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성어 이야기

개미, 토끼, 까마귀,.... 한자 성어 속에 등장하는 인간 아닌 존재들

by 김기황

지혜란 무엇인가? 도대체 지혜는 무엇인가? 책을 읽으면 지혜를 얻고, 찾는다는 말을 좋아해서 열심히 책을 읽는다. 어떤 사람들은 한 권을 반복적으로 읽기도 한다. 그들은 그렇게 반복하면서 지혜를 얻으려고 한다. 또 어떤 이는 다양한 분야를 섭렵함으로써 지혜를 얻으려고 한다. 도대체 지혜가 무엇이길래 지혜를 얻고 찾는 것에 매달려 있는 것일까? 사람들에게 현명한 사람이라는 평판을 들었거나 듣는 이들은 지혜롭게 세상을 살았던 것일까? 동양의 현자로 평가받았던 공자는 삶을 지혜롭게 살았던 것일까? 그렇다면 어떤 모습들로 그의 삶이 지혜로웠다고 할 수 있는가?

일상의 평범함으로 살아가는 나에게는 딱히 그 현명하다고 평가받았던 사람들의 모습들에서 지혜롭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그 사람들보다도 지혜롭다는 오만한 생각이나 태도를 보이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들도 자신들이 소통한 세상을 살다가 갔고, 나 또한 내가 소통하는 세상에서 살다가 사라져 갈 것이라는 사실은 명백하다. 내가 반드시 삶이 끝난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것만도 지혜롭다고 할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그 사람을 지혜롭다고 평가하지는 않을 것이다. 지혜에 대한 수많은 생각과 그 생각의 수만큼의 차원이 존재하는 지혜라는 개념은 어렵다. 이 어려움은 사회가 이미 정해놓은 개념을 스스로 받아들일 수 없거나 새롭게 정리할 때 맞닿게 된다.

지혜의 사전적 정의를 읽어보면 세상의 좋은 단어들을 모아 놓았다기보다는 세상의 난해하고 어려운 단어와 말들을 모아놓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사전에 대한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나폴레옹의 일화이다. 남들은 다 있는 불가능이란 단어가 자신의 사전에는 없다고 선언했던 인물이다. 사전을 두꺼운 책으로 합의한다는 전제가 있기는 하다. 나의 일상은 이미 만들어 놓은 사전을 참고하여 나만의 사전에 수록될 단어들을 만드는 과정이다. 그래서 지혜를 사전적인 정의에 얽매이지 않고 나와의 소통으로 나만의 사전을 준비하는 생각들을 모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세계 전역에는 지혜에 대한 나름의 전설과 그 지혜를 설명하고 있는 이야기들이 전해 내려온다. 그 근거들을 제시하라고 하면 인터넷이라는 인류 기술의 발명, 발달, 발전의 알맹이를 잘 활용할 수 있으면 금방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인류가 세계 각지에 퍼트린 지혜라는 이야기를 몇 장의 보고서를 작성하여 내어놓는다고 해서 그 사람을 지혜롭다고까지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사람의 행동을 지혜보다는 지식으로 평가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혜로운 행동’이 근거는 무엇일까? 인터넷을 활용하는 것은 지식이다. 이 지식으로 요구하는 자료를 더 신속하게 찾는다면 그 신속함을 가능하게 생각하는 것을 지혜라고 할 수는 없을까? 물론 가능하다. 신속한 결과물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보다는 시간을 단축한 사람을 지혜롭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터넷이라는 기술은 지식을 기반으로 구축된 세계이며 기술과 지식을 적절하게 활용하는 생각의 과정이 있어야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지혜는 점점 확장되고 모호해진 개념이다. 지혜는 모든 인류가 가지고 있다고 인정되고 있지만 모든 인류가 지혜로 인정하지는 않는 모호한 개념인 것이다. 마치 숫자도 아닌 것이 숫자 노릇을 하는 ‘0’이 수학 속으로 들어온 것과 같은 모호함이다. 숫자‘0’은 애초에는 없던 기호였다. 당연히 ‘수학적으로 없다’라는 개념도 없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아직도 수학적으로 ‘없다’라는 개념이 명확히 이해되지는 않는다. 그저 어릴 때 어느 순간에 뇌리에 박힌 ‘없다’라는 어렴풋한 개념이 교육으로 주입된 수학적 ‘없다’의 개념과 연결되어 나와 살아가고 있다. ‘없다’라는 개념과 수학적 기호로서의 ‘0’의 만남은 인류 정신의 발달과 인류문명의 발전에 획기적인 기여를 했다고 한다. 이것도 인터넷을 찾아보면 엄청나게 많은 양의 자료가 나올 것이다. 그 많은 자료를 이해한다고 해서 지혜롭다는 평가를 듣지는 못할 것이다. 천재라는 소리는 분명히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짧은 시간에 많은 자료들을 살펴보고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설명해야 한다는 단서가 붙기는 하겠지만 말이다. 숫자‘0’의 개념이 먼저인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의 생각이 먼저인지는 알 수 없겠지만 이러한 사유가 인류의 정신 속으로 들어와서 지혜가 늘어났다는 생각은 해볼 수 있겠다.

혹자에 따라서는 불교의 핵심 경전으로 반야심경을 꼽기도 한다.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이 원래 명칭인데 네 글자로 줄여 놓았다. 이 속에는 숫자‘0’의 개념을 ‘불(不)’로 표현하고 있다. 불생불멸(不生不滅), 불구부정(不垢不淨), 부증불감(不增不減)에서 불(不)은 양극단을 끊는 것이 아니라 양극단을 연결하고 있다. 그 연결된 양극단이 상승하면서 빚어내는 조화를 상상하면 지혜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때의 지혜는 불교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지혜이다. 일상의 평범함으로 살아가는 내가 나름의 이해로 이러한 이야기가 있다는 말은 할 수 있지만 이러한 사유의 궁극에 도달한다는 지혜를 설명할 수는 없다. 지혜는 오랜 인류의 역사에서도 합의된 개념은 없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다.

사람마다 저마다의 천성이 있어서 어떤 사람들은 흐르기를 하고 어떤 사람들은 머물기를 한다. 세상에는 인터넷이라는 기술 복합체를 모두 이해하려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불교의 가르침은 싫으니 자신의 평범한 일상을 즐기겠다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지혜롭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도외시할 것인가? 그렇게 자신의 시야와 시선을 좁히는 것을 또 다른 이들은 지혜롭지 못하다고 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생각의 쳇바퀴는 많은 부분에서 일어난다. 생각의 정리를 위해서는 생각을 할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이 도움이 될 때가 있다. 한자 성어 속에는 도움이 될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

인간이 자신과 다른 존재들에게 관심을 보인 이유는 무엇일까? 한자 성어 속에는 인간 아닌 많은 존재가 등장한다. 닭은 마음이 고요해야 싸움에서 이길 수 있다. 토끼는 베어진 나무그루터기에 부딪혀 죽기도 하지만 살아남기 위해서 세 개의 굴을 판다. 개미는 겨울에는 햇볕이 따스한 남쪽에 여름에는 햇볕이 서늘한 북쪽에 집을 짓는다. 늙은 말의 기억력은 사람들을 전쟁터에서 살아남도록 했다. 원숭이에게는 저녁을 기다릴 수 없는 상황이 있었을 수도 있었으며, 새끼를 강탈되어 창자가 끊어지기도 했다. 여우가 호랑이의 곁에는 가지 않겠지만 죽을 때는 태어난 곳으로 대가리를 향한다고 한다. 까마귀는 우연히 먼저 태어나서 칭찬을 들었지만 이제야 오해를 풀었다. 사마귀의 당돌함은 때로는 너그러움을 불러왔다. 반딧불은 가난한 학생의 학비를 도와주었다. 개는 성인의 깨달음의 여정을 함께 했다. 물고기는 아름다움도 두려움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했다. 비둘기와 매미는 머무름을 학은 변화를 추구하도록 하였다. 기러기는 가고 옴의 때를 알려준다. 거북이는 신성함과 그것의 허무함을 알게 했다. 코끼리는 자신이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려준다. 잉어는 차원을 달리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함을 깨우쳐 주었다. 용은 혁명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알려 준다....

인간은 지속해서 다른 존재들을 이해하려고 한다. 이는 결국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찾아내기 위함이다. 다른 존재에 대한 이해로 인간이 얻고자 하는 최종 결과물은 인간 생존에 대한 방안이다. 이것들을 인간은 지혜라고 한다. 지혜는 생존에 대한 지식이다. 다양한 존재들의 생존을 살펴야 다양한 인간의 삶을 인정할 수 있다. 현대 과학은 이러한 관계들의 유용함을 설명하는 도구다. 아무리 많은 이론과 학설이 있더라도 생존으로 연결하지 못하면 지식일 뿐 지혜라고 할 수는 없다. 지혜는 만들어져 있는 개념이 아니라 나의 생존의 질과 양을 증가시키려는 노력에서 나오는 현실 적응의 능력이다.


동서양이 오랫동안 추구해 온 지혜의 본질, 생존

개미의 본능을 지혜라고 하는 사람은 없다. 개미에게 지혜가 있다는 착각은 인간 중 누군가가 개미의 생태를 관찰하여 인간의 생존에서 탁월한 효과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미에게 지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개미의 생태 속으로 인간의 시선을 보냈던 사람이 이해한 개미의 생존방식을 인간사에 적용한 것이 지혜가 된 것이다. 개미에게서 지혜를 만들어낸 사람은 습붕(隰朋)이다. 지혜는 지식을 정리하는 데서 나오지 않는다. 습붕은 한때 중국 대륙 최강국 중의 하나인 제나라의 벼슬아치였다. 관중과 함께 왕을 수행하여 정벌을 나갔다가 곤란에 처하게 되자 습붕이 나섰다. ‘개미는 겨울에는 산의 남쪽으로 집을 짓고 여름에는 산의 북쪽으로 집을 짓는다. 개미집이 있으면 그 아래 8척이 되는 곳에 물이 있는 법이다.’ 그의 말대로 했더니 물을 구할 수 있었고 곤란한 상황을 벗어났다고 하는 ‘전국책’이라는 책 속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 책에는 늙은 말에 관한 이야기도 있다. 상황은 거의 최강이던 제나라가 이웃의 작은 나라를 정벌하러 갔다가 돌아오는 중이다. 속전속결을 원했으나 그렇지 못하고 혹한의 겨울에 산속에서 길을 잃었다. 이때 관중이라는 사람이 나선다. 우정의 대표적인 한자 성어인 ‘관포지교’의 그 관중이다. 사람들이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관중은 짐수레를 끌고 있던 늙은 말 중에 한 마리를 풀어준다. 말은 잠시 사방을 둘러보더니 이내 방향을 잡고 걷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그 늙은 말의 뒤를 쫓아서 곤란한 상황을 벗어났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책을 지은 사람은 한비자라는 사람이다. 어떤 평가가 있던지 책을 창작한 한비자는 이미 사라진 인물이니 그를 지혜로운 인물로 평가하는가는 다른 문제이다. 그렇다면 늙은 말이 혹한의 산중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방향을 찾음으로써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한 늙은 말을 지혜롭다고 할 수 있는가? 도대체 지혜를 동물에게도 쓸 수 있는 단어인가? 노마지지(老馬之智)라는 고사성어는 분명히 지혜를 다루는 고사성어인 듯한데 지혜는 어느 부분에 있고 누구에게 있으며 그 지혜의 의미는 무엇인가? 여기서도 결국 지혜를 찾아낸 것도 적용한 것도 관중이라는 사람이다. 늙은 말은 자기가 살던 곳으로 돌아가는 귀소본능이 강하다는 지식을 인간의 곤란한 상황에 적용하여 해결했기에 관중은 지혜롭다는 평가를 받는다.

지식과 지혜는 차원이 다른 인식인데 그 차이는 결국 인간이 좌우한다. 생존의 위기를 넘긴 사마천이 저술한 ‘사기’에는 맹상군 열전이라는 대목에 토끼의 지혜라고 해석되는 이야기가 있다. 맹상군에게 덕을 본 풍환(馮驩)이 그 보답으로 맹상군이 어려움에 처하자 그 어려움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나온 이야기이다. 풍환은 장래의 일을 대비하기 위해서는 토끼가 세 개의 굴을 준비하는 생태를 맹상군의 앞일에 대한 대비로 제시하였다. 이 한자 성어에는 교활함이 지혜로 변하는 모호함이 있다. 교토삼굴(狡兔三窟)을 이해한 맹상군이 장래에 위험한 상황을 넘겨서 역사에 좋은 이름을 남긴 것 같지는 않다. 어쨌든 맹상군과 관련된 많은 이야기 중에 교활한 토끼가 지혜로운 토끼로 평가받은 이야기였다. 지혜로운 이야기를 들었으나 지혜라는 단어의 개념을 정리하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다.

지혜에 대한 자신만의 시선을 가져야 한다. 한비자는 늙은 말의 강한 귀소본능과 작은 개미의 생태 습성을 지혜라고 평하지 않았다. 늙은 말의 귀소본능을 인간의 곤란한 상황 해결에 적용한 관자의 행위를 ‘성(聖)’이라 평가하고 작은 개미의 생태를 인간의 곤란한 상황 해결에 적용한 습붕의 행위를 ‘지(智)’라고 평가했다. 사마천은 본능에 충실하게 살고 있던 토끼를 인간사에 등장시키면서 교활하다고 평가하였는데 후세 사람들이 지혜롭다고 바꾸었다.

이러한 이야기들 속에는 분명히 지혜가 있는 듯하다. 지혜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어째서 지혜인가라는 물음을 던지면서 생각해 보자. 늙은 말, 작은 개미, 교활한 토끼들은 그들의 생존에 충실한 일상 행동을 하고 있었을 뿐이다. 늙은 말의 귀소본능은 굳이 늙은 말이 아니더라도 많은 동물이 귀소본능에 충실하며 사람조차도 귀소본능이 있다. 늙은 말이 인간 주인이 처한 상황을 알았는지는 차치하고 생존이 위협받는 순간에도 본능을 충실히 따랐다는 것은 생존을 확보한 행동이었다. 그래서 생존은 지혜다. 작은 개미들은 그 많은 숫자에 대한 믿음 때문인지 개미굴을 옮기는 것이 별로 어렵게 느끼지 않는 모양이다. 인간들도 개미들같이 많은 숫자가 협력한다면 계절에 따라 적절한 위치와 방향에 거처를 마련할 것이다. 개미들이 겨울철에는 남쪽에 여름철에는 북쪽에 개미굴을 만드는 것은 생존과 결부된 행동이었다. 그런데 개미굴의 더 깊은 곳에 샘이 있다는 것을 습붕은 어떻게 알았을까? 이것은 거의 우연히 습붕이 경험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 경험을 지나치지 않고 기억에 내장한 습붕의 세심함이 급박한 상황에서 생존한 비결이었다. 결국 이 이야기에서도 생존이 지혜였다.

토끼는 언제부터인지 현명한 생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그런데 오래전에는 분명히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사마천은 분명히 교활하다는 뜻의 한자를 사용해서 이야기를 만들어냈고 장자는 어리석은 사람을 등장시키기 위해 베어낸 나무그루터기에 부딪혀 죽은 토끼를 등장시켰다. 분명히 현명하다고는 할 수 없는 장면이다. 토끼가 자기의 생존을 위해서 여러 개의 굴을 파고 사는 것을 알아차린 것도 우연일 가능성이 크다. 초식동물이고 번식력이 엄청나게 강한 토끼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하나의 토끼 굴로는 위험해진다. 그 하나의 장소가 포식 동물에게 발각되면 심각한 생존의 위험에 빠진다. 그러므로 토끼는 개체와 집단의 생존을 위해서는 여러 개의 굴을 준비해야 한다. 우연히 발견한 토끼의 생존본능을 풍환은 교활하다는 한자를 사용하였지만, 그곳에서 창의적인 생각을 끌어내어 맹상군의 생존을 도모하는 성취를 이루어 내었다. 이러한 일화는 후대의 사람들에게 지혜로 평가받았으며, 아마도 이때부터 토끼는 현명한 평가를 받고 지혜로운 동물로 대접받은 것이 아닐까 싶다.

지혜는 창의적 사유이다. 3가지 이야기에는 공통점이 있다. 인간이 포함된 모든 생물의 최우선 과제는 생존이다. 그러므로 지혜는 어딘가에 어떤 형태나 개념으로 정리되어 보관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생존은 변화하는 상황에 적절히 대응할 때만이 담보된다. 생존 현장에서 사고의 유연성은 더 높고 넓은 가능성을 확충해 준다. 이 가능성의 확충에 필요한 요소가 지혜다. 그러므로 생존에서 배우는 지혜는 작은 곤충, 약한 동물, 몸짓이 큰 동물을 가리지 않는다. 한비자는 늙은 말의 귀소본능에서 생존을 위한 지식을 얻은 관중의 태도를 성(聖)으로 작은 개미의 생존본능에서 생존을 위한 지식을 얻은 습붕을 지(智)로 평가하면서 지혜에 대한 배움을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성(聖)과 지(智)의 경지에 오른 사람들도 하찮은 존재라고 여기는 늙은 말이나 개미에게서 지혜를 배우는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신이 어리석은 줄도 모른다는 논조다. 그러나 교토삼굴에서는 지혜라는 단어에 미래를 대비한다는 어떤 태도를 포함하게 되었다. 교토삼굴에서 지혜는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았다. 교토삼굴에 지혜라는 덧옷을 입힌 것은 후세인들의 필요에 의해서다. 지혜를 찾는다는 표현은 맞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지혜를 얻고자 한다. 그러나 지혜를 찾거나 얻기 전에 나를 먼저 알아야 한다. 지혜는 나의 내면에서 발현되는 나의 생존에 관계되는 덕목이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지혜라고 불리는 많은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늙은 말의 귀소본능, 작은 개미의 계절에 따라 개미굴의 위치를 이동하는 생존본능, 교활한 토끼가 세 개의 굴을 파는 생존본능을 지혜롭다고 하지는 않는다. 모든 생명체의 본능이 지혜라는 이름을 얻기 위해서는 인간의 사유가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가 이제껏 놓치고 있었던 것은 지혜를 만든 사람들이 역사 속에 이름을 남기거나 업적을 쌓아서 유명하게 된 사람들만이 가지는 특별한 정신적 능력이라고 치부해 버린 것이다. 어찌 보면 이들이 남긴 것은 인간이 생존 위협을 당함에 오직 인간만이 해결할 수 있다는 오만을 버렸다는 것이 지혜일 지도 모르겠다. 이들이 남긴 것이 지혜인 것은 분명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그 상황에서 그 사람의 사유가 유효했을 뿐이다. 급박한 생존의 상황은 어떤 경우라도 똑같을 수 없다. 그러므로 나의 생존은 오직 나만이 헤쳐 나갈 수 있다. 다른 이의 도움이 있다고 하나 결국 최종적으로는 나만이 남는다. 관중이라는 사람이 있었기에 늙은 말의 귀소본능은 지혜가 될 수 있었고, 습붕이라는 사람이 있었기에 작은 개미의 생존본능이 지혜가 될 수 있었으며, 풍헌이라는 사람이 있었기에 교활한 토끼의 생존본능이 지혜가 될 수 있었다. 사람만이 있다고 해서 그것들이 지혜가 되지 않음은 벌써 살펴보았다. 동물들의 본능과 사람을 이어주는 ‘생각’이라는 인간의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는 누구나 생각이라는 것을 하고 살아간다고 믿고 있으며, 실제로 모든 사람이 생각을 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나 지혜를 발현시키려는 생각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이제까지 지혜를 나의 외부에서 적절한 시기나 시점에 순간적으로 떠올라서 어떤 상황을 깔끔하게 해소해 준 지식이라고 규정하였기 때문이다. 지식과 지혜가 상호보완적인 측면이 있지만 영역을 비교한다면 지혜가 넓을 것이고, 시선을 비교한다면 지식이 선명하다고 할 수 있다. 지혜는 나와 나, 나와 세상과의 소통에서 살펴지는 ‘나’가 생존함에 있어 지식 등을 밑거름으로 내면화한 사유가 창의적인 사고로 발현되어 일상의 삶을 충일하게 하는 인간 정신이다. 노마지지(老馬之智)에서 말(馬)을 제거하고 나면 늙음과 지혜가 남는다. 늙음은 인간에게도 반드시 찾아오는 것이고 지혜는 인간의 삶을 품격 있게 만드는 정신적 자산이다. 그렇지만 늙었다고 그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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