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성어 이야기

역린과 괄목상대, 그리고 ‘나’ 다움의 흐름

by 김기황

‘나’ 다움이라는 대화에 매번 등장하는 MBTI는 정지된 목적지가 된 듯하다. 분명히 그것은 발견되어 고정되는 본질이 아니라고 개발한 사람들이 경고하고 있다. 이 검사는 검사할 때마다 미묘한 차이가 나타난다. 그러니 ‘나’ 다움은 매 순간 흔들림, 채움과 비움으로 생성되는 상태에 가깝다. 진정한 '나다움'은 바로 이 흐름 그 자체를 유지할 수 있는 능력에서 나온다.

변화를 생각할 때 나는 종종 메마른 땅에 흘러드는 물길을 떠 올린다. 생기를 잃어버린 땅은 더 이상 갈라지지 못할 만큼 이미 결핍의 극한을 견디고 있다. 그곳에 물을 대려면 사람은 도랑을 파야 한다. 물길은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손길, 즉 의지와 행위가 있어야만 열린다. 이 도랑을 파는 행위가 바로 변화의 준비다.

물이 땅을 흘러가는 모양을 지켜보면 단순히 앞으로만 흐르지 않는다. 흐름 속에는 머무름과 나아감, 채움과 비움이 들어있다. 물은 머무르면서 채우고 나아가면서 비우는 형태가 반복되면서 흘러간다. 얼핏 멈춤 없이 나아가는 듯하지만 내부의 운동은 끊임없이 흔들린다. 그 내부의 복잡한 순환이 바로 흐름의 본질이다.

인류가 역설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낸 것도 이 흐름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함이 아닐까? 단선적, 직진적 변화는 인간의 삶에서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중요한 변화일수록 역설적 구조를 품고 있다. 채우기 위해서는 비워야 하고, 전진하기 위해서는 물러서야 하며, 더 단단해지기 위해서는 한 번 흔들려야 한다. 역설은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라,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의 이름이다. 위대한 사상에는 이 방식을 이해하려는 노력 들로 점철되어 있다.

역린은 오래전부터 절대 권력의 금기를 뜻하는 말로 회자되 왔다. 용의 목 아래 뒤집힌 비늘 한 조각, 건드리면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는 그 한 조각. 이제까지 해석은 대부분 외부의 금기, 곧 타인의 권위를 지칭하는 방향으로 흘러왔다. 그러나 나는 이 개념을 외부에서 내부로 가져오고자 한다. 진짜 역린은 타인의 비늘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비늘이다. 내 안에는 내가 건드리기 싫어하는 지점이 있다. 오랫동안 회피해 온 상처일 수도 있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진실일 수도 있고, 삶의 방식 전체를 바꾸게 될 두려움의 핵심일 수도 있다. 인간이 스스로 역린을 건드리는 일은 타인의 역린을 건드리는 것보다 훨씬 더 무섭다. 왜냐하면 그 변화는 관계의 변화가 아니라 존재 전체의 이동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두려움은 변화의 단초다.
내 삶을 진정으로 바꾸는 변화는 대부분 내 역린에 닿았을 때 일어난다. 자신의 가장 깊은 곳을 흔드는 질문, 오래된 패턴이 무너지는 순간, 세계를 보던 관점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경험. 변화는 원래 극적이다. 파동처럼 번져 나가며 삶의 배치를 다시 생각하고 짜게 된다. 그래서 나는 말하고 싶다. 나다움의 시작은 내 안의 역린을 건드는 데서 출발한다. 그 비늘을 직면하는 사람만이 진실한 변화를 맞이할 수 있다. 하지만 변화라는 파동은 지속되지 않으면 흐름이 되지 못한다. 이 폭발적 변화를 일상으로 번역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괄목상대를 흔히 남이 달라진 것을 보고 놀라다는 뉘앙스로 이해한다. 그러나 괄목상대의 원래 뜻은 ‘눈을 비비고 다시 보다’이다. 이 말은 변화의 지속성을 설명하는 데 매우 요긴하다. 역린이 변화의 첫 폭발이라면, 괄목상대는 그 폭발이 일상에서 어떻게 흐름으로 자리 잡는지를 보여주는 태도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이 괄목상대를 타인이 아닌 나에게 적용해야만 한다. 나는 달라지고 있는 나를 눈을 비비고 다시 바라보아야 한다. 이것이 변화를 지속시키는 유일한 방식이다.

극적 변화는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그러나 미세한 변화는 매일의 패턴을 바꾸며, 그 작은 바뀜들이 모여 깊은 변화를 이룬다. 아침에 드는 생각이 달라지고, 어떤 말에 더 오래 머무르게 되고, 눈길이 향하는 대상이 바뀌고, 내가 불편해하던 무언가를 더 이상 피하지 않게 되고,
마음이 쓸려가는 방향이 이전과 다르게 느껴질 때 그 작은 변화의 결을 포착할 수 있는 사람만이 나다움을 조금씩 굳혀 간다. 그것이 바로 괄목상대의 현대적 의미다.

도랑에 물이 흘러 들어오면 물길은 앞으로 나아가지만 내부의 움직임은 채움과 비움의 반복이다. 이 순환이 없으면 흐름은 단번에 고여버린다. 인간의 성장과 변화도 동일하다. 곧아 보이지만 내부는 흔들리고, 전진하는 듯하지만 내부에서는 다시 시작하고, 변화한 것 같지만 다시 비워내야 하고, 비워냈다고 생각하면 어느새 새롭게 채워진다. 이 반복 속에서 나다움은 고정된 형태가 아니라, 움직임 그 자체가 된다. 나다움은 어떤 본질의 발견이라기보다 흐름을 유지할 수 있는 존재의 능력에 가깝다. 따라서 나다움을 찾는다는 것은 삶을 일직선적으로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운동이 만들어내는 리듬을 이해하는 일이다. 내면의 역린은 변화를 촉발시키고, 괄목상대는 그 변화를 일상에서 확인하게 해 주며, 채움과 비움의 반복은 그 변화를 흐름으로 지속시킨다. 이 흐름의 관점이 완성되는 순간, 우리는 자연스럽게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이어질 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역사를 거시사를 중심으로 학습해 왔다. 하지만 거시사는 외부 시선으로 정리된 평가의 구조다. 왕조의 교체, 전쟁, 제도, 사건—이런 틀은 삶의 촘촘한 결을 설명해 주지 못한다. 거시사는 강물의 표면만을 기록한다. 그 표면 아래에서 물이 어떤 방식으로 흔들렸는지는 설명하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사유를 채우기 위해서는 미시사를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미시사는 한 개인의 흔적, 작은 마을의 문화, 사소한 기록, 생활의 변화에 집중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의 실제 삶을 엿보게 된다. 미시사는 역사학이 아니라, 자기 사유의 확장 방편이다. 거시사가 외부의 평가를 따라가는 지식이라면, 미시사는 내면의 감각을 따라가는 지혜다.

어떤 변화든 미시적인 단위에서 시작한다. 어떤 흐름이든 작은 흔들림의 반복으로 이루어진다. 어떤 나다움이든 개인적 경험의 결을 통해 형성된다. 그래서 미시사는 바로 ‘나다움의 역사학’이다. 세계가 어떻게 변하는지보다 내 삶이 어떻게 움직여왔는지를 더 정밀하게 알려주는 기록 방식이다. 많은 사람들이 첨단 기술이라는 수단으로 자신의 일상을 기록하는 이유도 이런 이유일 것이다.

사람들이 명확하게 표현을 하지는 않지만 ‘나다움’이라는 주제를 안고 살아간다. 이 주제는 몇 개의 문장으로 정리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끈을 놓지 않는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지속되는 물음이 들어 있다. ‘나다움은 어떻게 유지되고 자라나는가?’

나다움은 한순간의 개념이 아니라, 흐름의 생명력 그 자체이다. 도랑을 파듯 변화의 길을 내고, 역린을 직면하며 한 번 뒤흔들리고, 괄목상대로 매일의 작은 변화들을 바라보고, 미시사의 시선으로 나를 구성해 온 시간의 결을 이해할 때 그제야 우리는 비로소 말할 수 있다. 나는 내가 흐르는 방향으로 살고 있다. 이것이 나다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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