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천명(知天命), 내면의 소리를 듣는 순간
흔들림 너머에서 비로소 ‘나’의 목소리를 감지하는 찰나는 카메라 소리처럼 일순 정적이 흐른다. 사진은 그 순간을 영원히 기록할 것 같지만 기억은 퇴색되고야 만다. 인간이 신에게서 독립하겠다는 선언이 ‘천명’이다. 하늘의 노여움을 두려워한 인간은 하늘을 영원히 기억하겠다는 맹세로 하늘(天)을 남겨두었으나 하늘을 지워나가고 있다. 애초에 인간은 하늘에 대한 애착은 관심 밖이었다. 그들의 관심은 오롯이 자신의 선택과 책임으로 삶을 꾸려보겠다는 의지에 애착을 가졌다. 그러나 인간들의 애착은 오히려 세상의 혼란을 야기한다. 이 혼란으로 의지가 약해진 인간은 다시 하늘에 매달리게 한다.
오래도록 사람들은 ‘천명’을 외부에 있는 힘으로 이해해 왔다. 부모가 기대하는 삶, 사회가 요구하는 기준, 꿈이 된 직업, 성취해야 할 희망, 규범, 타인의 평가 등. 이 모든 것이 한때 우리의 ‘하늘’이었고, 그 하늘로부터 내려온 명령을 따르는 것이 인간의 의무라고 믿었다. 그러나 공자가 살던 시대에도, 지금 우리 시대에도, 그런 외부 기준은 한 번도 완전히 사라진 적이 없다. 그것들은 모습을 바꾸면서 집요하게 살아남아 사람들의 내면을 장악하고, 흔히 삶의 중심을 대신하기도 한다. 그래서 인간이란 존재는 늘 혼미한 세상에서 산다. 겉모습은 화려하고 분명하게 보이지만 근본과 본질은 언제나 조용하고 눈에 띄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늘 무늬만 쥐려고 하다 어느 순간 스스로를 잃어버리곤 한다.
공자는 그 흐름을 통찰했다. 그래서 그는 천명을 외부가 아니라 인간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자각으로 재해석했다. 그러나 이 관점은 당시에도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지금도 여전히 대부분의 사람에게 낯설다. 그렇기에 공자의 생각을 따라가 보려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나타난다. 과거의 사람들은 경험을 남겼다. 현재의 우리는 과거의 경험을 해석하고 해설한다. 미래의 사람들은 이 흐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사실, 우리가 삶에서 느끼는 갈증과 의문은, 사실 고대인들이 겪었던 것과 본질이 다르지 않다. 많은 이들이 오래전부터 품어온 의문이 있다. ‘이미 십 대부터 배우고, 삼십에 뜻을 세웠는데, 그렇다면 이십 년 가까이 공부한 사람이라면 천명을 알 수 있지 않는가? 왜 불혹이 지천명보다 먼저 오는가?’ 학습으로 점철된 내가 젊었을 때 의아하게 생각했던 지점이다.
그동안의 논의는 주로 사회적 성공의 관점, 도덕주의적 관점에서 해석되어 왔다. 그러나 그 틀을 벗어나 내면의 작용을 기준으로 보면 해답이 또렷해진다. 불혹(不惑)이란 외부의 말, 평가, 규범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즉, 내면에 중심이 서기 시작하는 시기이다. 그 중심이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는 어떤 진리도, 어떤 깨달음도 들리지 않는다. 천명은 ‘하늘의 소리’가 아니라 ‘내면의 가장 깊은 울음’인데, 마음이 흔들려 있으면 그 울음은 들리지 않는다. 따라서 불혹은 지천명으로 가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마음의 표면이 잔잔해야 비로소 깊은 바닥이 드러나듯이. 지천명은 바로 그 바닥을 들여다보는 순간이고 공자는 오십에 그것을 경험했다고 하였다.
지천명은 ‘외부의 명령을 아는 나이’가 아니다. 대부분 사람은 지천명을 ‘하늘의 뜻을 아는 나이’라고 배웠다. 그러나 공자는 단 한 번도 천명을 정치적으로, 혹은 운명론적으로 강조한 적이 없다. 그가 말한 천명은 인간의 내면에서 움트는 깨달음, 내가 왜 이처럼 반응하고, 왜 이처럼 회피하며,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사랑하는지의 내면의 목소리에 대한 자각에 가깝다. 외부의 기준은 아무리 분명해도, 그것은 ‘남의 기준’ 일뿐이다. 그 남의 기준을 아무리 잘 수행해도, 그것은 내삶의 의미와는 별개로 흘러가 버린다. 지천명의 자각은 이를 정반대로 뒤집는다.
“왜 나는 이 말에 상처를 받는가?” “왜 나는 이 상황에서 분노가 치미는가?” “이 감정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이제 나는 무엇을 추구하고 싶은가?”
지천명은 외부로 향해 있던 질문의 방향을 조용히 내면으로 되돌리는 전환의 순간이다. 나는 불혹과 지천명을 지나 지금의 나이에 와서 귀에 거슬리는 소리에 쉽게 반응하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하나 여전히 쉽지 않다. 그러나 확연하게 정리된 생각은 이 모든 것이 어디론가 흘러가는 자연스러운 모습이라는 것이다. 공자는 이를 지천명(知天命)이라는 단어로 포착한 것이다. 천명을 안다는 것은 신비로운 계시가 아니라 내 반응의 근원, 내 내면의 연쇄를 이해하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공자의 자각은 ‘내면을 향한 철학적 감각’을 열어놓았다. 그러나 그 시대의 사람들은 아직 그 언어를 온전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공자의 말은 정치적 충언이 아니라 인간학적 사유였기에 권력자들에게는 ‘쓸모없는 말’처럼 들렸을 가능성이 크다. 수백 년이 흐른 뒤, 맹자가 공자를 심화시킬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히 시대가 달라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혹독한 전란 속에서 사람들은 외부 기준보다 ‘내 마음이 어디로 향하려 하는가?’라는 내적 문제에 눈뜨지 않을 수 없었다. 고통과 붕괴는 인간을 내면으로 밀어 넣는다. 맹자는 바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는 공자의 언어를 다시 펼쳐 인간의 마음 그 자체—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을 중심축으로 삼았다. 공자가 내면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면, 맹자는 그 문 안으로 들어가 구조를 밝힌 셈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공자보다 맹자에게 더 가까이 느껴지는 이유일 것이다. 삶의 외부를 오래 바라보다 이제는 내면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지점에 왔다는 것. 그것이 바로 성찰의 조건이며, 지천명이 열리는 자격이다. 이는 나이와는 무관하다고 확신한다.
누군가가 말했다. “왜 조선의 공자는 없고 공자의 조선이 있는가?” 이 말을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연결된다. ‘어째서 맹자는 맹자가 되었고, 나는 왜 나인가? 내가 불혹에서 흔들리지 않으려는 고집 때문인가?’ 이 질문은 사실 지천명으로 들어가는 사람만이 던질 수 있는 수준의 질문이다. 남의 기준을 따라 살던 사람은 절대 이런 질문을 하지 않는다. 외부 기준 아래에서는 ‘나’라는 존재가 문제 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왜 나인가?’라는 물음은 이미 우리의 중심이 외부에서 내부로 옮겨갔다는 증거다. 지천명은 ‘내가 누구인가?’를 알게 되는 나이가 아니라 ‘나는 왜 이렇게 반응해 왔는가?’를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다. 이 이해가 쌓일 때 비로소 ‘나’라는 존재는 허상이 아니라 실체를 가진다. 흔들리는 감정 뒤에서, 억눌린 기억 뒤에서, 타인의 기대 뒤에서, 조용히 그러나 끈질기게 발아하던 어떤 하나의 목소리가 드러난다. 그건 아주 미세한 속삭임에 가깝다. 그러나 일단 들리기 시작하면 평생 잊히지 않는 어떤 음색을 가진다. 그 음색이 바로 ‘나’이다.
그래서 공자는 십대의 학(學)과 뜻을 세운 삼십대를 지나 흔들린 40대를 불혹으로 정돈하고 나서 ‘내면의 조용한 바닥’을 드러내는 나이로 지천명을 제시했다. 겉으로는 나이가 들었지만
내면은 여전히 젊을 수 있다. 혹은 그 반대일 수도 있다. 나이가 마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성찰이 마음을 가르친다. 그렇기에 지천명은 특정한 나이가 아니라 특정한 깊이이다. 지천명은 결국 이런 자기 고백에 가까운 순간을 의미한다. ‘외부의 기준은 이제 내 삶을 움직이는 힘이 아니다. 나는 그 기준들에 반응하는 내 마음의 기원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내 삶은 더 이상 타인의 것이 아니라, 나의 것이 되기 시작했다.’
이 깨달음이 오면 삶의 소리가 조금씩 달라진다. 귀에 거슬리던 소리도 감정을 건드리던 말도 이제는 나를 흔들기보다 나를 드러내는 거울이 된다. 지천명은 세상이 변한 것이 아니라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깊이가 변한 것이다.
나는 흔들렸던 마흔을 지나 이제야 불혹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직도 흔들리지 않으려는 마음과 여전히 흔들리는 현실 사이에서 묘한 이중성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이 흔들림이야말로 성찰이 가능한 사람만이 경험하는 고유한 진통이라고 믿는다. 무늬에 흔들리지 않고 근본을 보려고 애쓰는 움직임을 예민하게 살핀다. 여전히 사람으로 태어나 인간으로 살고자 했던 사람들이 지나간 관문을 기웃거릴 뿐이기는 하지만 문 앞에 다다르기는 했다고 위로한다.
지천명적 성찰은 조용하게 시작된다.
외부의 소란이 크게 들릴수록 내부의 침묵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이 있다. 내부의 침묵이란 ‘이로움을 추구하고 해로움을 피하려는 본성이 마구 날뛰지 않도록 자신의 천성으로 한 박자 쉬어간다는 의미이다. 앞차가 끼어들면 경적을 울리거나 가속페달을 밟기보다는 브레이크페달에 올린 발끝의 감각을 살피는 것이다. 잠시 빨리 가려는 마음과 조그만 틈도 허용하지 않으려는 옹색한 태도가 천성의 고요함을 흩어지게 한다. 침묵은 자신의 내면에 건네는 대화이다.
감정이 요동칠수록 그것이 내 천성의 목소리가 아니라 오랜 학습된 반응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순간이 있다. 십대에는 학습으로 지식을 채운다. 청년 시절부터 이 지식을 바탕으로 오랫동안 채움과 비움이라는 자신만의 학습은 지속된다. 이때 쌓인 선입견과 고정 관념은 자신의 천성과는 다른 반응을 유도하기도 한다. 직업을 선택하고 거기에 따른 책임과 의무를 위해서 나의 목소리는 감춰 두기도 한다. 외부의 책임과 의무가 자신의 감춰 둔 목소리를 지배하게 되면 감정은 요동친다. 자신의 감춰 둔 목소리는 여리고 약해서 무참한 희생을 강요받는다. 이 목소리가 용기를 낼 때 예민하게 반응하는 순간이 지천명이다.
타인의 평가가 여전히 신경 쓰이지만 그 평가가 나의 가치를 결정하지는 않는다고 조심스럽게 믿어 보기 시작하는 순간이 있다. 자축 환갑 잔치에 나타난 친구의 값비싼 자동차나 넓은 평수의 아파트와 명품이라는 소유물들이 부럽지 않을 수는 없다. 그에 비해 타인에게 아쉬운 사정은 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경제력은 초라하게 평가될 것이다. 그러나 부럽기는 해도 얽매이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찾아가는 삶의 흐름에 들어선 사람들이다.
이러한 순간들이 모여 문장이 된다. 그 문장들이 모여 한 사람의 생이 된다. 지천명은 ‘삶의 정답’을 아는 나이가 아니라 ‘나의 생을 쓰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이 순간은 나이로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지천명은 흔히 ‘오십이 되어 시야가 넓어지는 나이’쯤으로 해석된다. 나는 다르게 해석했다. 이 해석은 나의 관점과 체험이기에 어쩌면 어떤 이들에게는 불편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름속에서 기존 해석보다는 훨씬 더 근원적이고 친절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우리는 외부 기준의 시절을 지나, 불혹의 고집을 거쳐 비로소 내면의 바닥을 들여다보는 순간을 대략 쉰 살 즈음에 맞게 된다. 현대인에게 지천명은 경력이나 성취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다. 그리고 각자가 지금껏 걸어온 길, 그 길 위에서 쌓아온 사유, 내면을 향해 집요하게 질문하는 태도를 견지하다 보면, 우리는 지천명의 문턱을 기웃거리지 않고 그 문 안쪽을 천천히 걸어가고 있는 인간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