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량(含量)에서 함양(涵養)으로
우리의 손끝에는 언제나 ‘무엇’이 묻어있다. 그리고 내몸에는 언제나 ‘어떤’이 새겨지고 있다. 모두가 ‘무엇’으로 목표를 정하고 바쁘게 두리번거린다. 그러면서 ‘어떤’이 내몸에 어떻게 남는지는 관심이 덜하다. 나폴레옹의 ‘프랑스어에는 불가능이란 단어는 없다’는 말이 우리에게는 어째서 ‘나의 사전에는 불가능은 없다’는 말로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한 번도 던져진 적이 없는 질문 하나. 그의 말에서 사전은 사전(辭典)인가? 사전(事前)인가? 전자는 이미 규정된 의미의 집합인 ‘무엇’에 닫혀있기에 두껍고 후자는 아직 규정되지 않은 태도의 준비라는 ‘어떤’에 열려있기에 두터워질 수 있다.
우리는 많은 시간 동안 무엇인가를 배우는 데 몰두했다. 그 배움은 닫혀있다. 닫혀있는 배움은 눈을 가린 채 경기장을 달리는 경주마처럼 끊임없이 채우기를 강요한다. 채움만으로 이어지는 일상은 위험하다. 이 경고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져 오고 있다. 특히 동양에서는 노자가 유의 채움과 무의 비움으로 자신의 삶을 살았고, 주역은 양의 드러남과 음의 숨김으로 위험에 빠지는 인간에게 관심을 보였다. 이렇듯 동양 사유는 언제나 채움의 능력보다 채움 이후의 태도를 문제 삼아 왔다. 현대인의 삶이 배움으로 가득 차 있는 이유를 설명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핵심은 새로운 생존 경쟁 환경이 도래했다는 것이다. 폭발적인 인구 증가와 비슷한 능력을 가진 구성원이 살아가는 공동체는 더 이상 이상향을 꿈꾸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한다. 그래서 채워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외침은 늘 관심의 주도권을 가진다. 더 단단히 서기 위해서는 채움과 비움의 조화가 필요하다는 조언은 무시되기 일쑤이다. 아니 관심은 차치하고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그런데 동아시아 사유에서는 채움과 비움의 조화가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배움과 채움을 연결하는 사전(辭典)의 단어는 ‘관심’이다. 함량(含量)이 함양(涵養)으로 가기 위해서는 관심이 개입된다. 인류는 채집, 수렵의 생존 환경에서 농경으로 이룩한 잉여의 생존 환경에서 비로소 함량에 관심을 가졌다. 따라서 함량은 여유의 언어다. ‘무엇’이 들어 있나? 는 질문에는 먹을 수 있나? 와 먹을 수 없는가?로 나누어진다. ‘어떤’ 것이 들어있나?라는 질문에는 더 많은 것을 답해야 하는 고뇌가 따른다. 극심한 생존 환경에서 사람들은 먹을 수 있는 ‘무엇’에만 관심을 기울이면 되었다. 먹을 수 있는 것들이 남아돌면서 사람들은 ‘어떤’ 먹을 것인지로 시선이 옮겨졌다. 이제부터는 눈앞의 먹거리는 단순하지 않게 된다. 그 먹거리의 모양, 색깔, 맛 등이 먹는다는 행위보다 먼저 고려되기 시작한다. 먹는다는 본능적 일상에서 벗어나 어떤 것을 왜 먹는지를 설명해야 하는 이성적 일상으로 변했다. 인간의 먹거리에 대한 관심은 함량이라는 개념을 발명했다.
함량(含量)이라는 개념의 발명으로 인간은 보이지 않는 것을 계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생존을 운에 맡기지 않고 기술을 개발하여 문명을 이루어 냈다. 함량이 경제를 가능하게 한다는 인식은 공동체의 안정에 절실한 도움이 되었다. 치명적인 과잉과 치명적인 결핍을 구분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생존의 힘이 늘어났다. 함량이라는 개념의 발명은 인간이 세계를 대략적으로 믿는 단계에서 정확히 개입할 수 있는 단계로 넘어가게 만든 전환점이었다.
인간의 세계에 개입하겠다는 선언은 이러한 바탕 위에서 이루어졌을 것이다. 인간의 하늘과 거리를 두겠다는 독립선언은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지겠다는 의지 표출이다. 이 의지는 한동안 문제없이 사람들에게 흐르고 있었다. 잉여 속에서 흐르는 일상은 평온했다. 불확실한 채집과 수렵에서 벗어나 농경의 잉여가 채워주는 달콤함도 순탄하게 흐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 흐름에 고인 물이 생겼다. 함량이 충분해진 세계에서 인간은 더 이상 생존의 동반자가 아니라 관리와 계산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 인간이 가진 생명체의 해로움을 회피하려는 본성이 얼토당토않게 이로움만 추구하는 일을 벌인 것이다.
인간이 인간을 공격하는 일이 발생했다. 처음에는 어쩔 수 없는 운명으로 기록했다. 계속되는 공격은 통치와 질서를 위한 승리자의 관점이 반영된 사건으로 치부되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뀌는 상황에서 공격에 책임을 묻고 통제하려는 규범을 세웠다. 그럼에도 공격은 멈추지 않았고 인간은 이 사건을 마침내 상처로 기억하기 시작했다. 이는 먹거리에 대한 생존 경쟁이 아니었다. 어쩌면 짐승보다도 못한 처참한 행위였다. 그럼에도 인류의 희망이 살아있는 것은 이 일을 상처로 기억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상처는 계속 관심을 가져야 사라지기 때문이다. 모든 문명사에서 인간에 관한 관심의 증폭은 극심한 궁핍기가 아닌 극도의 혼란기였다. 동양에선 중국의 춘추와 전국시대가 서양에서는 그리스와 로마가 그러했다. 인간은 배고픔의 해소를 위한 생존 경쟁이 아닌 사태를 설명해야 했다. 그 설명의 대상은 세계가 아니라, 그 세계 속에서 인간이 어떤 존재로 변해가고 있는가였다.
새로운 양상의 생존 경쟁을 설명하려 했던 사람들이 현대인에게 남기는 경고는 ‘배움만으로 채우는 일상이 위험하다’이다. 현대는 배움만이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는다고 가르치고 배우고 치달린다. 우리가 그들의 경고에 관심을 기울인다면 생존에는 배움을 채우는 방식이 전부가 아님을 알아차릴 수 있다. 우리가 상대적으로 서툴렀던 ‘어떤 것’을 기르는 방식도 있다. 현대는 학교에서는 지식을 습득하고, 사회에서는 능력을 증명해야 하며, 성과를 통해 자신의 위치를 설명하도록 요구받는다. 이 과정에서 내삶은 점점 ‘얼마나 알고 있는가?’, ‘무엇을 해낼 수 있는가?’로 평가된다. 우리에게 경고를 날렸던 사람들은 전혀 다른 질문을 던져두었다. ‘당신은 어떤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가?’ 타인의 상처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던진 이 질문의 중심에 놓인 개념이 바로 함양(涵養)이다. 물리적 실체에 관한 관심으로 함량(含量)을 만들었다면 인간에 관한 관심으로 함양(涵養)이 탄생했다. 그러므로 나에 관한 관심을 가지는 순간 함양은 시작되었다. 함량이 세계를 계산하게 했다면, 함양은 인간을 다시 살피게 한다.
함양은 흔히 ‘수양’이나 ‘인격 도야’로 번역되지만, 이 말들은 함양이 지닌 결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한다. 함양은 목표나 성취의 이름이 아니라, 삶이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태도에 가깝다. 무엇을 더 갖추는 일이 아니라, 이미 가진 것들이 어떻게 서로 영향을 주며 자라고 있는지를 살피는 일이다. 그래서 함양은 빠르게 측정되지 않고, 외부에서 쉽게 확인되지 않으며, 단기간에 성과로 환원되지 않는다. 함양을 이해하려는 첫걸음에서 많은 사람들이 혼란을 느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함양은 분명 개인의 문제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공동체의 언어와 규범 속에서 형성된다. 혼자만의 내면 작업 같으면서도, 사회적 관계를 떠나서는 성립되지 않는다. 이 이중성은 함양의 약점이 아니라, 오히려 그 본질이다.
개인의 차원에서 함양은 내면의 정렬에 가깝다. 감정이 판단을 압도하지 않도록 조율하고, 지식이 행동으로 넘어가는 순간을 성찰하며, 욕망이 삶의 방향을 독점하지 않도록 거리를 두는 일이다. 이 과정은 기술을 익히는 것처럼 명확한 매뉴얼을 제공하지 않는다. 대신 반복과 실패, 미세한 감각의 차이를 통해 서서히 이루어진다. 그래서 함양은 ‘얼마나 노력했는가?’보다 ‘어떻게 버텨왔는가?’에 더 가깝다. 그러나 함양은 개인의 내면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예(禮), 말의 질서, 생활의 리듬, 관계의 방식은 모두 공동체가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어낸 함양의 장치들이다. 개인은 이 장치 속에서 자신의 감각을 다듬고, 공동체는 개인들의 축적된 태도를 통해 다시 변형된다. 함양은 개인과 공동체 사이를 오가는 순환 운동이며, 어느 한쪽에 소유될 수 없다.
이 지점에서 중요한 오해를 하나 짚을 필요가 있다. 함양을 도덕적 우월성이나 인격적 완성으로 이해하는 순간, 함양은 곧 비교와 평가의 도구가 된다. 그러나 함양의 핵심은 ‘더 나은 사람’이 되는 데 있지 않다. 그것은 삶을 대하는 반응의 질을 높이는 일에 가깝다. 같은 상황에서도 덜 흔들리고, 같은 판단에서도 조금 더 책임을 느끼며, 같은 실수 앞에서도 성급한 결론에 도달하지 않는 태도. 이러한 변화는 겉으로 보기에는 미미하지만, 삶 전체의 밀도를 바꾼다.
함양은 지식과도 독특한 관계를 맺는다. 우리는 흔히 지식을 기준으로 삼아 판단하지만, 삶의 경험은 그 기준을 다시 흔든다. 함양의 과정에서는 지식이 기준이 되었다가, 다시 성찰의 대상이 된다. 이때 중요한 것은 기준을 쉽게 버리는 용기가 아니라, 기준을 고정하지 않는 인내다. 함양이란 확고함과 유연함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연습이기 때문이다. 함양에 접근하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태도는 성급한 정의를 내리지 않는 것이다. ‘함양이란 무엇이다’라고 단정하는 순간, 함양은 이미 하나의 지식 항목으로 축소된다. 대신 다음과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볼 수 있다. ‘나는 어떤 상황에서 쉽게 흔들리는가? 내가 중요하다고 믿는 기준은 어디에서 왔는가?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은 실제 삶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가? 이 질문들에 즉각적인 답을 내놓지 않아도 괜찮다. 함양은 답을 소유하는 일이 아니라, 질문을 지속할 수 있는 상태에 머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함양은 젊음의 열정으로도, 노년의 지혜로도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삶의 어느 시기에서든 다시 시작될 수 있는, 그러나 결코 단축할 수는 없는 길이다.
함양을 시작한다는 것은 삶의 속도를 늦추겠다는 선언이 아니다. 오히려 삶의 속도 속에서도 자신의 중심이 어디에 놓여 있는지를 놓치지 않겠다는 결심에 가깝다. 성과와 효율의 언어가 지배적인 시대일수록, 함양은 더욱 낯설고 비경제적으로 보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양이 여전히 유효한 이유는, 그것이 삶을 잘 설명하는 기술이 아니라 삶을 감당할 수 있게 만드는 힘이기 때문이다. 함양은 완성되지 않는다. 다만 깊어진다. 그리고 그 깊이는 어느 순간, 말보다 태도로, 주장보다 침묵으로, 설명보다 선택으로 드러난다. 함양에 접근한다는 것은 바로 그 변화를 스스로 감내하겠다는 뜻이다. 그 길은 조용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