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에서 얻는 함량과 영혼
직업에서 보이는 능력
노동과 관련된 많은 논쟁의 해박한 이해가 필요한 시대는 아니다. 노동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어도 자신의 삶을 잘 살았다고 생각하며 사라져 간 사람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 이러한 평가가 가능해지게 된 것은 결국 교육 기회의 확대가 가장 큰 요인일 것이다. 어쨌든 노동과 관련된 논쟁의 대부분을 내려놓게 되면 남게 되는 것은 내삶이다. 내삶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많은 것이 필요하다. 내삶과 연계된 많은 것들에 대하여 구분하고 구별하여 나를 찾는다는 철학적인 사유와 눈앞의 생존을 위한 생각에는 차이가 있다. 그렇더라도 결국은 모두 내삶에 포함된 생각일 뿐이다.
생존을 위한 일상과 삶의 의미를 찾겠다는 철학적 사고를 결합하여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답은 사람마다 다를지라도 핵심적인 맥락은 내삶의 질과 양의 변화를 위함이다. 이 답에 좀 더 접근해 보기 위하여 학술적인 접근이 아닌 일상적인 접근을 해보고자 한다.
전문적인 학술 연구에는 오랜 기간의 준비와 경험이 필요하며 반드시 책임과 권위가 따르게 된다. 그런데 세상은 전문적인 학술 연구에 접근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경험을 나누는 방법을 만들어 냈다.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인간의 모든 움직임이 육체적임에도 굳이 구분하려는 성향이 강하다. 주로 육체의 움직임이 강한 현장을 이야기할 때 ‘노동 현장’이라는 표현을 쓴다. 이러한 노동 현장의 임금이 그렇지 않은 곳의 임금보다 훨씬 높다는 통계가 발표되곤 한다. 육체적 움직임이 강한 현장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노동의 기능과는 관계없이 거의 노동 현장이라고 표현한다. 이는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산다는 생존에 치중되는 느낌이 있다. 그 노동 현장이 여러 가지 요인으로 임금이 급변하면서 생존 노동이라는 인식도 변화되었다. 그래서 노동이라는 단어를 유화시키는 표현으로 바뀌었다. 금속노조, 운송노조, 민주노조, 한국노총 등으로 방송에 노출되는 모습을 바꾸기는 하였지만 근저에는 노동이라는 개념을 없애지는 못하였다. 언제부터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개인적으로 생존에 필요한 노동이라는 단어와 개인의 신분이나 계층을 지칭하는 의미가 내포된 직업이라는 단어가 서로에게 녹아들지 못하는 듯한 느낌이 생겼다. 사람은 노동으로 직업이 생기고 직업이 생기면 노동은 반드시 해야 한다. 그러나 생존을 위한 노동을 반드시 직업이라고 불리지 않는 경우가 있고. 또한 직업이라고 불릴 수 있는 노동을 하고 있어도 생존을 위한 노동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러한 생각 속에서 자신의 노동과 직업에 관한 현대의 논쟁을 이해하려면 상당한 인내력이 요구된다. 그래서 얕은 지식으로 접할 수 있는 한자 성어 속에서 이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한자 성어 속에서 직업의 종류가 꽤 등장한다. 직업과 관련된 한자 성어는 고인지조백(故人之糟魄), 포정해우(庖丁解牛), 백락일고(伯樂一顧) 등이 있다. 고인지조백은 경지를 아는 지혜, 포정해우는 최고 숙련의 기술, 백락일고는 능력에 대한 세상의 인정을 이야기한다. 대체로 직업에서 보이는 능력의 궁극적인 경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 한자 성어들은 ‘장자’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고인지조백(故人之糟魄)은 수레바퀴를 깎는 일을 하는 늙은 기술자가 한 말로 대체로 ‘찌꺼기’라는 말로 해석된다. 그러나 직업에서 얻은 경지가 다른 차원에 있는 사람이 조(糟)와 백(魄)를 묶어서 썼다는 점은 다르게 봐야 한다.
포정해우(庖丁解牛)는 소를 도살하고 해체하는 기술을 가진 사람에 관한 이야기이다. 당시에도 소를 도살하는 사람과 해체하는 사람의 분업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이야기에는 죽은 소를 해체하는 능력에 관한 이야기이다. 지식을 넓히려는 목적에서는 단순히 소를 잘 해체하는 기술자라고 알면 되겠지만, 이 한자 성어 속에는 얻을 것이 좀 더 있다.
백락일고(伯樂一顧)는 실제 존재했던 인물이라고 한다. 전설에는 말에 관한 일을 주관하는 신선이 있는데 ‘백락’이라 했다고 한다. 중국의 주나라에 손양이라는 사람이 말의 능력을 감별하는 능력이 뛰어나서 ‘백락’이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한다. 후세의 사람들이 손양의 뛰어난 능력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서 전설 속 신선의 이름을 붙여주었을 것이다. 백락일고(伯樂一顧)에는 현실 세계에서 실제로 능력을 발휘한 손양의 흔적이 감춰져 있는 것이다. 장자가 이들을 자신의 이야기에 끌어들인 모양새보다는 의미에 관심을 기울여 보자.
전문가들이 보는 미숙련의 모습들
인간 세상에서 생존을 위한 육체적 움직임에 노동이라는 명칭을 부여하면서 필연적으로 노동의 가치 평가가 따르게 되었다. 노동 본질의 가치가 아니라 금전적인 가치를 평가하는 것이다. 노동 본질의 가치는 산업혁명 이후의 사회에서 인간 노동의 열악한 상황이 드러나고 노동의 분화가 뚜렷이 구분되고 나서 인간 사회에 제기된 문제였다.
우리 전통 농경사회에서 노동의 대가인 품삯은 누가 결정하였는가? 두레나 길쌈 등 반드시 협동이 필요한 전통사회에서는 품삯을 관습으로 결정했다. 남자에게는 ‘들돌 들기’라는 관습이 있었다. 성인이면 들 수 있는 무거운 돌을 공동체의 성원들 앞에서 들어 보이는 행위이다. 이 돌을 들고 나면 공동체의 작업에서 어른의 품삯을 받을 수 있었다. 여자에게는 ‘새참 소쿠리 내어 가기’라는 관습이 있었다. 많은 일꾼의 식사를 차려낼 수 있는 능력이 평가 기준이었다. 여자의 이 행위는 적절한 때에 적정한 분배를 통하여 공동 작업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래서 이러한 능력을 검증받으면 성인의 자격으로 공동체의 활동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관습들이 완전히 사라진 현대에는 품삯의 기준을 누가 어떻게 정하는가? 당연히 사회가 정한다. 사회는 법이나 규정을 정하여 노동에 대한 금전적 대가의 지불을 강제한다. 공동체에서 노동능력을 확인하는 절차가 있었기에 전통사회에서는 노동의 품삯에 대한 혼란이 덜했다. 공동체에서 실질적인 능력을 검증하고 노동의 대가를 현물로 받음으로써 생존을 담보하였다.
현대는 복잡한 상황들이 얽혀있다. 지역, 학력, 기업, 자격증 등. 노동의 대가인 임금을 정하는 요소들이 더 많아졌다. 동일한 경력을 가졌어도 임금은 천차만별이다. 그래서 최소한의 기준을 정한 최저임금이라는 제도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제도는 제도일 뿐인 것 같다. 노동을 구하는 사람들은 오랜 기간 교육과 훈련을 통하여 자신의 능력을 키웠지만, 또 고용을 위해 노동을 구하는 쪽에서는 그러한 능력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이 불일치의 경계선에 ‘숙련’이라는 개념이 있다. 인간 세상의 모든 노동에 대하여 단 하나의 기준으로 정리될 수 없는 ‘숙련’이라는 개념은 고용하려는 기업들과 노동을 제공하는 사람들에게 다르게 받아들여진다. 기업은 '스펙 기반의 미숙련'으로 평가하고 싶어 하고, 노동자는 '경험 기반의 숙련'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기업가들의 자기 합리화를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직업 또는 노동을 통한 ‘자아실현의 욕구’라는 논리는 늘 직장인을 괴롭힌다. 노동과 자아실현이라는 두 가지를 동시에 추구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고, 쉽지 않으며, 소수의 사람만이 도달할 수 있는 차원일 뿐이라고 애써 아쉬움을 토로하곤 한다. 모든 노동자가 직업을 통해 자아실현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해 줄 위대한 현자는 영원히 나타나지 못할 것이다. 모든 사람의 자아실현 욕구의 충족은 사회시스템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이는 각 개인이 스스로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그렇다고 무기력하게 세상에 끌려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가 무기력하게 끌려가는 것은 도대체 자아실현의 모습은 어떤 것인지에 대한 나름의 생각이 정리되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 그렇지 않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들도 있다.
한자 성어가 포함된 고전을 읽을 때 매우 유의해야 할 것은 결과에 대한 평가라는 점이다. ‘기록’이라는 단어가 원초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것은 ‘과거의 것을 새긴다’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내가 과거의 기록물들을 읽을 때는 내게 필요한 것을 신중하게 검토해야 한다. 현대사회가 말하는 직업을 통하여 자아실현을 하는 모습을 과거에서 찾아보려면 노동에만 집중해 볼 필요가 있다.
자아실현의 욕구를 노동으로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다른 시선이 필요하다. 단순히 생존을 위한 필요성에서 벗어나 볼 필요가 있다. 노동을 생존 그 자체와 연결하는 시선이 요구된다. 노동이 생존 그 자체가 되려면 생명체의 본성에 연결되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노동은 ‘움직임에 힘씀’이라는 해석이 적절하다. 모든 생명체는 ‘이로움을 추구하고 해로움은 회피하는 움직임’으로 생존에 대처한다. 이 움직임은 어느 한 시기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일생과 흐름을 같이한다. 흐름이 끊기면 모든 것은 끝이다.
고인지조백(故人之糟魄)
‘윤편’은 흔히 사람 이름으로 혼동하지만 바퀴를 깎고 맞추는 일이다. ‘숙련’이나 ‘전문가’라는 단어의 의미가 노동 시장의 '가치 평가 기준'이라는 핵심적인 사회적 개념으로 격상된 것은 근현대 산업화 이후의 일이다. 이 점이 한자 성어의 배경을 이해하는데 혼란을 가져오기도 한다. 장자는 노동이 삶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노동을 지배한다고 하였다. 그는 ‘천지가 나에게 형체를 주어 나를 부지런히 힘쓰게 하고, 삶을 주어 나를 편안하게 하고, 늙음으로써 나를 멈추게 하며, 죽음으로써 나를 쉬게 한다.’라고 하였다. 인간이 삶에서 얻을 수 있는 차원을 모두 나열했다. 인간이 삶에서 얻을 수 있는 차원은 자신만이 느낄 수 있다.
수레바퀴를 깎는 노인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제(齊)는 고대 중국에서 강력한 나라 중에서도 손꼽히던 나라였다. 그러한 나라의 통치자 환공은 당시 가장 강력한 패자였다. 환공이 책을 읽고 있는데 수레바퀴 깎는 노인이 말을 건다. 창작한 이야기임에 틀림이 없는데 장자는 왜 통치자와 하찮다고 평가받는 수레바퀴 깎는 노인을 등장시켰는가? 지식과 이성으로 생각한다 해도 의문을 가져야 한다. 수레바퀴 깎는 기술자가 감히 통치자와 한자리에 있을 수 있으며 통치자가 먼저 물은 것도 아니고 수레바퀴 깎는 기술자가 먼저 말을 걸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장자의 의도는 무엇일까? 극과 극의 신분들을 등장시킴으로써 극적인 효과를 노렸다고 한다면 장자가 이야기하려는 극적인 내용은 무엇인가? 이 지점에서 지혜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고전을 읽으면서 아쉬운 점은 이성적인 설명이 모호한 곳에서는 거의 지혜라는 말로 설명을 대체한다는 것이다. 어떠한 사람도 그 지혜가 어떤 것인지는 설명하기는 불가능하다. 지혜의 사전적인 정의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념적인 지혜가 아니라 실제적인 지혜는 개인의 의식 안에서 이루어지기에 사람들은 개인적인 지혜는 지혜로 보지 않고 개인적인 느낌으로 치부한다. 모든 사람이 고전을 읽고 지혜를 얻지만 통상적인 지혜로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지혜란 생존의 기술로 일구어가는 삶의 동반자라고 생각한다. 장자가 통치자와 수레바퀴 깎는 기술자를 동반 등장시킨 것은 이런 의도로 보인다. 통치자의 지혜와 수레바퀴 깎는 기술자의 지혜는 각자의 삶을 영위하는 도구일 뿐이다. 남들이 한 이야기가 모두에게 적용되는 지혜가 될 수 없다는 전제를 한 것이 아닌가 한다. 성인들의 이야기를 읽고 있는 통치자에게 그것은 찌꺼기와 같다고 하는 말은 수레바퀴 깎는 기술자에게는 생존을 건 저항이었다. 통치자가 무시무시한 권력으로 생존을 무력화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장자가 제나라 환공을 존경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수레바퀴 깎는 기술자의 말을 들어보는 것으로 이야기를 끌고 간다. 그런데 찌꺼기와 함께 쓰인 한자는 백(魄)이다. 이 글자의 뜻은 ‘넋’이라는 뜻으로도 사용된다. 넋은 물리적으로는 이미 존재하지는 않으나 영혼적으로 무엇이 어렴풋한 것이다. 옛사람들의 말은 찌꺼기이지만 어렴풋한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다. 성인들이 전한 말을 적어 놓은 글은 찌꺼기이지만 그 속에 있는 가물가물한 무엇인가를 찾아내는 것은 글을 읽는 사람의 몫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옛사람들의 이것을 찾아내어 나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 지혜임을 강조한 것이다. 이미 육체적 차원의 기술 단계를 넘어선 수레바퀴 깎는 노인은 어떤 지혜를 얻었는가? 바퀴를 깎을 때 구멍을 넓게 깎으면 헐렁거려서 꽉 끼이지 않고, 구멍을 좁게 깎으면 빡빡해서 들어가지 않는다. 이것은 미숙련자가 흔히 하는 일이다. 숙련자가 되는 것은 이러한 작업을 수없이 반복하면서 본인의 머리와 손의 느낌, 힘의 조절 등 많은 육체적 통제를 통해서만이 달성할 수 있다. 현대의 기계문명이 소외시킨 것은 인간의 노동이 아니라 노동하면서 얻게 되는 인간의 영감들이다. 컴퓨터 기술이 앗아간 것도 이런 맥락일 것이다. 수레바퀴 깎는 노인은 오랜 세월 동안 기술을 다루면서 헐렁하지도 빡빡하지도 않게 수레바퀴를 깎게 되었다. 숙련 기술자로서 전문가가 되었다. 그런데 그 기술을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고 70살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수레바퀴를 깎고 있다. 수레바퀴 그는 단순히 숙련된 전문가의 차원이 아니라 어떤 경지에 도달했음을 보여준다. 꼭 맞는 수레바퀴를 깎는 기술을 전해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전해주지 못함을 알았다. 기술을 전수하지 않음과 전수하지 못함의 차이를 아는 것에 지혜가 담겨 있다. 70세의 고령임에도 수레바퀴를 꼭 맞춤하게 깎을 수 있는 기술을 말이나 글로써 전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이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자신 손끝에 모이는 미묘한 감각과 몸의 힘을 운용하는 미묘한 느낌, 그런 것을 통제하는 마음은 오직 그 순간 자신만이 가지는 고유한 느낌이므로 자식에게 조차도 전해줄 수가 없다고 하였다. 요즈음 말로 하면 수레바퀴 깎는 사업이나 기술을 물려줄 수는 있으나 꼭 맞춤의 솜씨는 전해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경지에 오르는 것은 순전히 개인의 노력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장자는 조(糟)와 백(魄)이라는 글자를 동시에 써서 옛것이 모두 찌꺼기라는 억지를 희석하였다. 어쩌면 인류의 문명은 찌꺼기의 무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인류가 문명을 유지 발전시킨 것은 찌꺼기 속에 남아있는 넋을 찾아내어 활용하는 지혜가 있었기 때문이다.
직장생활은 결코 쉬운 생활이 아니다. 그렇다고 하지 않을 수는 없다. 항간에서 하는 말로 어쩔 수 없다면 즐기라는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에게 집중하여 자발적 고립을 감내해야만 한다. 이는 독불장군으로 살아가라는 말이 아니다. 장자는 수레바퀴 깎는 미천한 신분의 직업을 등장시켜 자발적 고립을 감내했을 때 도달하게 되는 인간 영혼의 모습을 그려주고 있다. 그 모습이 모든 이에게 절실하지는 않을 것은 명확하다. 당시 제나라의 강력한 통치자를 등장시킨 것은, 인간의 자아실현이라는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통치자의 행위마저도 바꿔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서 옳다고 하고, 좋다고 하며, 바르다고 하는 것이 개인들의 영혼을 성장시키는 것이 아니고 오로지 자신이 자신의 영혼을 성장시킨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포정해우(庖丁解牛)
다시 미숙련의 상태로 돌아가서 장자의 조백을 들춰보자. 문혜군의 포정이 소를 잡았다. 여기서 ‘군(君)’은 명칭만이 다를 뿐 최고 통치자이다. 포정은 짐승을 잡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수레바퀴 깎는 기술자 이야기에 나온 미천한 신분과 높은 신분을 대비시킨 구성과 차이는 없다. 어쨌든 일상적인 상황이라면 두 사람은 죽을 때까지 만날 일이 전혀 없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만나게 한 것은 장자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장자가 말했듯이 듣는 사람이 조백을 넘어서는 무엇인가를 찾아야 한다.
조백을 조백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그 지점에 지혜가 있다는 뜻이다. 문혜군이 소를 잡는 기술자의 작업장에서 소를 해체하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 소를 잡는 사람은 자신의 미숙련 노동 시절을 이야기한다. 처음에 그는 소가 온통 통째로 보였다고 했다. 현대에도 처음 직장에 출근하면 이와 같은 상황에 긴장하게 된다. 자신의 주위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업무로 압박하는 느낌은 기분 좋은 기억은 아니다. 하나의 미숙련 단계는 누구나 극복하고야 만다. 그러나 그 노동에서 숙련의 단계로 발전되는 것은 개인의 몫이다. 소를 해체하는 기술자는 3년이 지나자 더 이상 소가 통째로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이때부터 대상이 구조로 분해된다. 힘보다 이해가 개입된다. 눈으로 보기보다 머리로 판단한다. 숙련이 시작되지만, 여전히 의식적 판단의 단계이다. 소를 잡는 기술자는 자신의 숙련도로 삶을 살피기 시작한다.
항간에 떠다니는 말 중에 3개월 3년이라는 말이 있다. 입사 후 3개월, 3년이 되는 시점에 갈등이 생긴다는 의미다. 입사 후 3개월은 직장에서 정신없이 업무를 배우고 익히는 기간이다. 소위 수습 기간이다. 이 시기에 자신의 모든 긴장은 직장이라는 큰 모습에 쏠려있다. 그렇게 3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면 직(職)을 수행하면서 쌓인 긴장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직(職)은 나의 외부에서 부여되기에 개인의 욕망과 무관할 수도 있다. 사회적 역할과 위계가 따르기에 대체 가능성이 전제된다. 그래서 직은 이 자리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규정이다. 업(業)은 나의 내부에서 형성된다. 시간과 숙련이 필요하다. 대체 불가능한 흔적을 남긴다. 몸과 마음의 습관으로 축적된다. 그래서 내가 살아온 방식의 압축파일이다.
직과 업이 항상 일치하지는 않는다. 3년 정도의 시간 동안 자신의 삶인 업(業)과 생존 수단인 직(職)의 불협화음에 시달리게 된다. 한편에서는 직무는 수행하지만 그 안에 나만의 결이 쌓이지 않는다. 속절없이 시간은 흐르지만 숙련은 남지 않는다. 그러면 탈진이 온다. 다른 한편에서는 능력과 숙련은 쌓였으나 이를 드러낼 자리가 없다. 외부 제도와 내면인 삶이 어긋난다. 불안정한 노동이나 프리랜서의 고통, 농부의 불확실한 결과가 여기에 가깝다. 이 긴장과 갈등은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과 내가 반복해 온 삶의 방식이 충돌하는 지점이다. 이 시기를 견디지 못하면 다른 직장을 찾아서 떠난다.
포정이 어떻게 이 시기를 넘겼는지에 대한 언급이 없는 점이 늘 아쉽기는 하다. 어쩌면 장자의 의도는 그것을 찾아내는 것이 삶이라는 메시지를 던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갑자기 포정은 도를 이야기한다. 그는 말한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기술을 넘는 것이다.” 그것을 도라고 한다. 기술(技)은 반복과 연습의 산물이며 도(道)는 사물의 이치와 나의 움직임이 어긋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즉, 포정은 능숙한 노동자가 아니라 자연의 질서라는 흐름에 자신의 몸의 흐름을 맞춘 인간이다.
포정이 말하는 도를 얻게 된 경위 속에서 삶에 대한 지혜를 얻는 것은 오롯이 개인의 몫이다. 포정은 자신이 19년 동안 수천 마리의 소를 잡았지만 새것 같다고 했다. 이유는 단순하다. 살을 자른 것이 아니라 이미 열려 있는 틈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라고 했다. 날카로운 것이 빈 곳에 들어가면 반드시 여유가 있다. 삶의 마찰이란, 대부분 막힌 곳을 억지로 통과하려 할 때 생긴다. 포정은 말한다. ‘막히는 곳에 이르면, 나는 반드시 멈춘다.’ 성급하게 밀어붙이지 않고 구조를 다시 살피고 나서 움직인다. 포정은 흐름으로 채우고 멈춤으로 비워내면서 삶은 속도가 빠른 삶이 아니라, 멈출 줄 아는 삶이라야 한다는 흐름을 체득했다.
이 이야기가 실린 편명인 ‘양생주(養生主)’는 삶을 기르는 주된 길로 읽힌다. 여기서 우리는 생을 기른다는 것은 오래 사는 기술이 아니라 마모되지 않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태도다. 칼이 상하지 않듯, 사람의 몸과 마음도 결을 거스르지 않으면 소모되지 않는다.
노동을 직업이 아닌 ‘움직임에 힘씀’으로 이해하면 외부가 제시하는 과잉을 버리고 내면의 흐름에 맞는 방식을 찾는 태도를 견지할 수 있다. 삶을 억지로 설명하기보다, 결을 읽는 감각을 중시하는 태도로 자기 삶을 해체하지 않고 나다움으로 흐를 수 있는 인간이 될 수 있다.
백락일고(伯樂一顧)
직(職)은 맡겨진 자리이며 사회가 부여한다. 업(業)은 반복된 삶의 흔적으로 시간을 통해 내가 만든다. 그래서 어느 순간 최고의 능력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현대의 전문가라는 평가와는 조금 뉘앙스는 다른 것 같다. 오히려 달인이라는 평가가 더 적절하다. 백락을 달인이라고 할 수는 있다. 그렇다고 그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자아실현의 욕구를 충족하였는지에 대한 의문은 있다. ‘한 번 돌아본다(一顧)’에 담긴 일화는 그의 명성을 높이기는 하였지만 내면의 떳떳함까지 확보했는지는 알 수 없다. 어떤 사람이 말 한 마리를 시장에 내놓았다. 그는 훌륭한 말이라고 자부했지만 팔리지 않았다. 백락의 명성을 알고 있던 상인은 쉬운 부탁을 하나 한다. 다음 날 아침에 자신의 말을 지나쳐 가다가 한번 돌아봐(一顧) 달라고 했다. 백락은 상인의 부탁대로 해 주었다. 일은 그렇게 되었고 상인의 말은 좋은 가격을 받고 팔렸다.
자아실현이라는 차원은 떳떳함이 기본이다. 이 떳떳함은 오롯이 내면의 흐름이다. 백락이 상인의 말(馬)이 정말 훌륭해서 돌아보았다면 떳떳함은 확보되었으나 그렇지 않다면 백락은 명성을 이용한 꼴이 된다. 백락에게 자아실현이란 더 좋은 ‘직’을 얻는 것이 아니라, 어떤 ‘업’을 남기며 살아갈 것인가를 스스로 납득하는 일이어야 한다. 이때 직은 바뀔 수 있고 내려놓을 수도 있지만, 업은 몸에 남아 다음 삶의 국면으로 이어진다. 업이 유지되려면 본성을 살펴야 한다. 이로움을 추구하고 해로움을 회피하려는 본성으로 자신의 흐름을 가꾸어 나가는데 직업은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그리고 직업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는 ‘움직임에 힘쓴다’는 노동의 근원적 의미를 간직하는 것이다. 움직임에 힘쓴다는 생각이 내면에 머물게 되면 직을 수행하는 움직임에도 업을 쌓아가는 움직임에도 힘을 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