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리더가되는 삶
고독한 존재에서 나오는 시선
자기가 고독한 존재임을 인식하며 자신은 자기실현 가능성의 총합을 넘어설 수 있는 존재임을 깨달은 사람은 자신의 정신세계를 풍요롭게 변화시킬 수 있는 시선을 얻는다. 이러한 변화는 각성한 본인도 그를 대하는 사람들도 쉽게 감지하지 못한다. 우리의 일상이 오래되어 변하지 않기를 고집하는 습관, 사고방식, 관습, 문화에 젖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이라는 변화를 외면하는 일상을 살아간다. 사람들의 먹고사는 것은 다 한 가지라고 하며, 줄임말이나 자신만의 말로써 타인과의 대화를 이어가며, 타인과의 교류에서 일상적인 행동을 함부로 하며, 비슷한 연배의 사람들을 모두 친구라고 치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사귐은 자신을 더 나은 사람으로 이끌 수는 없다. 이러한 일상의 생계와 일상의 대화 그리고 일상의 인간관계에서 자신에게 의미 있는 가치를 세우지 못한다면 끌려가는 삶이 되고 만다. 그러나 이러한 일상에서 자신에게 의미 있는 것을 찾아서 거기에 자신이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일상의 번잡함을 줄이고 고요한 일상을 유지하려는 의지는 자신에게 몰두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 수 있게 된다. 이때부터 내삶의 리더로 살아가려는 사람은 드러내는 모습보다는 드러나지 않는 내면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번잡한 선명함보다는 투명한 탁월함을 추구하는 것이다. 각성하기 전까지 우리는 많이 긁어모으고 쌓음으로써 내삶의 질과 양이 늘어난다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왔다. 소유할 수 있는 물건을 사들이고 경력을 쌓고 경험의 절대량을 늘이려고 한다. 사회가 만든 가치나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긍정적인 사고방식이라고 쉽게 단정한다. 또한 그러한 생각들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면 부정적인 사고방식이라고 면박을 주기도 한다. 각성한 자신을 알아차린 사람은 습관, 사고방식, 관습, 문화에 매여서 긁어모았던 것에 대한 비판을 통하여 새로운 시선을 얻는다. 습관, 사고방식, 관습, 문화에 매여서 긁어모은 것이 내삶의 양과 질을 늘리기 위한 도움이 되지 않거나 효율적이지 않음을 알게 되면서 버리기 시작한다. 이러한 사유는 인간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변화이기에 자신도 타인도 알아차리기 어렵다. 버리고 제거하고 무시하는 것은 부정의 사고이지만 내삶에서는 긍정의 사고이다. 긍정과 부정은 분명히 양날의 칼이지만 손잡이는 분명히 내가 잡고 있어야 하는 칼이다.
내삶의 리더로 살아가겠다는 뜻을 세운 사람에게 일상은 새롭고 흥미롭고 다양함으로 다가오지만 번잡하다거나 바쁨으로 여기지는 않는다. 이들의 시선에는 묻혀있는 가치를 발견하기 위한 호기심과 궁금증이 묻어있다.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기 위한 시선에는 사물에 대한 흥미로움이 넘쳐난다. 진정성이 있는 가치들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여유가 있다. 인간에게 제2의 인생이 있다면 자신이 고독한 존재임을 인식한 순간이 그 시작일 것이다. 이미 차원이 달라진 이들의 삶은 퇴락하거나 피폐해지지는 않는다. 다만 제2의 인생이라고 해서 정체나 흔들림이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내삶의 리더로 살아가겠다는 뜻을 세운 사람은 정체나 흔들림에 자신을 방치하지 않는다. 그는 정체에서 빠져나와서 흔들림이 지나가기를 감내한다. 그리고 마침내 선명함을 찾아내고 탁월함을 추구하는 자신의 삶을 듬직하게 가꾸어 나간다.
물리적 한계를 인정하면 생기는 시선
인간이 물리적 실체를 가진 존재라는 한계는 분명하며 이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이 시선을 높이고 시야를 넓히려고 노력하는 것은 인간 존재의 물리적 한계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 한계를 넘어서려는 용기로 도전한 결과가 높은 시선과 넓은 시야를 가지고 내삶의 리더로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세운 인간이다. 시선과 시야의 개념이 필요한 것은 물리적 한계를 지닌 존재로서의 인간은 그 수많은 삶의 경험을 모두 할 수 없다는 한계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절박함에서 나왔을 것이다. 한정된 개인의 직접경험에서 얻은 결과로는 다양하고 복잡한 세상을 충분히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이 한계를 받아들이게 될 때 다른 사람들의 경험이 눈에 들어오게 된다. 이리하여 시야의 개념이 만들어지게 된다. 개인들의 경험을 들여다봄으로써 유사한 것과 독특한 것을 구별하고 보편과 특수를 구분함으로써 시야는 넓어지고 시선은 높아진다. 시야와 시선의 발현은 상호 보완적이다. 시야가 넓어짐으로써 시선이 높아지고 시선이 높아짐으로써 시야가 넓어지는 현상이 동시에 발현된다고 볼 수 있다. 시야가 넓어지고 시선이 높아지는 것이 서로에게 필요한 조건은 될 수는 있다. 여기에 더하여 무엇에 대한 시야의 넓이와 시선의 높이를 추구하는가에는 개인의 본성과 개인적 취향이 충분조건이 된다. 시야(視野)가 달라지면 새로운 것을 볼 수 있게 된다. 다양하게 볼 수 있게 된다. 시선(視線)이 달라지면 같은 것을 다르게 볼 수 있게 된다. 유연하게 볼 수 있게 된다. 새롭게 볼 수 있게 된다. 즉 고정되고 정형화된 사고의 틀 속에 갇히지 않게 된다. 달라진 시야와 시선이 주는 혜택은 여유로운 일상의 태도에서 얻는 평안과 평온으로 세상을 너그럽게 대할 수 있다. 이러한 심리적 안정은 창의적으로 사고하는 기반이 된다. 이렇게 달라진 시야와 시선은 ‘찾는’ 가치에서 ‘부여하는’ 가치로 삶의 무게를 이동시킨다. 그래서 폭이 더 넓고 높이가 더 높은 나의 기준을 스스로 만들어 가치를 부여할 수 있게 된다. 스스로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시선에는 가치가 책임과 의무라는 희생을 요구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음을 알고 있기에 스스로 가치를 부여하는 삶은 책임과 의무를 소홀히 하지 않는다. 시야와 시선을 넓고 높게 가지려는 것은 내삶의 질과 양을 늘리려는 개인의 적극적인 의지가 중요하다. 오랜 시간 동안 이러한 의지를 견지함으로써 내삶을 선명하고도 탁월하게 해 보겠다는 개인의 의지가 개입되지 않고서는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차원이다.
시야에 들어온 모순
인류가 인간으로서 살아가겠다는 결심을 굳히고 그 의지를 굳건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이 관심을 기울였다. 역사에는 인간에게 관심을 가지고 생각을 발전시킨 사람들이 많이 있다. 지금의 우리는 그들을 철학자라고 부른다. 동서양의 많은 철학자가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결국은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을 설명하였다. 이들의 설명으로 인간과 세상이 모두 설명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철학자들도 다만 일부분에 대한 이해가 증진되었다고 말할 뿐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가 철학자들의 설명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그들의 ‘일부분에 대한 이해’가 내삶에 대한 통찰 능력을 증진함에 많은 도움이 됨을 알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삶의 무게가 짓누르는 고통(苦痛)에서 한 권의 책을 읽고 고통이 터지는 듯한 기쁨을 맛보았다고 하기도 한다. 참으로 부러운 경험이다. 이러한 경험도 분명하게 인간의 삶을 모든 것을 설명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부분적으로 합당한 설명의 공통점은 인간의 삶에 내재(內在)되어 있는 모순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이다. 이 모순은 결과에 대한 가치 판단임으로 인간에게만 유효하게 적용된다. 모순은 인간의 의지가 개입되어야 해결되고 해소된다. 그래서 나는 내삶에 내재(內在)되어 있는 모순을 살피기 위해서 철학자들의 인간과 세상에 대한 설명에 잠시라도 눈길을 건넬 필요가 있는 것이다.
모순(矛盾)이라는 한자 성어에는 단순한 장사꾼의 입담에 놀아나지 않는 인간의 총명함을 넘어서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자신이 팔고 있는 창은 무엇이든 뚫을 수 있다고 목청을 높이는 장사꾼 앞으로 군중이 모여든다. 군중이 모여들자 흥이 난 장사꾼은 이번에는 자신이 만든 방패는 어떤 것이든 막아낼 수 있다고 목청을 높이며 군중들의 구매를 독려하고 있다. 그때 한 사람이 당신이 팔고 있는 창으로 당신이 만든 방패를 찌르면 어떻게 되겠느냐고 물어본다. 장사꾼은 입맛을 다시지만 대답할 수 없다. 군중은 흩어지고 장사꾼은 자신의 창과 방패를 판매할 기회를 놓쳐 버렸다. 이 이야기를 어리숙한 장사꾼과 총명한 군중의 이야기에서 벗어나 보자. 우리는 모든 것을 뚫을 수 있는 창의 예리함과 어떤 것이든 막을 수 있는 튼튼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존재들이다. 다만 그 예리함과 튼튼함을 동시에 발휘할 수 없는 물리적 한계를 지닌 존재임은 분명하다. 이 모순을 예견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 노력을 한다 해도 어쩔 수 없는 한계는 있다. 모순은 두 개의 일이 발생하고 나서 알아차릴 수 있는 판단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일상은 모순이 내재(內在)된 세상에서 이루어진다. 하나의 결정으로 다른 하나를 배제해야 하는 판단이 성공하기를 바라면서 살아간다. 그러나 창이 해결하지 못한다고 해서 실망하거나 좌절하지는 않는다. 방패의 튼튼함이 있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창과 방패를 바꿔가면서 살아가는 것이 삶의 모습이다. 한 번의 창과 한 번의 방패로 일이 해결되지 않을 때를 우리는 흔들린다고 표현하며 흔들리지 않도록 자신을 세우기 위해서 노력을 지속한다.
시선에 잡힌 변화
모순을 살피는 데 있어서 유용한 개념으로는 긍정(肯定)과 부정(否定)이 있다. 철학은 긍정과 부정의 본질을 연구하는 일에 관심을 두겠지만 우리는 내삶에서 긍정과 부정을 다르게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듯하다. 인간의 삶은 어떤 학문의 전유물이나 전문 분야는 아니다. 삶은 그 자체로서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 것이므로 어떤 학문이나 전문 분야를 위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만든 모든 학문이나 전문 분야는 인간의 삶을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을 때만이 의미와 가치를 부여받을 수 있다. ‘생물학에서는 그 어떤 것도 진화에 비춰보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다’(도브잔스키)는 언급은 적절한 예가 될 것이다. 내삶의 리더로 살아가겠다는 긍정적인 삶의 태도에는 내가 지닌 모든 가능성의 총합을 넘어설 수 있다는 믿음과 개인의 고유성을 확고하게 지키겠다는 의지가 반영되어 있다. 눈앞의 사실이나 상황은 비판은 할 수 있지만 부정할 수는 없다. 이러한 사실이나 상황이 내삶과 연결될 때 우리는 견딘다고 한다. 내삶에 외부의 가치가 개입하여 엇박자를 내고 있는데도 견디는 삶은 지겨울 수밖에 없다. 내삶을 지겹게 하는 외부의 가치들을 제거하고 박탈하고 방어하는 것을 부정이라고 해야 한다. 이러한 부정은 내삶을 더 적극적으로 나아가는 계기로 삼을 수 있기에 긍정으로 연결된다. 자신에게 지워지는 삶의 무게를 거부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감내(堪耐)한다고 한다. 외부의 기준을 추종하는 가치 있는 삶이 아니라 내삶의 기준을 세우고 가치를 부여하는 삶에서 긍정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그러므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실현이 가능한 바람직한 방향보다는 내가 소망할 수 있는 방향이 긍정적인 방향이다. 이것이 내삶의 무게를 거부하지 않고 감내하는 이유이다.
긍정과 부정을 하나로 수렴시킨다면 그곳에는 ‘변화’가 있다. 우리의 삶은 긍정과 부정, 모순, 역설, 아이러니, 패러독스 등이 일으키는 변화를 피할 수는 없다. 세상을 변화가 지배한다면 내삶도 변화가 지배한다. 변화는 선명함을 옅어지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변화에 대한 저항이나 극복을 통하여 선명함을 추구한다. 변화에 저항하고 변화를 극복하려는 과정에서 우리는 과정의 본질인 변화는 잊어버리고 선명함만을 찾으려는 조급함으로 혼란을 가중(加重)시킨다.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일일삼성(一日三省) 신독(愼獨) 신언서판(身言書判) 등의 한자 성어는 물리적 존재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사유를 격려하는 선현들의 따뜻한 눈길이다. 처음 창작할 때의 뜻에서 변했다고 하더라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무게감이 있다. 이 한자 성어를 창작한 선현들은 변화를 받아들이라는 완곡한 부탁을 숨겨두었다. 이 부탁을 찾아내는 것이 시선이다. 생물학에서는 그 어떤 것도 진화에 비춰보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다고 하듯이 인간의 생애를 변화에 비춰보지 않는다면 삶의 의미는 아주 많이 퇴색해 버릴 것이다. 우리의 삶은 내가 의식하던 그렇지 못하던 항상 변화에 노출되어 있다. 내삶의 변화를 의식한다는 말은 가치를 부여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변화를 돌에 조각할 만한 가치, 접착제로 붙일만한 가치, 일회용의 가치들로 나누면서 세상을 헤치며 나가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결국 가치의 무게감은 가치가 필요한 곳은 변화가 되어야 함을 시사한다. 변화가 있는 곳에는 가치가 필요하며 가치를 부여한다는 것은 변화를 직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가치로부터 얻고자 하는 것은 변화를 직시하고 있다는 인식이다. 변화적으로 삶을 생각하는 법을 배운다는 의미는 결국 가치와 연결되어야 하는 것이다. 변화를 엮은 실이 가치가 될 때 삶을 일관성(一貫性) 있게 유지할 수 있다. 변화가 있어야 삶이 흥미롭고 적극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하면 손가락질을 당할 수도 있겠지만 아랑곳할 일은 아니다. 변화가 있어야 삶이 흥미롭고 적극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은 스스로가 발견한 의미에 가치를 부여하는 행위에서 나오는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시선(視線)
내삶의 리더로 살아가겠다는 시선으로 세상을 대할 때 가장 큰 변화는 의미를 찾는 시선에서 가치를 부여하는 시선으로의 변화이다. 사회적 관계를 떠날 수 없는 인간에게 의미와 가치는 일상의 대부분에 영향을 미치는 매우 중요한 행동의 기준이다. 의미는 내삶의 양과 질을 증가시키는 데 필요한 지식과 정보의 수집에 관여한다. 개인은 이것을 토대로 의사를 결정하기 위하여 가치를 개입시킨다. 개인은 이 과정에서 절대로 중립적인 태도를 유지할 수 없기에 의미와 가치는 개인의 판단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따라서 개인이 취사선택하는 의미와 가치에는 책임과 의무가 따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책임과 의무가 반드시 부담만으로 작용하지는 않는다. 책임과 의무를 넘어서는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는 황홀감을 맛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회가 좋은 것, 바람직한 것, 옳은 것이라고 만들어 놓은 의미와 부여한 가치에 대하여 자신에게도 좋은 것, 바람직한 것, 옳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숙고가 필요하다. 사회가 만든 의미와 부여한 가치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인다면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으나 사회가 만든 의미와 부여한 가치에서 진정성을 찾아내고 묻혀있는 가치를 드러내며 새로운 가치를 부여할 수 있게 되면 부담보다는 자유로움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인간의 사유를 설명하는 도구로서 가치와 의미는 미묘한 차이가 있어 보인다. 의미는 ‘찾는다’라는 서술이 어울리는 수동적 사유의 행위에 가깝고, 가치는 ‘부여한다’라는 서술이 어울리는 능동적 사유의 행위에 가깝다. 물론 의미와 가치는 ‘찾는다’와 ‘부여한다’라는 서술어를 바꾸어 써도 어색한 표현은 아니다. ‘찾는다’와 ‘부여한다’는 의미와 가치에 대한 표현에서 전자는 자신의 외부에 시선이 머물고 후자는 자신의 내부에 시선이 머문다. 둘의 차이는 호기심과 궁금증의 특징을 잘 반영한다. 호기심은 외부 세상과 소통하려는 나의 관심인데 외부 세계에 나의 관심을 끌 만한 것이 없으면 이내 사그라진다. 어떤 사물이나 현상에서 무엇인가를 ‘찾아내’려는 사유에서는 사물이나 현상이 주인이 되고 개인적 성향이 손님이 되기 때문에 개인의 성향을 소홀히 할 수도 있다. 궁금증은 나의 내부에서 외부 세계와 소통하라고 부추기는 충동인데 이것이 해소되지 않으면 끊임없이 고개를 쳐들고 일어난다. 가치를 부여하는 사유에서는 어떤 사물이나 현상이 손님이 되고 개인적 성향이 주인이 된다. 그래서 의미는 자신의 관심이 사라지면 잊히고 만다. 그러나 가치는 자신의 판단이 개입되지 않으면 끊임없이 가려움을 유발한다. 그래서 의미와 가치에 대한 사유가 삶과 연결될 때의 느낌은 못을 박을 때 집어 올리는 마치나 큰 바위를 치기 위해서 망치를 들어 올릴 때 전해오는 긴장감들을 닮았다. 마치는 가벼운 긴장을 세상에 풀어놓지만 망치는 묵직한 긴장으로 세상을 내리친다. 마치를 잡을 때의 긴장이 있어야 못을 박을 수 있고 망치를 들어 올릴 때의 긴장이 있어야 바위를 깰 수 있다. 긴장감은 우리를 불안하고 예민하게 만들어서 세상과 마주하게 하는 강력한 힘이다. 이 긴장감은 가치를 부여하는 책임과 의무를 무겁게 하지만 이 무거움이 변화하는 세상에서 흔들리지 않도록 나를 잡아준다.
조리(笊籬)가 복조리가 된 까닭
쌀을 이는 데 사용하던 도구인 조리가 우리 주변에서 사라진 지는 꽤 오래되었다. 쌀알보다도 작은 돌멩이나 모래알이 섞여 있는 쌀에서 쌀만을 골라내는 일은 표 나지 않는 성가신 일이다. 그러나 민감한 입속의 감각을 가진 인간에게는 밥을 먹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다. 조리로 쌀과 모래알을 구분하는 방법은 적당량의 쌀에 물을 부어서 휘저으면 쌀은 위로 뜨고 작은 돌멩이나 모래알은 아래로 가라앉는다. 이때 조리를 사용하여 위로 뜨는 쌀을 건지면 된다. 그런데 이 작업이 만만하지만은 않다. 조리를 움직일 때 잘못하면 쌀과 모래알이 같이 돌아다니기 때문이다. 몰입은 아니더라도 집중이 필요한 일이다. 쌀과 작은 돌멩이나 모래알이 섞여 있을 때 둘을 구분하는 방법을 찾아낸 사람은 쌀로부터 작은 돌멩이나 모래알을 분리할 것인가? 작은 돌멩이나 모래알로부터 쌀을 분리할 것인가? 의 미묘한 차이를 포착했다. 적당량의 쌀에는 두 가지의 구분 방법에 대한 고민이 의미가 없다. 고민은 적당량의 쌀이 아니라 거대한 양의 쌀이 눈앞에 있는 경우이다. 한 가마니의 쌀로도 우리는 포기라는 단어를 떠올릴 것이다. 또한 많은 양의 쌀에는 물을 사용할 수 없다. 쌀에서 모래알을 구분하기 위해서는 쌀을 계속 뒤적여야 한다. 반복적인 이 작업은 효율이 낮다. 모래알에서 쌀을 구분할 때는 쌀만 있는 부분을 계속 분리하면 된다. 따라서 모래알을 한 곳으로 모으면 훨씬 효율적이다. 이러한 미묘한 차이를 발견한 사고에서 인간과 물을 대신하는 힘을 찾아내어 대체함으로써 매 끼니를 준비하는 성가신 일과 물의 사용에서 오는 불편함과 쌀의 낭비를 거의 없앴다. 조리의 존재가치를 소멸시키고 인간을 성가신 일에서 놓여나게 하였다. 쌀을 이는 행위에 숨어있던 의미를 찾아내고 쌀을 이는 행위에 다른 가치를 부여하고 가정에서 불러내어 도정공장(搗精工場)에 영구 취업시켰다. 그 후 조리(笊籬)는 복조리로 변신하여 자신의 다른 의미는 찾았으나 자신에게 새로운 가치를 부여해 줄 사람을 백방으로 수소문하고는 있지만 아직은 만나지 못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