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거목
나의 애초 문제는 접근 방식이었다. 접근 태도이어야 했다. 우리는 거목 앞에 서면 먼저 안도한다. 이 나무의 종류는 무엇인지, 수령은 얼마나 되었는지, 보호수인지 아닌지. 이러한 지식은 대상을 이해하게 해 주지만, 동시에 사유를 멈추게 한다. 더군다나 거목 앞에 세워진 친절한 안내문을 읽는 것으로 생각은 끊겼다. 안다는 감각은 곧 판정의 완료로 이어지고, 판정이 끝난 대상 앞에서는 더 머물 이유가 사라진다. 아름답다는 말은 그래서 종종 감탄이 아니라 종결어가 된다.
그러나 거목은 결과물이 아니다. 거목은 살아남은 시간의 총합이며, 수없이 반복된 선택과 반응이 축적된 형상이다. 이때 거목을 지식의 대상으로만 본다는 것은, 삶을 결과로만 이해하려는 나의 방식을 그대로 반영했다. 나무는 처음부터 거목은 아니었다. 어린나무의 생존은 철저히 방식의 문제다. 빛을 더 빨리 차지하기 위해 곧게 자라고, 주변 개체보다 먼저 키를 키운다. 이 시기의 나무는 경쟁적이며, 효율적이고, 즉각적인 반응을 해야 살아남는다. 나의 삶도 다르지 않았다. 나는 일과를 만들고, 목표를 세우고, 완수 여부로 하루를 평가했다. 오랜 세월 나의 삶은 생존을 위한 방식의 연속이었다. 무엇을 어떻게 하면 되는가가 중심 질문이었으며, 태도는 부차적인 것으로 밀려났다. 그러나 일정 시점을 지나면서, 이러한 방식은 더 이상 삶을 설명하지 못했다. 더 빨리, 더 높이, 더 많이라는 질문은 반복되지만, 그 반복 속에서 삶의 무게는 줄어들지 않았다. 이때야 어렴풋이 알았다. 삶은 방식의 확장이 아니라, 태도의 전환이 있어야 함을.
거목이 되는 결정적 순간은 줄기가 더 높아질 때가 아니다. 우듬지가 형성되기 시작하는 시점이다. 씨앗은 발아하면 뿌리와 줄기의 길이를 키워나간다. 작은 풀이던 시기를 지나서 줄기가 자라고, 마디가 생기고, 곁눈이 형성되면서 상황은 달라진다. 이때부터 줄기의 정아는 단순한 생장점이 아니다. 가장 먼저 햇빛을 만나는 자리, 가장 빠르게 생장 신호를 내보내는 자리, 다른 눈들의 성장을 조절하는 자리가 된다. 비로소 우듬지가 나타난다. 우듬지는 옥신(auxin)이라는 식물호르몬을 아래로 보내어 곁눈의 성장을 억제한다. 그러나 이 억제는 탄압이 아닌 조율이다. 그래서 우듬지는 앞서 나가는 존재라기보다 질서를 만들기 위해 다른 가능성을 잠시 묶어두는 존재이다. 이 기능이 작동하기 시작하는 시점, 바로 그때부터 우듬지는 단순한 꼭대기가 아니라 나무의 방향을 정하는 자리가 된다.
수많은 가지가 있음에도 우듬지는 왜 필요한가? 빛을 두고 경쟁하는 환경에서 하나의 주된 축을 세워 빠르게 위로치고 올라가서 생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우듬지가 있을 때 나무는 에너지를 분산시키지 않고 줄기와 가지의 위계를 세우며 바람과 하중에 견디는 형태를 가질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우듬지를 제거하면 억제되던 곁눈들이 일제히 깨어나 나무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자란다는 점이다.
나는 이 지점을 인간 삶에서 방식이 태도로 전환되는 순간으로 보고자 한다. 우듬지는 더 위로 가기 위한 구조가 아니라, 살아남은 시간들을 조율하는 장치다. 우듬지가 만들어지면 나무는 빛을 독점하지 않는다. 오히려 빛을 나누고, 바람을 흘려보내며, 자신 안에 다양한 방향성을 허용한다. 이때 나무의 성장은 속도의 문제가 아니라 균형의 문제가 된다. 더 많은 목표를 완수하는 삶에서, 어떤 상태로 하루를 통과하는 삶으로의 이동이다. 이 전환이 일어나지 않는 한, 인간은 삶이라는 말의 무게를 감당하지 않으려 한다. 방식의 세계에서는 삶이 처리 가능한 과제에 머물지만, 태도의 세계로 들어오는 순간 삶은 감당해야 할 실체가 된다. 여기서 감당이라는 말에는 이미 선택과 책임이 포함되어 있다. 누구도 대신 떠안아줄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인간은 순간적으로 회피하려는 마음을 품는다. 아무도 본 사람이 없고, 그 흔한 CC-TV나 블랙박스도 없다고 확인하면 누군가 슬그머니 속삭인다. 당연히 책임져야 할 일 앞에서도 도망칠 구석을 찾기도 하는 이유다. 우듬지는 바로 이 회피가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지점에서 형성된다. 삶의 무게가 나무 자신에게 귀속되듯, 인간 역시 삶을 외주 주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러서야 태도가 생겨난다. 이때부터 삶은 일과의 집합이 아니라, 일상의 축적이 된다.
일과는 끝내야 할 목록이고, 일상은 반복 속에서 형성되는 태도다. 일과를 완성하면 우리는 만족이라는 말로 사유를 멈춘다. 반대로 완성하지 못하면 내일로 이월하며 다시 방식의 굴레로 들어간다. 우듬지 이후의 나무는 오늘 자랐는지 어제를 반복했는지를 묻지 않는다. 그저 지금의 바람과 햇빛을 감당할 뿐이다. 이 감당의 반복이 곧 나무의 형상이다. 인간의 함양도 이와 다르지 않다. 무엇을 더 했는가가 아니라, 무엇에 즉각 반응하지 않게 되었는가, 무엇 앞에서 멈출 수 있게 되었는가가 삶의 깊이를 만든다.
우듬지의 조율은 숲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인간의 삶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나야 한다. 다만 그것은 어느 한순간의 깨달음이나 결심으로 발생하지 않는다. 거목을 한 번 올려다본다고 해서, 우듬지의 의미가 곧바로 삶의 태도로 옮겨지지는 않는다.
내 집 앞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거목이 있다. 한겨울의 그 나무는 흔히 말하듯 ‘앙상하다’. 이전의 나는 그 모습을 그렇게만 보았다. 잎을 잃은 상태, 무엇인가 결핍된 상태, 아름다움이 사라진 형상으로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다른 곳에서 함박눈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앙상한 거목을 본 기억이 스쳤다. 그때 앙상한 나무가 다른 존재를 품던 광경에 잠시 부러움이 일었다. 그러나 계절이 더 흐른 뒤, 어느 순간 집 앞의 그 거목을 올려다보았을 때, 나는 설명하기 어려운 빛을 보았다. 일종의 후광이었다. 그때 알게 되었다. 모든 나무는 그 시기에 따라 서로 다른 색의 후광을 지닌다는 사실을. 잎이 무성할 때만이 아니라, 눈을 품을 때에도, 가지가 비워졌을 때에도, 나무는 각자의 빛을 갖고 있었다. 이후로 나는 그 시기에 나무의 후광을 바라보는 즐거움을 얻게 되었다. 함박눈을 품던 앙상한 가지에 후광이 생기고, 다시 순이 오르고, 잎이 되고, 마침내 자신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과정은 언제나 조용히 반복되었다. 거목은 설명하지 않았고, 나 역시 판단을 서두르지 않았다. 다만 오래 바라보았을 뿐이다. 이 경험은 나에게 분명히 말해주었다. 거목의 아름다움에 대한 사유는 즉각적인 감상이 아니라, 장기간에 걸친 관심에서만 형성된다는 것을. 우듬지가 함양으로 이어진다는 말은, 바로 이 지속된 관찰과 감당의 시간 위에서만 성립한다는 뜻이다.
거목은 빠르게 자라지 않는다. 그러나 쉽게 쓰러지지도 않는다. 그 삶은 효율의 결과가 아니라, 감당의 축적이다. 인간의 함양 역시 마찬가지다. 삶을 잘 산다는 것은 더 많은 일을 끝냈다는 뜻이 아니라, 삶을 대하는 태도가 하나의 형상으로 굳어졌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몇 년 동안 나의 일상 공간에는 몇 그루의 거목이 자리했다. 꿈틀거리는 겨울 산자락 아래. 앙상한 가지가 실루엣을 받쳐주는 힘이 되는 들녘에. 가지를 부러뜨리는 태풍 속에. 이제는 거목의 우듬지 아래에서 나는 묻는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가 아니라, 어떤 태도로 존재하고 있는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