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도구를 보는 시선
일상에서 작은 관심만으로도 자신의 태도나 행동의 흐름에 변화를 줄 수 있는 도구들이 있다. 이 글에서 말하는 도구란, 삶의 흐름을 인식하고 조정하게 만드는 사유의 매개다. 도구의 선택에 획일화된 기준은 없다. 도구의 의미를 부여하는 획일화된 기준도 없다. 기준이란 단어에는 함정이 있다. 어떤 선택이든 책임은 따르게 마련이다. 설사 튀어 오르거나 자유로이 떠다니다 낙하하는 식물의 씨앗이 선택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책임은 져야 한다. 인간은 선택의 책임에 무게가 실리면 본성의 지배보다는 이성의 유혹에 흔들린다. 바로 ‘해로움을 회피’하려는 본성을 ‘이로움을 추구’하는 의지로 포장하려 한다. 단세포 생물인 아메바는 이로움의 추구와 해로움의 회피가 분리되지 않고 생존과 직결된다. 즉 이로움의 추구가 동시에 해로움의 회피가 되어야 생존이 가능하다. 이 생물에게 이로움의 크기와 해로움의 강도는 인간에게는 미미하지만 그들에게는 전부다. 나무의 수관 현상도 해로움의 회피가 생존과 직결되는 자연의 섭리다. 나무는 아메바에 비해 이로움을 추구할 수 있는 여유가 있지만 해로움을 회피할 여유는 없다. 인간의 의지로 인해 뿌리째 뽑히기가 일쑤다. 그래서 수관 현상은 엄밀히 말해본다면 본성이 작동하는 범위 안에서 생존한 결과가 형상으로 남은 현상이다. 이러한 생명체들의 본성에 대한 이해는 과학이라는 도구의 등장으로 가능해졌다.
인간은 이러한 본성의 발현을 주어진 상황에 적응한다는 관점을 가진다. 그러나 인간은 선택에는 의지가 개입된다는 점에서 다른 관점을 갖는다. 인간은 본능에 충실함으로써 생존하는 존재와는 다른 존재임을 알고 있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설명하지 못하면 못 견뎌하는 동물이다. ‘사람은 동물이다’라는 서술은 생존 전략이 본능의 충실함에 있다는 표현이다. ‘본성의 본능을 따르는 나는 어떤 존재인가?’를 묻는 의지를 가진 사람을 인간이라 한다. 인간의 시선을 만들어내는 도구는 아주 많다. 도구를 많이 아는 것보다는 하나의 도구라도 ‘깊이 앎’의 태도가 일상에서 작은 관심만으로도 자신의 태도나 행동의 흐름에 변화를 줄 수 있다.
기준은 그중의 하나일 뿐이다. 사람은 자신의 선택에 의지가 개입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선택에 대한 책임이란 기준의 선택에 대한 책임이라고 믿는다. 그러면서 기준의 선택으로 기준을 정했다고 착각한다. 선택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을 고르는 행위이며 정한다는 의미는 새롭게 만들어내는 행위이다. 엄밀히 말해서 기준 선택이라 부르는 행위는 실은 기준 채택이며, 시간이 지나면 기준의 내면화로 오인되어 의지가 개입되었다고 착각한다. 그래서 외부에서 만들어 놓은 기준을 충족시키기 위해 바쁘게 살아간다. 그러나 자신의 의지가 기준의 설정에 개입되지 않았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 혼란은 찾아온다. 사람들은 기준을 정했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도덕·윤리·규칙이라는 외부 기준을 채택한다. 그 누적된 결과를 질서라고 부른다. 그래서 질서는 보이지 않는 무게가 실려있다. 질서의 무게는 사람의 무의식에 자리하기에 의지가 개입되기 어렵다. 자연이라는 질서는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무게로 흘러간다. 사람은 자신의 의지로 살아간다고 믿지만 무의식은 흘러가는 자연스러움을 선호한다. 흐름의 근원에 궁금증이라는 시선을 보내려는 의지를 드러내는 사람을 인간이라 한다.
현대 사회는 기준을 요구하지 않고 제시한다. 기준의 제시에는 함량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기에 도구가 된다. 제시되는 기준은 보이지 않는 강요로 작동되기도 한다. 그러나 요구하는 기준은 내용에 대한 요청이어서 생각이 들어갈 틈이 있다. 비슷한 맥락이지만 둘을 구분하는 시선이 있다면 함양으로 스며들 수 있게 된다. 호랑이, 원숭이, 토끼, 사람은 포유류라는 기준에서 분류된다. 이 기준은 지식을 생산하기 위한 기준이다. 그래서 기준의 1차 목표는 이해가 된다. 기준을 설정하는 것 자체도 지식이지만 통합된 기준도 지식이 된다. 다만 통합된 기준으로 생산된 지식은 더 넓고 깊은 앎을 위한 도구로 작동한다. 그래서 모든 지식은 이해를 위한 도구가 된다.
현대 사회에서 끊임없이 생산되는 지식은 세상 이해의 폭을 넓혀준다. 그러나 지식이 이해의 도구로만 작동하지는 않는다. 지식이 강요된 기준으로 작동하면 스펙, 성과, 생산량에 관심이 쏠린다. 이러한 경향은 인류에게 닥친 새로운 생존 환경이다. 인류는 채집 시대의 결핍을 농경의 여유로 채웠다. 물리적 여유에서 나온 함량은 정신적 결핍을 채우는 함양으로 전환됐다. 현대 사회의 결핍은 과학이 생산하는 지식이 채운다. 이렇게 채워진 지식은 홍수가 되어 현대인의 생존 환경을 곤란하게 한다. 생존 환경에 등장하는 역설은 모습을 바꿀 뿐이다. 경험과 경력, 목표나 목적, 업적은 지식이 토대가 되어 결핍을 여유로 전환시킨다. 지식이 기준에 머물게 되면 이 전환은 족쇄가 되는 역설이 생긴다. 지식은 기준을 만들고 기준을 채택한 우리가 선택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무게에 짓 눌리고 말기 때문이다. 인류가 생존 경쟁의 공동체에서 함량을 함양으로 전환한 지혜를 이 시대에도 작동해야 한다. 기준을 도구로 작동시킬 수 있는 함양은 고르는 채택이 아니라 만드는 선택에 집중한다. 그래야 개인이 자신의 개입에 대한 책임을 수용할 수 있다. 비로소 지혜의 숲에서 자신만의 오솔길을 찾게 된다.
동서양의 지혜에 대한 정의, 개념의 표현은 다르다. 그러나 내삶의 질을 변화시키려는 근본적인 성찰이라는 맥락은 같다. 그 이유는 지혜는 인류 역사에서 동서양의 가장 혼란한 시기에 자신을 돌보는 과정에서 산출된 정신문화이기 때문이다. 같은 상황에서 다르게 볼 수 있었던 사람들의 공통점은 자신의 길을 걸어갔다는 선택과 책임을 지겠다는 의지가 개입되어 있다. 따라서 다르게 보는 함양은 지혜를 얻는 토양이다. 그래서 인류의 정신문화들 속에서 함양은 다르게 봄으로써 변화를 주도하는 힘을 얻게 하는 도구가 된다. 노동도 함양의 유용한 도구가 되는 이유다.
노동을 목적이 아닌 도구로 보는 시선을 만들어 보자. 노동은 기준을 채택하는 함량에도 기준을 선택하는 함양에도 중요한 도구가 된다. 강요된 기준을 채택한 노동에는 스펙, 성과, 생산량의 생존 환경이 보인다. 요청된 기준을 선택한 노동에는 성숙, 흐름, ‘나’다움의 무늬가 그려진다. 함량의 노동이 함양의 노동이 되려면 흐름의 시작에 시선을 보내는 의지가 필요하다. 그래서 노동은 ‘움직임에 힘씀’으로 재정의 된다. ‘움직임에 힘써야’ 아메바는 생존할 수 있다. 나무의 본성에도 ‘움직임에 힘씀’이라는 노동의 본질은 녹아있다. 노동을 ‘움직임에 힘씀’으로 재정의하려는 시도는 함량 개념을 삶의 체감이 가능한 밀도로 되돌리려는 작업이다. 함량은 원래 성과의 문제가 아니라, 삶이 몸에 남기는 무게의 문제였다. 인간은 움직임에 힘쓴(노동) 흔적의 무게를 설명해야 한다. 함양을 도구로 작동시키려는 의지를 일으켜야 한다.
함양(涵養)은 스스로를 담그고 기르며 기다리는 흐름이다. 측정 불가능하고, 외부 평가 이전에 내적 변화를 전제로 하며, 과정 중심적이다. 즉, 함량은 상태이고, 함양은 그 상태에 이르는 시간과 태도이다. 이 흐름에 노동의 투입은 절대적이다. 그런데 온갖 부정적인 느낌의 포장을 벗겨내지 못하면 정말 ‘노동의 소외’를 겪게 된다. 그래서 노동은 이 흐름을 유지하는 도구로 작동해야 한다. 물리적 실체의 함량이 정신적 함양이 될 때 양적 지표를 벗겨낼 수 있다. 그래야 함양은 성과의 총량이 아니라 삶에 스며든 밀도이자 노동 이후 남는 무게를 가리키는 확장된 뜻이 될 수 있다. 함양(涵養)은 함량이 생겨나는 유일한 길이며, 함량은 함양의 흔적이다. 함량은 결과처럼 보이지만, 그 본질은 언제나 시간을 견딘 흔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