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륜(天倫): 서로가 인식해야 할 책임의 무게
사회성 곤충들에 대한 풍부한 연구자료와 분석에 따르면 생물학적으로 부모와 자식은 서로가 우위를 가지는 게 없다고 한다. 그래서 효가 일방적으로 자식에게 강요되는 듯한 현실은 왠지 석연찮은 뭔가 감춰진 의도가 있어 보인다. 서로가 존재를 인정하는 전제에서라면 부모가 자식을 양육하는 것, 자식이 부모를 봉양하는 두 행위의 무게는 같지 않을까? 부모의 입장과 자식의 입장을 떠나서 서로를 독립된 자연인으로 생각한다면 양육과 봉양의 무게는 같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천륜은 자연이 만들어낸 도그마다. 도그마는 인류가 만들고 인류가 악용하여 인류를 희생시키고 있기도 하다. 동양의 도그마로는 천륜이 있다. 천륜은 인륜을 만들고 인륜은 천륜을 만들어낸다. 천륜과 인륜. 그 사이에 효가 끼워 넣어졌다. 크릭의 도그마가 천륜의 비밀을 알아냈으나 그 도그마에도 예외가 있었다는 것을 과학이 밝혀내고 있다. 천륜이라는 도그마로부터 효라는 도그마가 파생되었을 것이다. 크릭의 도그마도 예외가 있음이 밝혀지고 있다. 천륜이 파생시킨 효라는 도그마에도 예외는 있을 터이다. 효가 예외가 없는 도그마처럼 그 끈질긴 생명을 부지하고 있는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이제 효라는 도그마를 다시 살펴보아야 할 것 같다. 효는 천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는 부모에게 자식이 짊어진 천륜의 책임을 드러내는 행위이다. 부모는 천륜을 만들고 유지하는 책임이 있고 자식은 천륜의 혜택을 입고 유지하는 책임이 있다. 또한 자식은 또 다른 천륜을 만들고 유지해야 하는 책임이 있다.
전제군주에게 효라는 통치 수단이 필요했던 시대는 박물관에 박제된 지 오래다. 인간세계의 질서와 국가의 체제가 완전히 변한 현대에서도 효를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는 중요해 보인다. 특히 젊은 세대의 부모에게 의존하는 경향이 심화(深化)되는 사회에서는 새로운 논의가 필요해 보인다. 그러하더라도 효의 가치가 무용지물이 되는 인간세계는 절대로 도래하지 않을 것이다. 효의 가치가 인간세계의 질서를 유지하는 중요한 버팀목임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효에 대한 관습을 거슬러 올라가면 효가 목적에 의해 개발되었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특히 유교에서 부모에 대한 자식의 효를 군주와 국가를 위한 충(忠)으로 연결한 것은 더더욱 이런 느낌을 준다. 이들의 효에 관한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논하는 대목은 자연스럽지 않다. 이들은 효의 근본이 인애(仁愛)라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이라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인애는 인간 본연의 감정보다는 조건에 따른 감정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부모가 자신을 보살펴 주고 있다는 느낌을 자식이 느꼈을 때 자식에게 인애(仁愛)의 감정이 생긴다. 그렇지 않다면 부모의 슬하에 머무를 자식이 얼마나 되겠는가? 또한 부모의 보살핌에 고마움을 드러내지 않는 자식이라면 슬하에 자식을 거둘 부모가 몇이나 되겠는가? 인애는 상호작용의 산물이지 결코 인간 본성은 아닌 것으로 보아야 한다. 부모가 거둬야 함에도 그렇지 아니하고 자식이 감사해야 함에도 그렇지 아니하여 생겨나는 갈등이 보이지 않는 살얼음처럼 사회에 끼어 있다.
효를 왜 발명하였을까? 좌전에서 계량은 백성을 이롭게 하려고 하는 것을 충이라 하였다.(所謂道 忠於民....上思利民 忠也) 左傳桓公 6年) 좌전 에서 초장왕은 백성이 군주를 돕는 것을 충이라 했다.(民皆盡忠 以死君命 左傳 宣公 12年) 이때까지만 해도 효의 개념은 발명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중국의 종법 제도가 확실한 실권을 확보하고 조상에 대한 제사 중에서도 시조를 모실 때의 상황을 효라고 했는지 충이라고 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효의 개념과는 많은 차이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시조(始祖)에 대한 제사가 부모에 대한 제사보다도 우선했다는 것은, 오늘날의 부모와 자식을 중심으로 하는 효와는 다른 줄기의 효라고 생각된다. 그러다가 사회가 혼란하고 복잡해지면서 혼재되어 있는 효의 개념에서 시조에 대한 제사는 충으로 분리되고 부모에 대한 제사는 효라는 개념으로 정착된 것으로 생각한다. 이렇게 분리된 충효의 개념은 상호보완적으로 강화되어 왔을 것이다. 효만을 새롭게 정리하여 분리하기보다는 충을 보완하면서 발전해 왔을 것으로 본다.
효(孝)가 충(忠)에서 분리되면 통치의 강도는 약화가 될 수 있다. 충(忠)을 노자는 백성을 이롭게 하려고 하는 것이라 하고 공자는 백성이 군주를 돕는 것이라 했다. 충의 개념이 모든 백성을 이롭게 한다는 것과 백성이 군주를 돕는다는 논리는 백성을 통치 권력과 직접 연결하는 이점이 있다. 그런데 효는 부모 자식의 친화력에 중심을 두는 논리이므로 백성과 통치 권력을 이어주는 고리에 타격을 줄 수 있다. 효에서는 군주나 통치집단보다는 부모에게 ‘이로움’과 ‘도움’의 중심점이 이동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효가 빠짐으로써 느슨해지는 통치체제의 약점을 통치집단이 놓칠 리 없다. 온 백성과 군주의 연결을 강화하는 새로운 연결고리가 필요해졌다. 그리고 그 연결고리에는 효를 확대하면 충이 된다는 논리가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효와 충의 개념을 충분히 녹여내면서 통치체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지 않아야 했다. 그래서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통치체제를 단계적으로 주입하는 논리를 개발한다. 지금은 이 논리가 개인의 역량을 발전시키는 뜻이지만 당시의 신분제 사회에서 이러한 단계적 역량의 실현은 불가능했다. 따라서 개인의 신분에서 도달할 수 있는 역량의 한계는 분명했다. 각 계급의 신분에서는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라는 한계가 있었다. 이것도 평민에게는 해당이 없었다. 이러한 논리가 어떻게 효로 연결될 수 있었던 것일까? 수신이 한계로 설정된 계급에서 치국을 담당하는 관리가 되었다는 것은 치국의 역량을 실현할 수 있는 신분을 얻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쁜 업적을 낳아주고 길러준 부모의 은덕으로 연결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에서 신분을 지키고 사회의 질서를 어지럽게 하지 말라는 감춰진 의도가 분명하게 응축된 단어는 ‘평천하’이다. 개인이 이러한 역량을 보이게 되면 그것은 부모 자식이 중심인 효의 문제를 넘어서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효는 치국의 단계까지만 효력을 발휘한다. 평천하의 역량을 발휘한 사람은 전제군주라는 의미가 된다. 순임금이 자신의 아버지가 잘못을 저질렀다고 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맹자는 임금의 자리를 버릴 것이라고 애매한 대답을 한다. 이러한 질문과 대답으로 효는 예외가 생긴다. 인류의 역사에서 개인이 절대 군주의 자리까지 오른 사람은 몇이 없다. 그들의 공통점은 사회가 매우 혼란한 시기에 그러한 업적을 이루어 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평천하’라는 단어에는 통치집단의 매서운 으름장이 포함되어 있다. 부모가 잘못해도 원망하지 말고 잘 모셔야 하듯이 군주가 잘못해도 충을 잊지 말라는 엄포다. 신분제의 옹호가 효로 변화된 것은 난을 일으키지 말라는 협박일 뿐이다.
공자를 따르면서 모든 것을 걸었던 제자들이 별다른 성과도 없이 스승이 죽고 나서 할 수 있는 일은 한정적이었을 것이다. 가장 시급한 문제는 자신들의 경제적 기반을 다시 다지는 일일 것이다. 그들은 당시 사회의 변화를 몸으로 부딪친 지식인들이었다. 당시 사회의 흐름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을 그들이 효의 가치가 부각되어 가고 있음을 몰랐을 리 없다. 공자가 효에 대해서 얼마나 자주 어느 정도의 깊이로 언급했는지는 개인적으로 연구하지 못했다. 그러나 효에 관한 오늘날의 연구에서 등장하는 공자의 이야기는 애매한 것 같다. 부모의 잘못을 자식이 숨겨주는 것이 인정상 더 바람직하다고 한 말이 왜 효로 둔갑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공자의 제자들이 폭넓게 효를 해설한 것은 이해가 간다. 논어는 직접적인 공자의 말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편집한 기록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백번 양보하여 공자가 ‘부모를 섬기되 잘못이 있으면 조심스럽게 간언해야 하고 부모가 따르지 않더라도 더욱 공경하고 어기지 않으며 수고로워도 원망하지 않아야 한다.’(논어, 이인)는 말을 오늘날에도 적용한다고 하자. 이런 정도의 일이 있고 이러지 못할 일이 있다. 이러한 사고는 그 당시 사회적 여건에 따른다면 가능했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거처를 분리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용이한 현대에도 이런 논리를 적용하는 것이 가능할까? 거처를 분리해서 거주하는 것이 공경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일까? 이 논리라면 모든 자식들은 부처로 태어나야 할 것 같다. 부처는 태어나자마자 일곱 걸음을 걷고 선 그 유명한 말을 했다고 했다. 부모는 끝없이 자식의 마음을 후려 파고 자식은 끝없이 불경을 외는 이 광경이 자연스러운가? 패륜의 부모에게 왜 자꾸 효를 강조하였는지 도저히 이해를 할 수가 없다.
맹자는 부모에게 선을 간하는 일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불책선(不責善)을 주장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사전 조건이 있다. 부모 자식이 이미 화목한 데 선을 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부자유친이 될 수 있는 것은 자식이 그릇된 길로 가지 않도록 자식을 바꾸어 교육했기 때문이다. 천륜으로 드러난 자식이 어떤 의미의 존재인가를 깊이 생각하고 자식을 독립된 존재로 인식하고 부모가 자식을 바꾸어 교육할 정도의 인식을 가진 부모라면 천륜의 무게와 책임을 스스로 감내하는 인품이다. 이러한 부자 관계라면 효의 개념을 달리 교육할 필요가 있을까? 자식은 부모의 행실을 따르면 될 것이다. ‘부모와 자식이 서로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은 좋지 않다. 그러므로 옛날에는 서로 자식을 바꾸어 가르쳤다. 부자간에는 선을 행하라고 질책해서는 안된다. 부자간에 선을 행하라고 질책하게 되면 사이가 멀어지게 되는데 부자간에 사이가 멀어지는 것보다 나쁜 것은 없다’. (맹자 이루(離婁)상(上)) 맹자의 이 편(篇)에서 맨 처음 나온 글자가‘이루(離婁)’라는 글자라서 편명(篇名)이 된 ‘이루’는 중국 고대의 눈이 아주 밝은 사람이라고 하는데 백 보 밖에서도 털 오라기를 보았다고 한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자세히 밝힌 글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이야기는 오늘날 부모 자식의 불화의 원인을 정리해 두었다. 이미 이런 정도의 의식을 가진 부모는 자식에게 간함을 당할 일이 없다. 이런 부모 밑의 자식들은 패륜을 저지르지도 않을 것이다. 간언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논리다.
효의 시작은 자식에게서 시작된다는 생각이 우세한 듯하다. 이는 어쩌면 을의 입장에서 전개된 사유인 듯하기도 하다. 부모의 잘못을 자식이 덮어두려는 것이 인간의 마음인 것은 맞지만 그 행위가 떳떳하거나 바람직하다고 우겨서는 곤란하다. 인간의 자연스러운 마음은 부모 자식 관계에서 당연히 부모에게서 시작되어야 한다. 부모가 늘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을 하는데 자식이 바람직한 행동을 할 수는 절대로 없다. 늘 잘못을 저지르는 부모 밑에서 부모의 잘못을 고발하는 자식은 나올 수 없다. 자식은 부모의 행위가 잘못인 줄도 모를 것이다. 그런 부모의 잘못을 고발하는 자식이 있다면 이미 부모에게서 심리적 독립을 한 자식이다. 그에게 천륜은 끊어진 지 오래전일 것이다. 부모의 잘못은 효의 대상이 되고 자식의 바른 마음은 효의 대상이 되지 않는 이상한 논리가 효라는 발명품에 들어있다. 이 이상한 점을 피해 가기 위해서 경(敬)의 개념을 추가한다. 공경하는 마음이 있다면 부모가 잘못을 해도 고발하지 않을 것이라는 논리다. 맹자는 이 논리를 원천 봉쇄한다. 애초에 자식이 부모를 공경하는 마음과 태도를 가지도록 천륜에 대한 책임을 유지하고 있는 부모라면 잘못을 저지르지도 않을 것이며 설사 그러한 잘못을 저질렀다고 해도 자식이 간곡히 간언(諫言)을 한다면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서 노력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자식은 없을 것이다. 당시 효를 사회 질서로 정착시키기 위한 논리는 부모의 잘못이 아니라 군주의 잘못이었다. 군주가 생사여탈의 독재를 하더라도 그 말을 듣지 않더라도 그로 인해 벌을 받더라도 군주를 원망하지 말라는 논리를 군주가 대놓고 주장한다면 유학의 근본이 무너진다. 덕의 정치에서 덕이 빠졌다면 들을 이야기는 없다. 부모의 잘못을 숨겨주는 마음을 쓰는 자식의 태도도 있고 고발하는 마음으로 기우는 자식의 태도도 있다. 모두 인정상으로는 바람직한 것들이다. 왜냐하면 숨겨준 부모의 잘못은 언젠가는 나에게로 칼끝을 겨눌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원망해서는 안된다는 이 논리가 아직도 자식의 삶을 피폐하게 하는 경우를 주위에서 보게 된다.
천륜은 새로운 인륜을 만들도록 해서 그 인륜이 다시 천륜을 만들도록 할 책임이 있다. 이렇게 천륜과 인륜이 끝없이 이어지는 흐름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 책임을 회피하려는 비겁함에 효라는 비단옷을 입히지는 말자. 무명옷도 아깝다. 천(天)이라는 글자를 입에 담기 위해서는 그 무게를 감내하려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말을 찾아야 한다.
실수이든 아니든 아버지가 사람을 죽였는데 그것을 눈감아 주는 것을 효라고 하는 것은 억지이다. 마찬가지로 자식이 잘못을 저지르는데 부모가 눈감아 주는 것을 양육이라고 하는 것도 억지이다. 이러한 경우가 흔하지 않다고 이야기하면서 효를 이야기한다면 이제까지의 효에 대한 논리들을 다시 들춰봐야 한다. 효는 보편적으로 개인에게 강요할 수 있는 윤리나 도덕이 아니다. 자식이 가능한 한도(限度)에서 부모를 모시는 것이라는 소박한 결론을 낼 수 없었던 것은 전제군주의 폭정을 참고 견디라는 묵시록인 동시에 그것을 견제하는 백성의 저항이었다. 개인의 행위의 책임은 개인에게 돌아가야 하는 것이 마땅한 이치이다. 부모가 어렵게 산다면 여력이 되는 자식이 돌봐주는 소박한 논리가 자연스러운 것이다. 자식도 어려운데 부모가 도움을 요구한다면 자식의 삶은 더 많은 어려움에 봉착하고 말 것이다. 부모의 노릇을 단지 천륜을 만든 것으로 다했다고 하는 태도에 공분하는 일들이 심심치 않게 드러나고 있다. 모든 이가 공분하는 이러한 사안들이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는 상황을 법이 그렇다고 말하는 저의는 무엇일까? 아무리 양보한다고 해도 이것은 전제군주의 폭정이 모습을 바꾼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즉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세대 간의 갈등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부모의 잘못을 드러내고 차라리 감옥살이를 뒷바라지하는 것을 효라고 하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이것도 자식에게는 가혹하다. 자식의 삶은 피폐해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자식에게 효를 강요한다면 그는 부모의 자격이 없다. 그럼에도 부모는 부모라고 우격다짐을 해야 하는 시대는 아니다. 그럼에도 효를 군주에게 충으로 연결시킨 유학에서는 역성혁명은 가능하다고 한 것인가? 이는 친족이 아니라서 그럴까? 그러면 굳이 효를 군주에 대한 충으로 연결시킬 필요가 없지 않은가? 맹자는 백성을 괴롭힌 왕을 왕으로 보지 않았다. 부모가 천륜을 팽개쳤는데도 부모라고 불러야 하는가? 이것을 용인하고 있는 우리의 법체계는 무엇을 노리고 있는가?
효가 한세대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긴 세대를 이어가야 한다면 누군가는 이어야 한다. 그런데 과거의 잘못을 효라는 틀에 가두어 끌고 갈 필요가 있는가? 부모의 잘못은 부모에게 남겨두고 자식에게는 자식의 도리를 요구하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이다. 자식의 도리가 부모의 잘못이나 무리한 요구도 수용해야 한다는 억지는 그만하자.
오늘날 우리의 부모 자식 간의 불화의 원인은 부모가 자신의 삶을 자식을 위해서 살았다는 수준 낮은 생각, 부모가 자신의 가치를 자식의 삶의 기준으로 제시하고 강요할 때, 부모가 자신의 욕망을 자식이 희생으로 채우고자 할 때, 부모가 자신의 경제적 성공을 자식을 통제하는 올가미로 사용할 때 등이다. 그래서 항간에서 ‘내가 널 어떻게 길렀는 데, 자식은 고생하지 말라고 유학 보냈다’와 같은 말을 자주 듣는다. 부모의 욕망으로 길러진 것이나 유학 생활의 시작이 이미 고생길이다.
천륜에 대한 건강하고 건전한 생각은 어떤 것인가?
인간의 관심이 향하는 곳에는 인간을 위한 무엇인가를 얻기 위한 시선이 머문다. 반포지효. 인간을 위한 유익한 것을 찾아내려는 시선이 까마귀에게 머물렀다. 까마귀는 둥지를 짓지 않는 동물이다. 그래서 관찰에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까마귀가 먹이를 물어다 주는 것을 관찰하면서 새끼가 어미에게 물어다 준다고 생각하여 천륜으로 연결시킨 것은 인간의 이성이 개입되었음이 틀림없다. 인간의 이성을 비판하는 것도 또한 인간의 이성이다. 조류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까마귀는 형제부양의 습성을 지녔다고 한다. 먹이활동을 하지 못하는 어미에게 물어다 줄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동생들에게 물어준 것이다. 동물의 세계에서는 먹이활동을 하지 못하는 것은 개체군에서 낙오를 의미한다.
인간이 자신의 외부에 도그마를 만든 것은 오래되었다. 자신의 내부에서 도그마를 찾아내기 전까지 우리는 천륜이라고 불렀다. 도그마를 교회에 의해서 움직일 수 없는 진리로 인정되어 이성으로서 증명 비판이 용서되지 않는 교리라고 한다. 이 도그마로 인해서 수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다. 인간은 교회에 그 책임을 떠 넘겼다. 의식이 없는 교회는 책임을 물을 수도 질 수도 없다. 인간의 이성으로 만든 것을 인간의 이성으로 비판하자 인간의 이성으로 인간의 생명을 헤치는 끔찍한 짓을 인간이 저질렀다. 자승자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