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의 발생
99.9라는 수치는 순도를 설명한다. 금속·재료의 성분, 화학·의약·실험에 사용되는 물질, 산업·공정의 신뢰성, 환경·에너지 분야의 기준 등에 적용된다. 우리가 평소에는 떠올리지 않는 분야이기는 하다. 이 중에서 순금의 함량 99.9는 아주 익숙한 수치이다. 우리에게 금은 성분보다는 함량이 중요한 평가 기준이다. 함량은 수렵·채집 시기의 결핍에서 농경을 통한 여유의 상황에서 생겨난 언어이다. 수렵·채집 시기에는 먹을 수 있는 것은 모두 저장해야 생존 가능성을 높일 수 있었다. 농경에서 시작된 곡물의 잉여는 선별적 저장의 여유가 생겼다. 이 여유에서 사람들은 덜 달고 더 시고 아주 쓴 식재료는 피하게 되었다. 선별의 경험이 축적되면서 ‘얼마나 포함되어 있는가?’라는 판단이 중요해졌다. 이와 같은 관습이 오랫동안 이어지고 현대 과학의 도움으로 함량은 99.9라는 완전에 가까운 수치를 가지게 되었다. 완전한 수치가 평가의 절대 기준이 되면 사람은 더 이상 판단을 하지 않는다.
99.9의 모습이 성과 지표, 스펙, 점수로 바뀌어 나타나는 오늘날 우리는 99.9라는 수치 앞에서 무력해진다. 더 이상 고민할 여력이 없어진다. 완전함이라는 기준에는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은 물질이나 물리적 기준에서는 합당하다. 그러나 ‘보이지도 않는 것을 믿는 능력’을 계발한 사람들은 차원이 다르게 접근하였다. 먹거리 충실함의 기준인 함량을 사람 됨됨이를 평가하는 수단들로 전환시켰다. 생각을 합치고 힘을 모으면서 목격하게 된 공동체의 생존능력 향상은 지속해야 할 이점이었다. 이제 사람들은 개인의 생존에 더해서 공동체의 생존에도 관심을 가지게 된다. 이 관심의 근원에도 잉여가 자리하고 있다. 비록 아주 사소한 0.1의 잉여에도 꿈과 희망에 대한 관심을 연결해야 했다.
공동체가 생존하려면 ‘이로움을 추구하고 해로움을 회피하는’ 생명체 본성을 조율하는 도구나 수단이 필요하다. 도구와 수단을 엄밀하게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여기서 도구는 물리적 실체를 통제하는 의미에 가깝고 수단은 정신적 태도를 조율하는 의미에 가깝다. 법, 제도, 관습 등은 도구에 가깝고 윤리, 도덕 등은 수단에 가깝다. 도구와 수단은 서로의 조화를 통하여 질서를 만들고 공동체를 유지한다.
여유의 언어인 함량은 오랜 세월 공동체 생존의 이로움으로 작용했다. 그러다가 ‘이로움만을 추구하는’ 사람들과 ‘해로움은 철저히 피하려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같은 공동체 구성원이기도 하고 다른 공동체에 속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두 성향의 갈등이 공동체의 생존을 위협하였다. 우리는 이를 전쟁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실 전쟁은 혼란과 곤란한 상황의 최악일 뿐이다. 또 오랜 세월 공동체는 생성, 생존, 붕괴를 되풀이하였다. 사람들은 이러한 상황을 설명해야 했다. 자신의 행위를 설명함으로써 인간이라는 지위에 머무르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사람들은 생명체의 본성이자 인간의 본성인 ‘이로움을 추구하고 해로움을 회피하는’ 성향을 통제해야 하는 절실함을 통감한다.
우리는 흔히 윤리나 도덕을 인간 본성을 조율하는 수단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윤리나 도덕은 그러한 수단들의 결과물이다. 결과에 이르는 과정에는 다른 차원의 수단들도 있다. 굳이 구분한다면 이 수단들은 일상을 도덕과 윤리로 연결하는 수단이라 하겠다. 이러한 수단들은 오래전 인류가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 공동체 차원의 시선이 향한 곳에서 발생했다. 인류는 자신들이 저지른 극심한 혼란에서 마른 수건을 쥐어짜듯 지혜를 짜내야 했다. 당연히 이 지혜는 극심한 혼란을 설명해 줄 수 있어야 했다. 그리고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는 수단으로 작동할 수 있어야 했다. 오래전 인류는 인간의 삶은 인간이 책임지겠다고 하늘에 독립을 선언했었다. 이때 사용된 개념이 천명이었다. 천명은 공자가 개인 삶의 영역에서 재해석하기 전까지 정치적 용어였다. ‘천명(天命)’의 탄생 배경이 정치적 상황이었으니 무리한 일도 아니었다. 이제 인류에게는 개인의 삶과 공동체의 질서를 이어 줄 수 있는 새로운 개념이 필요했다. 삶이라는 개인의 일상과 지속 가능이라는 공동체의 가치를 담고 있어야 했다. 공자가 천명을 개인 삶의 내면화로 새롭게 해석한 이유도 이러한 맥락이다.
인류는 결핍의 시대를 벗어나 여유의 시대에 관심을 가졌던 함량을 다시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같은 물리적 실체를 구분하기 위한 ‘함량’을 인간에게 적용시킨 것이다. 사회가 혼란한 시절에 할 수 있음에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분명히 구별되는 존재들이었다. 이 존재의 출현을 설명하기 위해 같은 먹거리의 차이를 나타내는 함량이 사용되었다. 물질의 충실함을 뜻하던 ‘함량(含量)’은 이제 스스로의 내면을 살피고 채우는 ‘함양(涵養)’으로 그 자리를 옮겨 앉았다. 그래서 질문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보다는 ‘어떤 생각을 하는 사람인가?’에 관심이 쏠렸다. 그래서 함양의 탄생 배경에는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시하는 시선이 배어있다. 인류의 시선이 닿은 그 지점에 0.1이라는 수치가 사소함의 상징으로 머물고 있었다.
결핍으로 생존에 매몰된 사람들에게 사소함은 판단의 대상이 아니었다. 사소함은 무시되거나 제거될 운명이었다. 그런데 충분하지는 않았으나 잉여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농경으로 얻은 잉여는 사람들에게 생존에만 매몰되지 않을 수 있는 여유를 주었다. 이 여유로 사람들은 물리적 실체에 또 다른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생존 목적의 관심에서 저장 목적의 관심으로 이동이다. 이 관심에는 판단과 평가가 뒤따른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판단에는 선택이 개입되며 선택에는 평가가 있어야 함을 알았다. 또한 평가에는 책임이 따라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생존에 필요한 먹거리를 저장하기 위해서는 미래의 필요와 효용이라는 평가가 있어야 한다. 저장된 먹거리가 미래의 특정 시점에 사용되지 못한다면 공동체의 생존 자원을 낭비하게 된다. 따라서 선택, 평가, 책임은 서로 맞물려서 사람들의 생존에 파고들게 되었다. 이 중에서 책임은 개인에게 선택과 평가의 신중함을 요구하는 덕목이 된다. 공동체의 형성, 성장, 존속, 붕괴의 흐름에서 책임의 무게는 늘어가고 있었다. 늘어나는 책임의 무게는 개인의 삶에도 공동체의 존속에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러한 긴장은 해소되어야 했다. 인류의 노력은 여러 시행착오를 거쳐서 결실을 이룬다. 관심, 선택, 평가, 책임을 모두 살필 수 있는 하나의 개념을 마련했다. 그것은 ‘기준’이다.
기준의 발명은 인류에게 발전과 혼란이라는 역설을 가져왔다. 발전보다는 혼란이 가져온 충격이 더 컸을 것이다. 혼란은 공동체와 개인의 삶을 파괴한다. 혼란의 극복은 인류에게 또 다른 지혜를 요구했다. 혼란의 근원은 인간 본성의 엇박자에서 기인했다. 이로움만을 추구하는 사람들과 해로움을 회피하려고만 하는 사람들이 부딪혔다. 이로움의 추구나 해로움의 회피는 공동체가 용인하는 수준에서 이루어져야 했다. 이 수준을 벗어난 본성의 발휘는 혼란으로 이어지고 그 최악은 전쟁이다. 전쟁은 이로움만을 추구하는 본성과 해로움을 회피하려는 본성이 맞서는 사태이다. 이 혼란의 핵심은 생존의 위협이자 생존 실패이다.
아마도 자신의 존재를 설명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인간 존재의 의지가 인류 발전의 원동력일 것이다. 생존 위협과 생존 실패가 반복되는 상황을 인간은 설명해 내야 했다. 그 상황을 설명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예방할 수 없음은 역사에서 경험했다. 그럼에도 시대 상황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인간이 가진 숙명일지도 모른다. 모든 생명체가 살아가는 단 하나의 목적은 생존이다. 따라서 혼란한 상황은 생존에 필요한 이로움의 추구를 넘어서는 성향과 생존에는 영향이 없음에도 해로움을 회피하려는 성향이 문제였다. 공동체의 질서를 위해서는 이러한 성향의 적절한 조율은 반드시 필요하다. 적정한 생존에 필요한 본성의 조율이 지속되려면 개인의 독특한 성향을 살펴야 한다. 인간은 같은 현상이나 상황에서 동일한 반응을 나타내는 경우는 절대로 없다. 개인의 고유한 성향을 천성이라고 한다. 흔히 성격이라 말하는 천성은 개인의 다양하고 다층적인 감정을 범주화시킨 것이다. 본성의 조율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감정인 천성을 살피지 않고서는 이어가기 힘들다.
본성, 천성, 개성은 실재의 분할이 아니라 인간의 태도를 이해하기 위한 서로 다른 관점일 뿐이다. 본성과 천성, 그리고 개성은 쉽게 분리되어 포착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구분해서 이름을 달리하는 것은 이해를 위한 구분일 뿐이다. 사람은 본성과 천성의 조화로 드러나는 개성으로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한다. 적정한 생존을 위한 본성과 천성의 조율에는 적절한 기준이 있어야 한다. 적절한 기준은 여유의 언어인 ‘함량’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이미 경험했다. 물리적 실체의 내실에 대한 관심을 인간에게 적용함으로써 혼란한 상황을 설명하는 수단을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혼란하고 어지러운 상황에서도 인간이기를 고집했던 사람들의 내면에 관한 관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인간에게 향한 관심은 입체적인 시선이 필요하다. 사실 동물이나 인간의 일상은 단편적이지 않다. 본성의 방향성과 천성의 성향이 만나야 이해해 볼 수 있다. 본성인 이로움의 추구와 해로움의 회피는 방향을 나타낸다. 이 방향에 천성인 기쁨, 노여움, 애틋함, 즐거움, 슬픔, 미움, 부끄러움이 깊이와 높이를 더해야 일상을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흔히 이를 개성이라고 한다. 하지만 개성은 고정된 결과의 평가보다는 특정 시점에 내리는 판단에 가깝다. 개성은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판단의 대상이다. 자신이 어떤 개성을 소유하고 있다는 말은 그러한 경향을 보인다는 표현이다. 일상에서 드러나는 행위나 감정이 항상 고정되어 있지 않음은 자신만이 알고 있다. 일상의 세세한 감정을 드러내는 조율이 공동체가 개인에게 요구하는 선택과 책임이다. 개인에게 지워진 선택과 책임을 함양이라 한다.
현대사회에서 99.9라는 수치는 윤리, 도덕을 도구로 사용하여 개인의 삶을 짓누른다. 성과, 목표, 성취, 성공 등 결과에 집중하여 자신을 살피는 일에 소홀하게 만든다. 99.9라는 수치 앞에서 인간은 사고를 멈춘다. 완전한 수치라는 선입견으로 행동에 매몰되고 만다. 완전한 수치라고 믿는 순간 그것은 절대 기준이 된다. 기준은 행동의 방향을 찾을 수 있는 유용한 도구이다. 하지만 삶의 목적이 되는 순간 본성을 해치고 천성을 허물어 개성을 잃게 된다.
99.9라는 상징적 수치는 일상의 오랜 흐름 속에서 탄생한 절대 기준이다. 인류가 0.1이라는 잉여의 수치를 남긴 것은 의미가 있다. 함양은 머금고 기른다는 과정이 내포된 언어이다. 본성의 방향성을 머금고 본성이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게 자신의 천성을 기른다는 의미이다. 이는 개인의 삶과 공동체의 건전한 질서 유지에 도움이 된다. 함양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사람도 자신의 삶과 공동체의 질서를 해치지 않고 살아간다. 함양의 대상은 인간 세상에 널리 퍼져 있는 근본적인 태도이다. 그래서 함양은 근본적인 태도를 머금고 기르는 과정에 관심을 가지도록 한다. 인간 세상에 널리 퍼져 있는 근본적인 태도가 드러나는 현장은 일상이다. 그 일상에는 항상 0.1이라는 수치가 흐른다. 일상에서 드러내는 자신의 태도에 관심을 가짐으로써 함양의 과정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