인류의 정신활동이다. 오랜 세월 인류는 인간의 본성과 천성을 끊임없이 찾아내고 다듬어 왔다. 근대에는 인간의 본성과 천성을 신분제도 고착화의 도구에서 탈피시키려는 역사적 비평과 비판이 활발했다. 인류는 각주에 개성을 추가함으로써 인류 정신사를 더 풍부하게 만들었다. 비로소 개별성을 가진 존재로서 개인의 개성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오늘날 개성의 추가로 이전의 본성과 천성의 세상이 복잡해진 것은 아니다. 본성과 천성 속에 묻혀서 볼 수 없었던 것을 드러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내 삶의 풍취를 넓히고 풍미를 깊게 할 수 있는 귀중한 사유의 도구를 또 하나 얻었다.

본성과 천성은 엄격히 구분하여 사용되어 온 개념은 아니다. 동양 고전에서 성(性)이라는 한자는 다방면으로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특히, 끝이 없을 것 같은 혼란, 멈춰지지 않는 전쟁, 그 속에서 피폐해진 인간의 삶에 대한 고뇌가 깊었던 시기에 성에 대한 통찰을 활발하게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인간의 삶이 짓밟히는 상황과 공동체의 질서가 무너지는 상황은 같은 의미다. 동양 고전에는 끊임없는 혼란과 전쟁 속에서도 공동체의 질서유지 목적은 인간의 삶에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공동체의 질서가 유지됨은 곧 인간 삶의 평안과 평온이다. 이러한 세상의 실현이 가능하다고 믿은 사람들은 인간의 본성에 주목함으로써 혼란과 전쟁을 끝낼 수 있다는 신념으로 자신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이들의 인간 본성의 이해와 노력은 부질없이 되었고 역사는 늘 전쟁을 기록하고 있다. 어쩌면 그 기록은 개인의 삶에 대한 본성과 천성의 이해가 부족하다는 질책일지도 모른다.

인간 본성에 관한 사유는 생명체의 이해에서 시작해야 한다. 인간은 생명체라는 언급 없이는 정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생명체가 지구에서 존재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이동하면서 살아가는 방식과 고정된 위치에서 살아가는 방식이다. 방식은 달라도 생명체로써의 지상 최대 과제는 생존이다.

수관회피현상(樹冠回避現狀, crown shyness)은 고정된 위치에서 생존을 도모하는 생명체인 나무들이 모인 공간에서 목격된다. 열대 우림에서 키가 큰 나무들은 서로 닿지 않도록 가지와 잎을 조절해 나무의 윗부분(수관)이 서로 분리되는 둥그런 테두리를 형성한다고 한다. 학자들은 이 현상의 이유로 햇빛을 골고루 받기 위해, 가지끼리 부딪혀 다치는 것을 피하려고, 병해충의 전파를 줄이기 위해서라고 추정한다. 이러한 추정에서 고정된 방식의 생존을 선택한 생명체에게서 한 가지를 유추할 수 있다. 자신에게 이로움은 추구하고 해로움은 회피하려 한다는 점이다.

아메바 (Amoeba). 이동하면서 생명을 유지하는 가장 원초적인 생명체 중 하나이다.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다. 인간의 과학과 기술로는 이 생명체의 뇌와 신경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렇지만 빛, 온도, 화학 물질 등 주변 자극에 반응하며 살아간다. 인간에게는 가짜 발로 보이겠지만 몸의 일부를 늘려 움직이기도 하고 먹이를 감싸고 소화하여 생존한다. 아메바가 있는 공간에 이물질을 두면 회피하는 움직임을 보인다고 한다. 인간의 기준에서 본다면 매우 신비한 현상이다. 뇌와 신경이 없는 생명체가 해로움을 판단하기 때문이다. 움직이면서 살아가는 방식을 선택한 생명체도 자신에게 이로움은 추구하고 해로움은 회피하려 한다.

인간의 본성은 인간이 공유하는 생명체로써의 이로움은 추구하고 해로움은 회피하는 성질이라고 아주 단순하게 정리할 수 있다.

인간은 움직임을 이동으로 바꾼 지난한 진화 과정에서 탄생했다. 따라서 인간도 이로움은 추구하고 해로움은 회피하려 하는 본성이 있다는 점은 명확하다. 이러한 본성을 살필 수 있는 원초적인 행동을 상상해 보자. 아무도 없는 혼자만의 공간에 한 아이가 위를 보고 누워있다. 이 아이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얼굴 위로 침 뱉기’를 요구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도 침 뱉기를 하는 아이도 있고 애초부터 거부하는 아이도 있을 것이다. 아무런 조건도 없는데 이 행위를 하지 않는 아이의 심성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이를 이로움을 추구하고 해로움을 피하려는 생명체의 본성으로도 이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 물리적으로는 어떠한 해악도 끼치지 않을 행동을 회피하려는 것은 존재를 사유하는 인간이기에 가능할 것이다.

옛날 어느 절에 주지 스님이 귀여워하는 동자승이 있었다. 주지 스님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던 동자승은 버릇이 없었다. 주지 스님이 출타한 어느 날 버릇없이 굴던 동자승을 다른 스님들이 소위 버릇을 가르쳤다. 주지 스님이 돌아오자 동자승이 나와서 깎듯이 예의범절을 차렸다. 주지 스님이 놀라서 연유를 묻자 동자승은 울먹였다. 곁에 있던 스님이 자초지종을 대신했다. 자초지종을 들은 주지 스님은 세상 세파에 물들지 않도록 지켜주던 스승을 잃어버렸다며 탄식했다. 이제부터 동자승은 비가 와도 먼 길 심부름을 다녀야 하며 추워도 새벽에 일어나 불경을 외워야 한다. 동자승은 하기 싫은 일을 피하지 못하게 되었다. 엄마 품을 느낄 수 있는 여신도가 찾아와도 달려가 안길 수 없으며 배가 고파도 공양 시간까지 기다려야 한다. 동자승은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주지 스님은 동자승의 해로움은 회피하고 이로움은 추구하는 본성이 예의범절이라는 세파에 허물어짐이 안타까웠을 것이다. 예의범절이 공동체의 질서유지에는 아름다울 수 있어도 아직 단단해지지 않은 본성을 보듬어주기에는 아름답지 않을 수 있다. 인간 본성의 스펙트럼은 억지를 써서 말한다면 존재하는 사람 수만큼 있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본성을 몇 가지의 예의범절로 가두는 것은 아름답지 못하다.

인간에게 나타나는 이로움은 추구하고 해로움은 회피하려 하는 행위를 본능으로만 생각하지 않는 태도는 중요하다. 이러한 생각은 타인의 본성도 인정하는 태도를 길러주기 때문이다. 행위에 중점을 두는 본성인 본능보다는 심리에 중점을 두는 본성인 감정은 더 복잡하며 자신도 알기 어렵다. 인류는 감정교류가 인간 삶을 지배하는 핵심임을 간파하였어도 여전히 확실한 방법을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다.

여유로운 휴일 아침 9시경. 다섯 살 쯤으로 보이는 아이가 아빠와 실랑이 중이다. 아침을 먹고 싶지 않다는 아이와 먹어야 한다는 아빠는 평화로운 휴일 아침을 잃어버렸다. 꼭 아침을 먹이겠다는 아빠는 갑자기 아이와 같이 시청했던 다큐멘터리가 떠올랐다. 전쟁과 가난으로 굶고 있는 아이들의 처참한 상황이 담긴 영상이었다. 아빠는 그것을 상기시키면서 아이에게 아침을 먹을 것을 다시 한번 강요했다. 그때 아이가 말했다. ‘내가 아침을 먹으면 그 아이들이 배가 부르나요?’ 자신의 이로움을 추구하는 본성도 때가 맞지 않으면 피하려고 하는 존재가 인간이다. 어쩌면 이 아이는 이로움을 추구하는 본능인 음식을 대할 때마다 천성이 무시당하는 느낌에 시달릴지도 모른다. 서툴지만 어렴풋하게라도 자신의 감정을 살펴서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미를 아빠가 짓밟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당연히 아빠의 의도는 선했다.

천성은 때가 맞을 때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인간의 감정이다. 기뻐하고 노여워하고 슬퍼하고 즐거워하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하고자 하는 감정이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지는 않는다. 또한 적절한 때에 적절한 정도가 아니면 사람의 대접을 받지 못하기도 한다. 동양에서 오래전부터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은 사유에서 도출한 칠정은 인격 수양의 핵심 대상이었다. 유교 사서 중 《중용》에서는 기쁨과 노여움과 슬픔과 즐거운 것이 나타나지 않은 것을 중(中)이라 하고 나타나서 다 절도에 맞는 것을 화(和)라고 한다. 중은 천하의 큰 근본이고 화는 천하의 통달한 것이라 하였다. 홀로 살아가는 인간이라도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다. 또한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일이나 행동 따위를 알맞게 규칙적인 한도에 맞추면서 살아가기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세상은 ‘수많은 나’가 모여서 이루어져 있다. 그러므로 ‘수많은 나’ 중의 하나인 ‘나의 근본’으로 세상은 이루어졌다. 그래서 세상의 큰 근본은 ‘수많은 나’의 근본이 모두 존중받아야 하기에 중(中)으로 표현했다. 이를 중으로 표현한 것은 편벽되거나 한 곳에 치우치지 않아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수많은 나’의 근본인 천성이 드러남에도 절도에 맞는다면 서로가 얼굴을 붉힐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천하의 통달한 것이란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이다. 이로써 나는 타인에게 당당하고 자신에게는 떳떳할 수 있게 된다. 인격 수양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위력을 갖는 것은 인간공동체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기 때문이다. 할 수 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는 태도와 하지 못함에도 하려고 하는 자세는 주변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그러한 인격에 대하여 인품과 품위라는 표현으로 경의를 드러낸다.

유학은 인간이 무분별하고 무차별인 천성의 분출을 경계했다. 유학은 사회 질서유지와 인간의 삶에 기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제도, 문화, 교육 등 공동체 차원에서 천성의 발호를 제지하려는 대부분의 노력은 실패했다. 근원적 해결을 모색하던 사람들은 천성을 살피고 통제하는 수단으로 수양을 제시했다. 수양의 최고 수준으로는 자신의 감정을 다스릴 수 있는 성숙한 구성원으로 제시했다. 수양은 자발적 고립으로 자초한 고독 속에서 단순한 혼자만의 정신활동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행태는 편협한 시야와 편중된 시선을 강화하는 폐해를 입을 수도 있다. 수양은 공동체의 질서유지의 방편으로 제시되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의 감정도 존중하는 태도가 수양에는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타인과의 인간관계를 허례허식이라고 단순하게 치부해 버린 그 격식과 품격을 내버리면서 우리는 품위를 잃어버렸다. 품위는 조건을 동원하여 가릴 수는 있지만 품격은 오롯이 개인의 수양이 쌓여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내공을 쌓기 위해서는 예의범절이 필요하다. 예의범절 속에 깃든 허례허식은 ‘이로움을 추구하려는 생명체의 본성’을 과도한 충성심으로 오염시킨 이기주의일 뿐이다.

우리는 군사독재의 종말과 민주화 출발의 기쁨을 1980년 후반에 누리기 시작했다. 이 무렵 당시 청춘의 아이콘이었던 이 지연의 ‘느낌’이라는 대중가요가 전국에 울려 퍼졌다. 비로소 우리 사회에 개성을 주목하라는 강렬한 메시지가 던져졌었다. 이 노래의 내용은 사랑은 이성보다는 감성, 첫인상의 강렬함,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겠다는 믿음 등이었고 사람들은 여기에 열광했다. 이 열광은 억눌린 상황을 이성으로 버텼고, 첫인상이 아니라 태도를 강요당했으며, 자신의 감정을 숨겨야 살아남을 수 있는 피폐한 시대의 끝남과 새로운 시대에 대한 사람들의 열망이었다. 이후부터 우리는 세대를 구분하는 도구로 개성을 활용한다.

개성은 본성과 천성이 만나는 지점에 나의 판단과 선택이 개입될 때 나타난다. 나의 판단은 호기심과 궁금증에서 촉발된다. 본성과 천성이 만나는 지점에 틈새가 보이면 호기심을 집어넣고 낌새를 감지하면 궁금증을 발동한다. 개성은 나의 호기심과 궁금증에 대한 나의 답이다. 인간으로서의 본성과 나에게 주어진 천성을 통하여 세상을 헤쳐 나가려는 성향이 개성이다.

개성을 알아가는 것은 지식을 통한 성찰로 지혜에 이르는 과정이다. 나의 개성에 대한 기미(幾微)라도 잡으려면 자신을 대하는 태도에 따뜻함과 참담함이 묻어 있어야 한다. 따뜻함은 생명체의 본질이다. 살아있기에 생명체의 따뜻함이 있다. 살아있기에 소중하다. 소중하기에 의미가 있다. 의미가 있기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 가치를 부여하기에 일상을 넘어서는 곳으로 시선을 보내고자 한다. 실체를 확인할 수 없는 이 사유에서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에게 보내는 부정, 무시, 자격지심 등의 혼란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을 따뜻하게 대하는 태도를 가진 사람은 그러한 혼란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참담함이란 쥐구멍이 있어도 들어가지 못하는 상황이다. 처참한 상황이지만 솔직해질 수 있는 상황이다. 사람이 자신에게 가장 솔직할 때 떳떳함이 생긴다. 이 떳떳함은 자신의 따뜻함과 허물없이 손을 잡는다. 그리고 참담함에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설사 빠졌다고 좌절하지 않는다. 이 참담함에 빠지지 않으려는 노력이 수양이다.

따뜻함이 모이고 참담함이 옅어지면 새로운 시선이 드러난다. 개성과 삶에 대한 통찰을 제시한 노자는 개성의 의미를 넓혔다. 천성은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에서 꾸미지 아니한 본연 그대로의 성질이다. 노자가 말한 무위자연의 삶을 실행하고 싶다면 자신의 바탕인 천성을 살펴보는 노력이 있고 나서야 가능하다. 자신이 살핀 그 천성에 따라 자신의 삶을 가꾸어가는 것이 무위자연의 태도이다. 노자의 자연스러움은 상태이지 상황이 아니다. 상태를 억지로 만들지 않는 것이 노자의 무위에 더 가깝다. 무위자연의 삶을 가꾸어 가는 태도는 하나의 개성이다. 느낌이 중요하다는 말은 사회가 제시하는 기존 가치가 자신의 천성과 맞지 않음을 토해내는 것이다. 기존 가치들이 개인의 천성을 억누르면서 개성이 왜곡된다.

노자는 오색(五色), 오미(五味), 오성(五聲)을 제거하면서-기존 가치를 부정하면서– 자신의 철학을 설파한 것은 아니다. 오색, 오미, 오성 너머에 있는 다양함을 살피라고 하였다. 오색 너머에 있는 수많은 색깔은 오색이 있어야 보인다. 오색을 제거하면 오색이 섞여서 나타나는 다양한 색깔들은 볼 수 없게 된다. 색깔의 개성이 사라진다. 색깔의 개성으로 사계절 자신의 천성을 드러내는 수많은 존재를 한꺼번에 포착하는 사유를 가지게 되면 아름답지 않은 색깔은 없다. 수많은 사람이 자신의 입맛에 따라 전국과 해외의 맛집을 순례한다. 다섯 가지 맛만 있으면 일어날 수 없는 현상이다. 오미(五味)에 매몰되어 이런 맛을 좋아하는 사람이 저런 맛을 좋아하는 사람을 무시한다면 그 반대도 일어나게 된다. 맛의 개성은 사라지고 삭막한 단조로움만이 남는다. 오미의 경계를 허물어야 맛의 개성이 드러난다. 세상에 다섯 가지의 소리만이 있다고 해버리면 다른 소리의 아름다움은 설 자리가 없다. 천성도 오성(五聲)도 나의 개성을 만들어 간다는 점에서 같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나의 천성이 좋아하는 소리가 오성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오성을 무시할 필요는 없다. 오성은 자연의 소리도 아니고 인간이 만든 소리도 아니다. 인간이 합의한 소리다. 합의는 천성 이후에나 드러난다. 우리가 그 합의보다 늦게 태어나서 마치 오성이 우리의 천성을 억압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뿐이다.

느낌이 중요하다는 것은 자신의 천성이 어떤 인위적인 간섭 즉 노자의 ‘위(爲)’의 개입 없이도 흔들리거나 불안하거나 불편한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고요하고 안정되고 안심되는 상황은 늘 지속될 수는 없다. 고요, 안정, 안심은 본성과 천성이 만들어 주는 개성이 가끔씩 나에게 선물하는 평안과 평화일 뿐이다.

개성을 알아간다는 것은 영혼의 오염에서 벗어난다는 소극적 차원도 있지만 자신도 모르게 오염된 천성을 극복한다는 적극적 차원도 있다. 오염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세상의 기준과 자신의 천성을 살피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 둘의 조화를 위해 개입되는 나의 판단으로 나의 개성이 드러난다. 세상의 기준과 나의 천성과 개성이 적절함을 얻어가는 과정이 수양이다. 이 과정에서 타인의 감정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타인의 시선을 받게 된다. 천성이 욕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어쩌다 그런 사람이 되었을 뿐이다. 그런데 욕을 입에 달고 살던 사람이 이를 극복하는 경우를 정말 드물게 접하게 된다. 그 사람은 욕설의 가장 큰 피해자는 내뱉으려는 사람임을 깨달았을 것이다. 마치 ‘코끼리는 생각하지 말라’는 문제와 같이 설사하려는 욕설을 입 밖으로 내보지 않아도 자신의 마음으로 반드시 듣기 때문이다.

아이가 태어나서 항상 고요하고 안정되고 안심되는 상태를 유지하려고 엄마는 노력한다. 엄마는 모든 것을 희생한다고 주장할 수 있을지 몰라도 말 못 하는 아이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서서히 아이는 인간이 부정적인 감정으로 합의한 표정과 행동과 소리를 드러낸다. 그러면 엄마는 아이의 감정을 이해하기 위해 엄마가 학습한 아이의 감정 상태를 나타내는 단어들을 동원하여 노력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아이의 천성은 조율된다. 엄마 젖이 아닌 젖병을 빨도록 하면 아이의 배고픔은 제거해 줄 수 있다. 그러나 엄마 젖을 빠는 아이에게서 파악할 수 있는 천성을 엄마는 알아차릴 수 없다. 아이의 젖을 빠는 힘과 속도, 조막손의 위치와 쥐는 힘, 발의 위치와 움직임, 표정 등. 향후 아이의 행동과 정서에 영향을 줄 많은 것을 놓치게 된다. 젖병은 아이의 천성을 조율하는 첫 번째 도구가 된다. 이 길들여짐에 반항하는 행동으로 먹기 거부, 잠자기 거부 등의 작은 반항을 거치다가 사춘기로 이어진다. 사춘기는 자신의 천성으로 세상을 보고 싶어 하는 개성을 드러내는 시기이다. 당사자도 주변 사람들도 아는 것이 별로 많지 않다. 평소와는 다른 태도와 행동을 보이기에 좌충우돌이 되기 십상이다. 그런데 자식의 모든 것을 통제 가능하다고 여기는 부모가 경제적 독립을 무기로 억누르기에 사태는 점점 심각해진다. 아이의 천성에 관심을 가지면 이 시기를 현명하게 보낼 수 있다. 그러나 아이의 천성은 조율되어졌고 부모는 조율된 천성을 아이의 천성으로 알기에 자칫하면 부모가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 아이가 이해하지 못하는 부모가 되어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고 관계된 모든 사람의 삶의 무늬가 바뀔 수도 있다.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을 부모의 기준이 아니라 천성을 기준으로 보게 되면 더 아름다운 모습을 보게 된다. 아이의 천성을 살피는 이 모습에서 아이는 부모의 선생이라는 말이 나오게 된다.

느낌은 세상의 자극에 반응하는 인간 본능이다. 이 느낌의 해석은 오로지 본인만이 할 수 있다. 이 느낌이 중요하다거나 좋다거나 하는 것을 사회가 만든 의미나 타인이 부여한 가치로 판단하지 않고 자신의 의미와 자신이 부여하는 가치들로 판단할 수 있다면 천성을 따르는 자연스러운 모습이 된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는 고등학교 졸업장을 쥔 사람들에게 미래의 튼튼한 공동체의 건강한 구성원을 기대하면서 이러한 요구를 한다. 천성의 발휘와 느낌의 조화가 개성이다. 천성과 느낌의 엇박자로 발생하는 외톨이 사이코패스, 고집불통이 양산될 것 같지만 이들은 자신의 천성이 사회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일 뿐이다. 천성이라는 합의도 사람들이 세상에 나타나고 나서 나왔다. 천성대로만 살겠다는 생각은 할 수 있지만 실행은 불가능하다. 느낌이 중요하다는 말을 깊이 새기면 개성이 자연이 드러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