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들은 도는 저녁에는 죽여야 한다.
조문도 석사가의(朝聞道夕死可矣). 공자의 사상이 집약되어 있다고도 할 수 있는 이 표현은 공자의 사상적 흐름에 따라 ‘아침에 도를 들었다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라고 해석해 오고 있다. 아마도 이 해석은 공자가 이 말을 한 후로 변함없는 해석이었을 것이다.
공자의 사상적 흐름에서 질문을 해보자. 이 문장에서 다른 관점으로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글자는 도(道)와 죽음(死)이다. 여기에서 공자가 말하는 도(道)는 무엇이었을까? 2000년 동안 해석해 왔던 도(道)는 합의되어 있다. 아주 바람직하고, 좋고, 착한 것으로 정리되어 있다.
그런데 2000년간 이러한 프레임에 갇힌 도(道)가 공자 당시에는 어떤 의미였고, 현재 우리 시대에는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학창 시절의 학습에서 얻은 이 표현은 머리에 각인되어 세월이 흘렀다. 학습은 지식의 축적과 용도를 강요하면서 활용을 위한 시선은 억제하였다. 특히 학습에서 얻은 지식의 근원을 흔드는 시선을 경계한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나는 이 표현을 혼란 속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조문도석사가의(朝聞道夕死可矣). 여기에서 도대체 도(道)가 뭐일까? 인(仁)의 가치를 인류에게 선물하고 성인으로 추앙받는 사람이 그 도(道)가 뭐였기에 도(道)를 들으면 하루 만에 사람의 목숨을 빼앗아도 가능하다는 모진 말을 했을까? 이러한 의문은 마치 온몸을 불편하게 하는 딸꾹질처럼 서툰 사유를 헤집고 다녔다. 도는 일상의 생각에서 고도의 사상까지 아우르는 사유이다. 도가 천편일률적이라고 하는 것은 그 추구하는 방향이 그렇다는 의미이다. 방향은 같아도 내용이 다를 수 있다는 점에서 나의 의문은 싹텄다.
그래서 2000년간 이어져 온 이 글귀를 나는 다르게 보기로 했다. 사람을 죽이지 말고, 도를 죽이는 걸로 해석한다. ‘아침에 들었던 도는 저녁에는 죽여도 가하다.’ 기존 해석에서 도를 강조하기 위해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는 행위는 인간 본성에 어긋난다. 도를 언급하는 모든 표현에는 인간 본성의 본질이 포함되어 있다. 인간은 생명체와 구분되어 규정되지 않음으로 생명체의 본성은 인간 본성의 근원이다. 자신에게 ‘이로움을 추구하고 해로움을 회피’하는 성향이 생명체의 본성이다. 생명체는 이 본성을 끊임없이 드러냄으로써 생존을 영위한다.
아침에 들은 도는 분명히 자신에게 이롭다. 그러나 죽음은 떠올리는 생각만으로도 자신에게는 해롭다. 해로움을 회피하는 인간 본성을 거스르면서까지 추구할 도는 없다. 아니 없어야 한다. 인간은 이로움의 추구하고 해로움의 회피하면서 삶을 이끌어 간다. 이를 노자는 ‘유무상생’, 주역은 ‘일음일양’으로 설명한다. 아침에 들은 도(道)로 이로움을 추구하려면 자신의 내면에서 숙성시켜야 한다. 일상에서 숙성시킨 도는 ‘채움’이라는 행위가 되지만 어느 시점에 다다르면 올가미가 된다. 이때 해로움을 회피하는 인간 본성이 작용하여 ‘비움’이라는 행위를 요구한다. ‘비움’의 다른 표현은 ‘죽는다’가 아니라 ‘죽인다’이다. 자신의 내면에서 ‘채움’과 ‘비움’이 갈마들 때 인간은 성숙으로 방향을 잡을 수 있게 된다.
공자는 인(仁)에 대한 집착으로 삶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따라서 절대로 사람의 목숨을 그렇게 가벼이 여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이점에 집착할 필요가 있다. 절대 권력의 유지에도 인(仁)을 역설하면서 천하를 떠돌아다닌 사람이 공자였다. 공자는 분명히 도를 죽였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우리는 2000년 동안 인간의 목숨보다는 도를 귀하다고 생각하는 터무니없는 짓을 저질렀다. 그리고 그 도를 위해서 목숨을 버린 사람들을 미화해 왔다. 아침에 들었던 도를 하루 종일 심사숙고하고, 그것을 내면화시켰다면, 다음에 들을 도를 위해서 ‘아침에 들었던 도’는 죽여야 한다. 그래야 내삶의 질과 양을 증가시키는 데 사용할 도를 다시 구할 수 있게 된다. 깊이와 넓이를 만들기 위해서는 파괴적 창조가 필요하다. 아침에 들은 도에 갇혀 있으면 발전, 변화, 운동을 통한 내삶의 질과 양을 늘리는 효율성을 갖지 못하게 된다. 도는 내삶의 전체를 이루는 많은 것들을 포함한다. 하나의 좁은 틀로는 담지 못한다. 여러 가지 내삶을 이루는 도(道)중에서 아침에 들었던 것이 하루 종일 내면화 과정을 거쳐서, 내삶에 완전히 동화되었다면, 아침에 들었던 도는 죽여야 차원이 다르고 높은 또 다른 도를 내면화하여 경지를 달리할 수 있다. 늘 움직이고 변해가는 세상에서 아침에 들은 도는 언제 세워졌는가? 우리에게 전해질 때 그 도가 우리가 전해 듣기 전까지의 그 도라는 것을 누가 보장해 줄 수 있는가? 우리에게 전해지는 동안 도가 변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아침에 들었던 도를 예민하게 내면화하고 그 도를 죽여야 또 다른 도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도는 지키는 것이 아니라, 늘리고 깊이를 더해가면서 변화를 시켜야 한다. 그것이 내삶의 리더로 살아가는 방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