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의 본질, 흐름
모든 존재는 시공간의 제약을 감내해야 한다. 어찌할 수 없는 이 숙명에 저항한 존재가 나타났다. 상상의 영물인 용은 아니다. 본능에 충실하려는 경향을 지닌 학문상 동물로 분류되는 사람도 아니다. 이 존재는 동물적 본능을 넘어서려는 의지를 드러내는 존재다. 자신을 의식하는 정신을 소유한 존재이었다. 우리는 이 존재를 인간이라고 부른다.
저항의 시작은 시공간을 드러내는 일이었다. 시공간을 드러내기 전에 살았던 사람들은 흐름에 순응했다. 그 흐름에 온갖 변괴가 생겼고 사람들은 고통스러웠다. 고통은 사람들을 어지러이 방황케 하였다. 이 상황은 설명되어야 했다. 본능을 넘어서 보려는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 만났다. 이제까지의 흐름을 정리하여 시공간을 드러내어 보였다. 그들이 정의한 개념은 ‘우주(宇宙)’였고 이를 ‘회남자’라는 책으로 남겼다. 회남자에서 우주(宇宙)의 ‘우(宇)’는 “사방 위아래(四方上下)” 곧 공간을, ‘주(宙)’를 “왕고래금(往古來今)”, 즉 과거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시간 흐름을 가리킨다고 해석하였다.
회남자에서 우주라는 시공간을 정의할 수 있었던 배경은 춘추전국시대라는 혼란한 시기에 활동했던 인간들의 노력이다. 모든 존재의 흐름 속에서 흘러가는 숙명은 절대 진실이다. 숙명은 극복되지 않는다. 인간의 시공간에 대한 정의는 숙명의 극복이 아니라 숙명의 설명이다. 시공간을 우주라고 정의한다고 해서 흐름이 중단되지는 않는다. 흐름은 어떤 존재도 개입할 수 없는 절대 영역이다. 인간은 그 흐름의 현상을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흐름을 설명하기 위해 노자는 유무(有無)를 제시하였고 주역은 음양(陰陽)에서 찾았다. 둘은 같은 목적을 향하고 있으나 결은 다르다. 노자는 자연스러운 유(有)와 무(無)의 상생(相生)에 시선을 주었다. 그는 이런 자신의 주장을 도덕경 첫머리에 심어 두었다. 흰 구름 잡기를 내려놓고 내삶의 흐름을 살피는 도구로 도덕경을 접하면 나다움의 가물가물함이 걷힐 수도 있다. 도덕경 전편에서 자연스러움을 강조하는 흐름을 찾아낸다면 시야는 넓어지고 시선은 높아질 것이다. 노자의 시선이 자연의 무심한 흐름을 관조하는 데 머물렀다면, 주역의 시선은 인간이 그 흐름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로 옮겨갔다.
흐름을 설명하는 음양(陰陽)은 주역의 근본 개념이다. 위편삼절(韋編三絶)은 공자가 주역을 공부한 일화이다. 자신에게 몇 년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주역을 더 깊이 공부하고 싶다는 이야기가 논어에 나온다. 이 시기를 학자들은 50세 전후로 보고 있다고 한다. 지천명을 언급한 공자가 주역의 공부에 아쉬움을 토로했다는 점은 그의 삶이 흐름의 소용돌이에 휘말렸음을 반증한다. 주역은 음(陰)과 양(陽)의 교차로 흐름을 설명한다. 주역의 깊은 뜻을 피상적으로만 이해한 사람의 글이라는 점을 양해 바란다. 일상의 모든 대소사가 해결된다면 주역의 공부에 도전하고 싶다는 상상은 하지만 ‘굳이’라는 생각에 접었다. 내게는 음양의 교차로 흐름을 설명한다는 이해만으로도 만족스럽다. 음양의 교차가 흐름의 단절은 아니라는 소득이 있었다. 주역의 괘를 설명하는 글에는 음양의 교차보다는 강약이 동시에 흐르고 있음을 자주 볼 수 있다. 다만 눈으로 구분할 수 있는 도형(괘)이 제시됨으로써 교차라는 설명이 설득력이 있는 듯하다. 보기에는 완전한 양괘(陽卦)를 설명하면서도 음의 기미가 있다고 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목적은 음양을 함유한 흐름이다. 흐름의 앞뒤가 바뀌고 형태가 달라지면 흐름은 변한다. 주역은 세상의 혼란이라는 역사에 대한 책임을 감내하겠다는 인간 사유의 결과물이다. 이를 통하여 세상을 설명하고 인간의 고통과 혼란을 예방하려는 소망이다. 그러나 흐름을 설명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인간은 그 흐름을 내면에서 체험해야 했다. 장자는 그 내면의 변화를 ‘화(化)’로 읽었다.
흐름의 앞뒤가 바뀌고 형태가 달라지면 흐름은 변한다. 이를 변화라고 한다. 장자는 이를 화(化)라고 하였으나 그의 달라진 흐름은 인간의 내면으로 스며들었다. 장자 저작에 흐르는 내면의 체험은 살아 움직이는 존재의 자아 자각이다. 시공간이라는 흐름에 저항하는 존재의 숙명을 설명하는 상징은 붕(鵬)이다. 붕의 출현을 묘사하는 이야기를 깨닫는 데 50년이 걸렸음에도 미소를 짓는 미욱한 사람도 있다. 그런데 그 절반의 나이에 장자를 읽고 평안을 찾았다는 사람도 있다. 그는 분명히 인간일 것이다. 그러한 사람들은 흐름을 살필 줄 알고 자신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흐름은 중용으로 이어진다. 이제 변화의 중심은 밖에서 안으로 완전히 옮겨왔다. 장자가 내면의 변화를 노래했다면, 중용은 그 변화를 다스리는 평안의 상태를 말했다.
희노애락애오욕의 미발을 중용이라 한다는 설명에서 흐름을 살핀 사람이라면 인간이라 불릴만하다. 본능에 충실하려는 충동을 억제하고 고요를 만나서 평안을 유지하는 태도를 갖추었기 때문이다. 희노애락애오욕은 사람의 천성이다. 타고난 천성의 흐름을 세상과 조화를 이루려는 노력은 쉽지 않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대부분은 과부족의 상태이다. 과하면 관계를 어색하게 하고 부족하면 자신을 해친다. 중용에서 미발은 발현되지 않음이 아니라 흐름을 해치지 않는 상황이다. 감정이 일어나도 어색하거나 자신을 해치지 않도록 제어가 가능한 품성을 갖춘 상태인 것이다. 인간은 이들을 성인, 군자, 성현이라고 더 높여 부른다. 현대의 언어로 표현하면 나답게 사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나는 내삶의 리더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변화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때로는 무심하게 때로는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어쩌면 우리는 변화를 외면, 무시, 제거하려는 무의식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변화의 외면, 무시, 제거를 애썼던 무의식적이었던 그 대가는 가혹(苛酷)할 수 있다. 처참하고 참담하여 쥐구멍이 있음에도 들어가지 못할 수도 있다. 흐름의 이상함이 변화다. 변화는 흐름의 이상함이 아니라, 흐름이 우리에게 말을 거는 순간이다. 변화를 이겨낸 사람들을 인간이라고 한다. 흐름 속에 존재하면서도 흐름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한 사람을 군자라고 한다. 변화의 속도에 미처 따라가지 못하는 현대인에게 군자의 능력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군자를 미리 정해진 인물상이 아니다. 흐름 속에서 자신을 다듬어 가는 존재다. 그 흐름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 그것이 곧 나다움이며 내삶의 리더로 사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