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다움으로 서는 사유

함량(含量)과 함양(涵養)

by 김기황

물리적 함량(含量)이 언제부터 사람의 관심사가 되었는가? 수렵·채집 사회에서 사람의 관심사는 거의 전적으로 존속에 놓여 있었다. 이 시기에 사람들은 오늘, 무엇을 먹을 수 있는가? 오늘, 이 밤을 무사히 넘길 수 있는가? 에 집중되었다. 오로지 생존이라는 명제 앞에서 ‘얼마나 들어 있는가?’라는 질문이 개입할 여지는 없었다. 결과는 언제나 있음과 없음, 살아남음과 죽음의 이분법이었기 때문이다. 함량(含量)은 여유와 비교를 전제로 하는 개념이다. 생존 그 자체가 임계치인 사회에서는 함량이라는 개념이 자랄 토양이 없다.

함량이 인간의 관심사가 되기 시작한 결정적 계기는 잉여의 발생이다. 농경과 저장 기술, 분업이 가능해지면서 사람은 처음으로 이렇게 묻기 시작했다. ‘이것은 얼마나 오래가는가? 이것은 얼마나 충실한가? 같은 물체인데 왜 결과의 내용이 다른가?’ 이때부터 사람은 채집물이나 생산물의 내용을 비교하기 시작했다. ‘무엇인가?’라는 물음에서 ‘어떤 것이 얼마나 들어있나?’라는 질문으로 바뀌었다. 처절한 생존에서 벗어난 여유가 비교의 언어를 만들어냈다. 그래서 함량(含量)은 결핍의 언어가 아니라, 여유의 언어이다. 사람들은 생존 과정에서 겪은 ‘양(量)에서 질(質)로’의 변화를 실체가 없는 정신의 영역에 녹여냄으로써 인간적 사유의 길에 오솔길을 하나 더 추가하게 된다.

동아시아 사유에서 함량은 비교적 이른 시기에 질의 문제로 전환된다. 공자는 죽음에 관한 질문에서 ‘사는 것’도 잘 모르는데 ‘죽음을 어찌 알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많이 앎’이 아니라 ‘깊이 앎’이었다. 인류는 삶에 대한 다양한 사유를 만들어냈다. 자신의 삶을 정해놓고 시작하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삶에 대한 정의는 가장 단순해야 한다. ‘살아가는 일’이라는 정의에는 여유가 끼어들 틈이 없다. 태어난 이상 살아가야 함을 알게 되는 순간 여유가 비집고 들어온다. 삶이란 생명체가 가진 본성의 보편성을 기반으로 시작한다. 이 기반 위에 각각의 천성을 조화시켜 개성이라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길고 긴 여정이다. 따라서 죽음이라는 결과에 관해 묻는 것은 ‘많이 알려는 앎’이다. 삶을 결과보다는 과정으로 헤아리는 여유가 생길 때 다양함이 보인다. 다양함에는 깊이의 앎을 위한 여유가 있다. 공자는 생존하기 위해 많은 일들을 겪었다. 세상은 그를 ‘상갓집의 개’로 혼란한 시대를 비판하는 ‘기린과 봉황’으로 그리고 ‘성인’으로 평가했다. 그는 긴 여정의 고단한 삶에서 ‘깊이 앎’을 지향하였고 마침내 마음 가는 대로 행해도 법도를 넘지 않게 되었다. 자연의 자유 속에서 자신의 질서를 세워 나다움으로 흐르고 있다.

노자에게서 중요한 것은 많은 ‘채움’이 아니라 깊이를 위한 ‘비움’이었다. 그러나 단선적 비움이 아니라 채움과 비움의 중첩으로 비워냄이다. 유(有)는 채움이고 무(無)는 비움이다. 유무 상생은 ‘양에서 질로’에 녹여낸 인간 사유의 또 다른 모습이다. 노자의 도는 물처럼 흐르다 머물고 다시 흐른다. 공성이 불거(功成而不居)는 의지가 개입되지 않고서는 실행할 수 없다. 이는 함량(含量)을 단순한 축적이 아니라, 내면화의 정도, 삶에 스며든 깊이, 행위와 존재의 일치도로 이해하기 시작했음을 뜻한다. 이 시점에서 함량은 물질을 넘어 인간의 품격과 노동의 밀도를 가늠하는 기준인 함양(涵養)이 된다. 함양은 ‘무엇인가?’와 ‘얼마나 있는가?’를 동시에 물어야 하는 조용하지만 무거운 물음이다. 그래서 나다움으로 서기 위한 침묵의 질문이 된다.

근대 산업사회 이후 함양(涵養)은 다시 양의 언어로 환원된다. 인류는 보이는 관계 속에서 살다가 보이지 않는 관계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상황에 빠졌다. 공동체 정신의 발명은 경쟁과 생존을 동시에 품은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보이지 않는 관계 속에서도 살아가야 하는 공동체 정신의 뿌리는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다. 그 뿌리는 단단하게 박혀야 했으나 역사는 인류의 정신이 이런 방향으로 흐르지 않았음을 새기고 있다. 전통적 공동체에서는 보이는 관계가 경쟁을 억제했다. 내가 경쟁에서 이겨 이웃을 굶기면 나의 생존 환경도 나빠진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그 직관은 함양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이 연결고리를 끊어버렸다. 인격을 갖추기보다 능력의 강화에 목표를 둔다. 내면으로의 침잠보다는 외연의 확대가 과정이 된다. 안목의 변화보다는 점수의 획득으로 결과를 대신한다. 스승의 직관과 내삶의 궤적에 의한 평가를 통계적 수치에 의한 객관적 평가가 대신한다. 스펙의 함량, 성과의 함량, 생산성의 함량. 이때의 함량은 삶을 채우는 지표가 아니라, 삶을 비교·관리하는 도구로 기능한다. 우리는 경험에 얽매이고 경력에 몰두한다. 객관화는 자기 검열이라는 족쇄가 되어 성찰보다는 반성에서 벗어나기 어렵게 하고 있다. 객관화에서 현대인이 느끼는 공허는 함량(含量)의 부족이 아니라, 함양(涵養)이 스며들 수 있는 길을 잃었기 때문이다.

함량(含量)은 사람이 생존을 넘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기 시작한 순간부터 사람들의 관심사가 되었다. 왜? 이런 질문이 나왔는가? 생명체는 ‘이로움을 추구하고 해로움을 회피하는’ 보편적 본성을 지녔다. 채집에 의존하던 결핍에 농경과 저장이라는 여유가 흐르면서 사람인 생명체의 본성에 균열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로움의 추구를 해로움의 회피로만, 해로움의 회피를 이로움의 추구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어느 쪽이나 공동체에 불편함을 주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도 본성의 금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로움의 추구와 해로움의 회피인 본성을 헤아리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자신에게 이로운 것을 줄이고 해로움의 회피를 감내하는 태도들이 노출되었다. 동물인 사람들 사이에서 새로운 사람들이 나타났다. 함께 살아가는 공간에서 사람들의 선한 영향력의 발산은 신선한 충격이자 혼동이었다. 동물의 본능에 충실하였던 사람들은 이 현상을 설명해야 했다. 사람들은 이 현상을 설명하지 못하면 동물로 살아가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렸다. 그래서 공동체 정신의 발명은 경쟁과 생존을 동시에 품은 획기적인 사건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고 사람들 사이의 일들을 합하여 인간(人間)이라는 종을 탄생시켰다. 생존과 경쟁을 동시에 품었기에 공동체의 구성원은 서로 기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공동체의 공간은 물리적 실체보다는 기대어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의 ‘무엇을 위해’와 ‘어떻게’를 담아내야 했다. 인간이라는 종은 별도의 구별을 위한 목적이 아니라 공동체 정신의 뿌리를 단단하게 하려는 사람들의 함양이 만들어낸 따뜻함이 깃들어 있다.

인간들에게는 이로움을 추구와 해로움의 회피에 함량(含量)이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물리적 실체의 성질을 새로운 종족인 인간에게 적용할 수 없었다. 새로운 기준에는 존경과 신뢰를 담아야 했다. 그래서 자신의 본성을 살피고 타인의 본성을 헤아리는 과정에 녹아있는 따뜻함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야 했다. 그래서 함량(含量)은 함양(涵養)을 낳았다. 한자 함(涵)은 많은 뜻이 있다. ‘젖다, 적시다, 담그다, 넣다, 받아들이다, 잠기다, 가라앉다’ 등이다. 이러한 의미를 인간에게 부여한 사람들은 양(量)이란 뜻을 추가하였다. 이미 인간에게는 ‘헤아린다’는 의미가 부여되어 있었지만 ‘길이, 좋다’를 보강하여 주었다. 보통 사람들은 힘들어했지만 후대 사람 중에는 함양의 뜻을 확충해 나갔다. 이 인물들이 공유하는 함양의 핵심은 빠른 성취를 경계한다. 의지적 단련보다 시간과 반복을 신뢰하며 사유가 인격으로 스며드는 과정을 중시하며 드러남보다 버팀과 지속을 가치로 두는 고뇌를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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