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란?
삶이란?
삶의 무게: 독립 선언과 능동적 책임
아주 오래전 인간은 자신의 삶을 하늘에 의존하지 않겠다는 독립선언을 했다. 이 결심의 이면에는 선택과 책임도 감내하겠다는 무게가 실린다. 이때부터 인류는 자신의 선택과 책임으로 역사와 흐르고 있다. 역사는 인류 삶을 압축시킨 기록이다. 우리의 삶은 역사가 압축파일로 우리 앞에 던져놓은 스팸메일일지도 모른다. 삭제하자니 혹시 중요한 정보일까 싶고, 열어보자니 시간 낭비이거나 해로울 수 있다. 마치 계륵(鷄肋)과 같다. 업적 중심의 역사로 보면 조조의 계륵에 관한 판단은 스팸메일이었다. 그러나 이 또한 후대의 속절없는 평가일 뿐 그의 삶의 무늬는 그의 책임으로 새겨졌다. 스팸메일은 대량으로 무작위 전송되지만, 수신자에게는 대부분 불필요하거나 원하지 않는 정보다. 우리의 주의를 분산시키고, 진짜 중요한 정보를 가리며, 때로는 악성 코드처럼 위험하기도 하다. 조조의 중얼거림은 선택과 책임의 무게에 짓눌린 비명이었다.
능동적 삶이란?
삶이란 일상을 능동적으로 살아냄이다. 능동적이라 함은 상황의 변화에 외부에서 규정한 관습이나 선입견에 얽매이지 않고 대처하는 방식을 일컫는다. 세상이 긍정적이라고 분류했더라도 나는 그것을 부정적으로 살피고 더 나은 결과를 도출하려고 시도하는 방식이다. 평범함은 수동적 가치에 매몰되어 있다. 위대함은 실체가 없는 목표에 얽매여 있다. 평범함은 일상의 흐름을 지속함으로써 긍정의 태도가 쌓이게 한다. 평범함의 지속성과 그 기초 위에서 능동적인 비판적 성찰이 더해질 때 진정한 위대함으로 변모될 수 있다. 위대함은 일상적이고 긍정적인 과정의 결과를 비판적으로 평가함으로써 능동적인 주체성을 확보한다. 그래서 삶이란 평범함의 위대함이라는 보편가치를 품으면서 나의 가치를 찾으려는 사연이 많은 무게감이 있는 표현이 된다. 일상에서 원활한 소통을 위한 단어로써의 삶이라는 단어에는 무게감이 약하다. 이 단어가 머리에서 맴돌고 가슴을 압박하는 무게감을 느꼈다면 인간이 될 수 있는 관문을 본 것이다. 이때의 압박은 경험과 경력으로 만들어내는 업적에 대한 평가는 아니다. 긴 흐름에서 사람으로만 존재할 수는 없다는 자각이다. 이들은 본능적 존재를 넘어선 실존적 존재에 관심을 둔다. 사회적 역할과의 괴리에서 오는 선택과 책임을 방기 하지 않는다. 생명체의 유한성을 두려워하거나 안타까워하지도 않는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관문에서 기웃거린다. 그러나 그 관문을 통과하겠다는 용기를 내는 사람들은 한없이 줄어든다.
사람을 넘어 인간으로:실존의 관문
사람이란 명칭은 생물 계통 분류에서 호랑이 사자 등과 같은 차원이다. 단군 신화에서 곰은 미련하고 호랑이는 성질이 급하다. 민담에서 여우는 영악하고 토끼는 교활하다. 모두가 사람의 관점에서 동물을 평가한 말들이다. 우리는 일상에서 다른 사람을 평가할 때 동물에게 사용하는 수식어들을 별 꺼림칙하지 않게 사용한다. 그러나 본능을 넘어서고자 하는 긴장과 의지를 가진 사람들은 꺼림칙하여 조심스럽게 접근한다. 그래서 사람이 사람을 평가하는 새로운 단어가 필요했다. 거의 전적으로 본능에 의존하는 동물처럼 살아가는 사람과의 구별은 당연했다. 자신의 생존에 필요하다면 끝없이 이로움만을 추구하거나, 해로움은 한없이 회피하려는 사람들이 공동체를 허물도록 놔둘 수는 없다. 동물적 본능을 벗어나기 힘들어하는 사람과 힘은 들지만 본능을 넘어서고자 하는 긴장과 의지를 가진 사람을 구별할 필요가 드러났다. 이 필요성에 답한 단어가 인간이다. 다시 인류에게 선택과 책임의 순간이 다가왔다. 사람과 인간을 구별하는 ‘인간이 됨’이라는 근간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 이 머리가 지끈거리는 문제는 원죄가 되어 유전된다. 왜냐하면 인류는 ‘인간 됨의 근간’을 오래전에 선택하고 그 책임의 무게는 공동체의 구성원에게 나누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이란 동물적 차원으로 살아가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강력한 의지와 고뇌가 반영되어 있다.
도덕적 자율성을 통한 인간 됨의 확보
생명체의 기본 전제조건은 생존이다. 대부분의 동물은 암수의 만남이 있어야 후대의 생존이 가능하다. 동물 중 일부 종들은 공동체를 이루어 이 목적을 이어간다. 그리고 이 행위를 포함한 사람들의 관습을 사회적 동물이라고 표현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표현은 공동체를 통한 생존의 유익함을 깨달은 사람들의 짜릿한 환호성이다. 이 짜릿함을 오래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관심이 필요하다. 이 관심이 공동체라는 울타리를 만들었다. 공동체 속에서 인간으로 살아가려는 사람들은 사회질서 유지의 최소 원리인 법을 제정하여 권리와 의무를 조정하였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는 윤리로 제시되었다. 이는 동물적 본능에 머물지 않도록 사람들을 규율한다. 법을 준수하고 윤리를 실천해도 알 수 없는 허기가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이 허기는 외부 규범이 채워줄 수 없는 내면적 차원의 부재다. 따라서 외부의 규칙인 법과 외부의 규율인 윤리로는 채워질 수 없다. 이 허기는 우리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에 존재한다. 아무리 화려한 치장을 하더라도 허기를 느낀다면 그것은 내면이 헛헛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이 내면으로 눈길을 돌린다. 이 지점이 인간으로서의 존재 차원을 근본적으로 변환시키는 관문이다. 이 관문을 지나 도덕이 흐르고 있다. 도덕은 인간의 이성이 스스로 부여한 자율적인 법칙이다. 이는 외부의 강제(법)나 보상(쾌락) 없이도 스스로 지키고 싶게 만드는 가치이다. 도덕적 삶은 본능에 굴복하는 삶이 아니다. 스스로 옳은 선택이 주는 떳떳함과 뿌듯함으로 기쁨을 누리는 자유로운 삶이다. 도덕은 인간을 동물이라는 사람과 구별 짓는 근본적인 요소이다.
내삶의 리더: 성찰과 주체적 기준
내삶의 리더로 살아가려는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대하여 철학적 사유라 포장하지 않는다. 일일삼성(一日三省)이라는 문구의 해석에서 ‘반성’이란 뜻은 ‘성찰’이란 뜻과 맥락은 같지만 결은 다른 해석이다. 자신의 말이나 행동, 생각에 대하여 그 잘못이나 옳고 그름 따위를 스스로 돌이켜 보는 행위를 하루에 세 번씩 하는 사람은 이미 인간 됨의 관문을 지났다. 반성은 내삶의 차원을 다르게 흐르도록 하는 주요한 수단임은 분명하다. 반성의 행위 속에 숨어있는 수동성과 부정성을 변화시키려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 내삶의 리더로 살아가려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주된 관심사는 ‘인간됨’과 ‘나다움’의 조화가 빚어내는 아름다움이다. 그래서 이들은 ‘반성’보다는 ‘성찰’에 무게를 둔다. 성찰은 반성의 재료를 포함하기에 더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질문을 한다. 즉, 자신의 말과 행동, 생각을 살피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을 살핀다. 그래서 이들의 살핌(省)은 과거에 시선을 두는 반복에 있지 않다. 과거 현재 미래로 시선을 분산하되 통합하여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흐름을 포착하려 노력한다. 살핌(省)은 어떤 기준에 나를 견주어 보는 것이 아니라 그 기준이 나를 인간으로 살아가도록 하고 있는가?라는 물음으로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점은 사회나 타인이 만들거나 가치를 부여한 기준이 아니라, 그것보다도 더 원초적인 인간 본성에 관한 살핌이 핵심이다. 살핌이 기준이 있는 돌이 켜봄이 되어서는 내삶의 리더로 살아가는 데 방해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반성이 자기 검열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자신을 들여다보는 성찰로 이어진다. 성찰은 자신의 기준을 세우는 것이다. 어떤 의도나 시선을 가지고 자신의 내면을 살피는 것이다. 반성이 성찰로 얻은 기준을 가지고 자신의 행동을 돌이켜보는 행위이거나 외부의 기준으로 자신의 행동을 되짚어 보는 행위라면, 성찰은 자신의 기준을 세우는 흐름을 채움과 비움의 과정으로 인식하는 행위이다.
굳건함을 위한 진선미의 역할
고유명사인 내삶을 인식하고 깨닫는 것이 내삶의 리더의 출발점이다. 내삶이란 내가 살아가는 것을 세상에 비교당하지 않고 보이는 대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보이는 대로 본다는 것은 개인의 주관이나 사회의 가치를 개입시키지 않고 눈앞의 일에 평온과 평안을 실현시키며, 원초적 감정으로 포장된 가치들을 제거해 보는 능력이다.
내삶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내삶이냐?’라는 질문에 ‘그렇다’라고 답할 수 있는 생각과 자세, 태도가 굳건해야 한다. 그 굳건함을 유지하는 것이 바로 진선미(眞善美)다.
진(眞)의 참됨이란 세상이 부여한 가치를 배제하고 보이는 대로 나를 설명하는 능력이다. 그러므로 참됨이란 경험을 걷어내고 경력을 비우고서 나타나는 나를 드러내는 생각이나 시선이다. 이는 경험을 무시하거나 경력을 배제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경험과 경력으로 나아가게 한 자신의 추동력이 무엇인가를 살피는 시선이다. 낚시에 몰두하고 음식점을 탐방하고 등산을 즐기는 행위의 근원에는 사람의 본성이 자리하고 있다. 자신에게 이로움을 추구하고 해로움을 회피하려는 본성은 삶을 흐르게 하는 원천이다.
선(善)이란 윤리적 ‘참함’이라는 명사형의 해설보다는 물과 같이 끊임없이 흐르는 동사형으로 해설하는 자세와 태도를 일컫는다. 노자는 상선약수(上善若水)에서 가장 좋은 것은 물의 성질처럼 끊임없는 노력을 강조한다. 대부분의 이에 대한 해석을 ‘최고의 착한 것은 물과 같다’는 명사형으로 해설함으로써 답답함을 벗어날 수 없게 해 버렸다. 선(善)은 진(眞)에서 살핀 본성을 자신에게 흐르는 예민함으로 천성과 조화롭게 조절하려는 자세와 태도다. 옛사람들은 천성의 발호를 두려워했지 천성의 드러남을 저어하지는 않았다. 자신의 천성이 때와 상황에 맞음을 중용이라 했다. 그러나 중용에 머물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당부도 있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는 그것을 선(善)이라 부른다. 본성에만 몰두하여 천성의 고요를 깨트리는 이유는 세상의 자극으로 기쁨을 채우기 때문이다. 내면에서 찾은 기쁨과 외부에서 오는 자극의 조화를 이루어냄으로써 중용의 차원으로의 흐름을 지속할 수 있다. 따라서 동사형으로 선에 접근하는 태도는 동물적 본능을 넘어 자율적 도덕 법칙을 따르는 실천적 의지로 굳건해진다.
미(美)는 본성과 천성의 조화로움이 드러나는 아름다움이다. 외부에서 규정한 정지된 아름다움이 아니라 내부의 움직임이 만들어낸 흐름의 아름다움이다. 세상의 흐름에 따라 본성과 천성도 끊임없이 따라 흐른다. 이 과정의 조화와 무늬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예민함을 견지해야 한다. 이 예민함은 작은 것에 대한 일상적 신경 쓰임이 아니다. 넓은 시야와 높은 시선으로 자신의 삶을 살피는 온몸의 긴장이다. 이렇게 살핀 본성과 천성의 조화를 드러내는 것을 개성이라고 한다. 개성은 나를 규정하는 성격이 아니라 나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성향이다. 나의 아름다움은 ‘인간 됨'과 '나다움'의 조화가 빚어내는 궁극적인 삶의 모습이다.
삶이란 인간이 그리는 모든 무늬를 나에게로 정리하는 모습이며, 이는 다양함의 통일체이다. 이 통일체에 대한 인식을 방해하는 것은 평범함이 특출남이 아니라는 착각이다. 평범함 그 자체가 위대함이며 죽을 때까지 그러함을 아는 것이다.
우연과 내공: 삶과 죽음에 대처하는 자세
출생은 아주 우연으로 생겨난 개인의 궁극적 순간이다. 죽음은 아주 필연으로 맞이해야 할 개인의 궁극적 순간이다. 삶은 기억하지 못하는 출생과 기억할 수 없는 죽음을 포함한다. 인간은 이 수동적인 출생과 죽음을 능동적으로 바꾸어 가는 노력을 하도록 만들어진 존재이다.
죽음의 우연성을 깨닫는 내공
죽음이 무서운 이유는 한 번도 경험하지 않은 일을 경험해야 한다는 착각에서 나온다. 죽음은 경험할 수 없다. 죽음은 그 사건으로 내삶의 영원한 휴식이며, 우연의 끝이다. 전혀 자료가 없기에 두려운 것이지만, 출생부터 죽음직전까지의 모든 일이 우연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죽음 또한 우연히 일어나는 사건일 뿐이다.
그렇게 툭 던지듯이 죽음을 맞이하려면 내공이 필요하다. 그 내공은 삶을 일궈가면서 쌓는 것이다. 내공의 핵심은 자신이 겪는 모든 것을 우연으로 받아들이고, 그 우연을 필연으로 생각하는 것은 자신이 그 우연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임을 자각하는 것이다. 삶을 필연으로 만들려는 의지가 사람들을 힘들게 한다는 의미는, 곧 우연에 더 적극적으로 대처하라는 뜻이다.
흔들리지 않는 내공은 외부의 선동적인 자극에도 안절부절못하게 하지 않게 한다. 백척간두(百尺竿頭) 진일보(進一步)는 단순히 위험한 상황을 벗어나는 차원이 아니라, 자기의식의 자기 극복 과정에서 나오는 감탄사이다. 그곳에서 진일보했음은 자신을 평온과 평안의 경지로 옮겨갔음을 인식하고 깨달은 자리인 것이다. 이 평온과 평안이 바로 내공의 증거이다.
관성을 깨고 변화를 품다
낡은 기초 위에만 건설하고 젊은 시절 믿어버린 원리에만 의거하기보다는, 변화에 관심을 갖는 것이 자신을 알아보겠다는 자세이다. 왜 과거를 답습하는가? 그것은 대부분 습관일 경우가 많으며, 습관은 자기 본성에 관성을 부여한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과 다윈의 진화론이 나온 배경에는 우주의 본질이나 자연의 본질에 자기 본성이 어긋나다는 의심이 있었다. 지동설과 진화론은 지식이었지만, 자기 본성은 관성을 가진 것이었다. 이 차이의 진실은 변화를 품음으로써 비로소 드러난다.
삶은 일상의 평범이 위대한 것임을 증명해 나가는 과정이다. 이것을 놓치는 이유는 내가 세상에 보내는 자극과 세상이 나에게 보내는 자극을 순간순간 알아차리지 못하는 데 있다. 고유명사인 내삶을 살아가는 것은 결국, 일반명사인 삶이 아닌 내삶을 인식하고 깨닫는 것에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