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우정은 왜 흔들릴까?
‘어미 팔아 동무 산다 /동무 따라 강남 간다.’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듣지는 못하더라도 내용은 익히 아는 말이다. 오래된 속담인데도 어쩐지 조금은 어색하다. 옛날에는 친구보다는 동무라는 말이 많이 쓰였던 것 같다. 동무는 엄연히 대형 국어사전에도 수록이 된 단어이지만 숨도 쉬지 못하고 있는 단어가 되었다. 주변에서 동무라는 단어를 쓰는 사람들은 아마도 다른 체제를 가진 북쪽에서 내려온 사람들일 확률이 높다. 그들은 지금도 쓰고 있는 단어이다. 물론 원래의 아름답던 의미는 완전히 망가뜨려 놓았지만 말이다. 동무라는 단어가 친구라는 단어로 대체된 것은 역사가 그리 길지 않은 것 같다.
잃어버린 우정 연습. ‘동무’라는 단어의 기억
서슬 퍼런 군사 독재 시절 진영의 논리로 사라져야 했던 애틋한 단어. 그 시절의 사람에게 ‘동무’라는 단어는 체제에 반하는 금기어였다. 어려서 친구의 의미도 모른 채 우정을 강요당했던 애틋한 세대에게는 생소한 단어일 것이다. 그런데도 아직 사실을 전하지 못하는 애매한 단어이다.
초면에 잠시 일정한 물리적 거리의 길을 함께 걸었던 사람을 친구라고 하지는 않는다. 지나가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길을 심심하지 않도록 같이 걸어준 사람이라면 ‘길동무’가 된다. 어느 한적한 곳에서 쉬다가 우연히 만난 사람과 신변잡기의 한담을 나눈 사이의 사람을 친구라고는 하지 않는다. 그런데 뜻밖에도 주고받은 말이 마음에 걸리지 않는다면 ‘말동무’가 된다. 동무는 친구 사이의 친밀함을 표현하는 우정으로는 설명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으나 긍정적인 관계를 표현하는 말이다. 동무라고도 표현하지 않는 사람은 그저 아는 사람이다. 때로는 ‘동무’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데 우연히 어느 순간에 아주 좋은 기억으로 떠오를 때 미소를 짓게 하는 존재이다.
‘동무’라는 단어가 사라지게 된 배경에는 확인되지 않고 전해지는 이와 비슷한 맥락을 가진 야담이 있다. 서슬이 퍼렇던 군부독재 시절의 여름 장마가 억수같이 퍼붓던 한여름의 한밤중이다. 야간통금이 있던 시절이라 꽤 통제가 심했던 시절이다. 한 라디오방송에서 당시 유행하던 가요가 흘러나왔다. 내용은 비가 밤새 내려서 자신의 아픈 마음을 씻어 달라는 가사였다. 다음 날 이 노래는 금지가요의 목록에 올랐다. 전날 그 방송을 독재정권의 하수인 중 한 사람이 들었는데, 여름 홍수에 비가 내리는 내용이 독재자의 근심을 건드린다는 이유였다고 한다.
군부독재의 이러한 황당 논리가 ‘동무’라는 단어를 사라지게 한 배경이 되었다. 당시의 청소년들에게 인기가 많은 잡지가 있었다. 잡지 이름이 ‘어깨동무’였다. 시골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나는 또래들과 어깨동무를 하면서 놀았고 ‘동무’라는 단어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사용하며 놀았던 기억(記憶)이 있다. 이 잡지가 어느 날 폐간되었다. 아마도 신군부 시절일 것이다. 이 잡지의 폐간이 군부 독재정권의 강압에 의한 것인지는 확인하지 못하였으나, 독재정권과는 연관이 있었다. 잡지의 발행처가 독재정권과 관련된 사람이 운영하는 재단이었다.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꿈과 희망, 용기를 심어준다는 취지는 좋았다. 잡지의 내용을 정치, 사회, 문화적으로 분석하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많은 부분이 감춰져 있을 것이라는 짐작은 든다. 물론 나는 어려서 잡지의 내용에 대해서 그러한 이념적인 사유는 하지 못했으며 만화가 많았고 교과서에서는 접하지 못한 내용들에 마음이 뺏겼었다. 어렴풋한 기억이지만 초등학교 저학년 무렵부터 선생님들이 ‘동무’라는 단어의 사용을 주의하라고 한 것 같다. 그리고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동무’라는 단어는 우리들의 입에 거의 오르내리지 않았다. 늑대인지 이리인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동무’라는 단어를 쓰는 사람은 북쪽의 동물로 취급한다는데 누구인들 무섭지 않았을까? 그 이후로 학창 시절에 한 번도 같은 반이 아니었던 동창생도 나중에 만나면 친구라고 했다. ‘동창’이라는 단어는 사회적으로 생소한 단어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마땅히 짧은 단어가 없었다. 어쩌면 친구의 숫자로 사람을 평가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짓눌리기 싫은 심리 때문에 ‘동창’보다는 ‘친구’라는 말을 쉽게 사용했을 수도 있다.
사기꾼이 벼룩의 간을 마다하겠는가?
선선한 가을의 어느 날. 한적한 편의점 앞. 펼쳐진 큰 양산 아래에서 30대 전후로 보이는 남녀 대여섯이 앉아서 맥주를 마시고 있다. 남녀의 짝이 맞지 않고 대화의 내용과 자리의 분위기로 보아서는 한 시절을 같이 보낸 사람들인 것 같다. 우리가 말하는 소위 친구 사이. 한 사람이 지나간 여름의 뜨거웠던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동창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무리 들어도 다단계회사인데, 그 동창생은 오해하고 있다면서 물건의 구매를 권유했다. 처음부터 의아해서 몇 번이고 거절했지만, 그 동창은 그 회사의 교육에서 수석을 했는지 집요하게 매달려서 어쩔 수 없이 물건을 구매하기로 하고 카드로 결제했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자신의 바쁜 일상에 매달리다가 문득 물건을 구매한 사실이 기억나서 모친(母親)에게 전화로 확인해 보니 물품이 온 적이 없다고 했다. 다음날 그 집요했던 동창에게 확인을 요구했더니 확인해 보고 전화를 준다고 했다. 그 동창생은 이후부터는 온갖 변명을 늘어놓았다. 물건값이 꽤 나가는 것이라서 포기할 수 없던 그는 환불(還拂)을 요구했다. 그렇다. 이미 우리가 예상하는 바대로 일은 흘렀고, 오늘은 답답한 마음에 친구들을 불러낸 것이다. 이 사람은 한여름에 친구라 생각했던 동창에게 사기당하고 모친에게 혼나고, 자신의 뜨거운 여름이 정말 한심하다는 푸념을 하면서 맥주를 물을 마시듯이 벌컥벌컥 들이켠다. 그러자 조용히 듣고 있던 옆자리의 한 사람이 위로의 묵직한 한마디를 한다. “우리는 가끔 없어서는 안 될 것만 같았던 친구가 지내고 보니 없어도 된다는 것을 알게 되기도 해. 친구에게 사기당한 것이 아니고, 사기꾼에게 사기를 당한 거야. 여기 있는 우리는 친구야!”
어쩌면 많은 사람이 친구와 사기꾼을 구분하지 못하던 가 구별하지 않는 참으로 인정(?)이 넘치는 사회를 살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사람들은 가까운 사람에게 받은 마음의 상처는 더 오래간다고 한다. 이는 아마도 친구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라고 생각하는 습관에서 하는 말일 것이다. 어쨌든지 우리는 가까이 있는 사람들과 더 자주 마주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친구는 멀리서 지내더라도 친구라고 대접한다. 굳이 친구가 아니더라도 오랫동안 만나지 못해도 친근감이 가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다. 오랫동안 연락이 없어도 마음이 가는 사람을 친구라고 할 때의 전제는 헤어지기 전에 친밀감을 쌓아 놓은 것이다. 별로 친밀감도 없던 사람이 십여 년 만에 나타나서 친구라고 강요하고 자신의 이득만을 챙긴 사람을 친구라고 불러도 마땅한 것일까? 그렇게 친구의 의미를 최악으로 떨어뜨려야 할까?
모습이 바뀌기 전의 우정 팔이
우정은 당사자들에게 좋은 경험이 오랜 시간을 걸쳐서 축적된 이후에 발생하는 감정이다. 만남과 동시에 친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정신이 나간 사람이다. 간혹 영화에서는 낯선 사람을 만나자마자 친구로 인정하면서 자신이 믿고 있던 친구의 기준을 잘못 적용하여 낭패를 보는 경우를 볼 수 있다. 한때는 실제로 우리 주변에서도 이런 사례는 자주 볼 수 있었다. 사귐의 시작을 사귐의 결과인 우정이나 친구로 오인한 경우들이다.
지금은 많이 없어진 듯하나 우리가 민간 협동의 아름다운 전통을 예로 들던 ‘계(契)’에는 아직도 이런 사례들이 종종 발생한다. ‘계’를 시작하여 계원들을 사귈 때는 사고를 치는 사람이 거의 없다. 첫 회부터 곗돈을 횡령하는 사람은 당연히 사기꾼이라는 칭호(?)를 받는다. 사람들은 재수가 없었다고 자신의 탓으로 돌리고 만다. 회차가 늘어가는 만큼 사귐의 깊이도 깊어 간다. 계원들은 법적으로는 아무런 보장이 되지 않는 ‘신뢰(계)’에 그들의 재산을 맡기고 불어있을 재산을 꿈꾼다. 내색할 수 없는 불안감은 우정으로 연결된 다른 계원의 ‘믿으라’는 말로 대체하면서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은근슬쩍 우정에게 떠맡긴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와는 일면식도 없었던 사람과의 왕래가 잦아져서 경계의 마음이 풀리는 그즈음에 사고가 터진다. 그래서 사고가 터지면 비난의 대상인 계원을 ‘사기꾼’이라고 할지 ‘친구의 친구’라고 할 것인지를 고민하다가 때를 놓치고 만다.
만남의 횟수가 늘어가고 사귐의 깊이가 깊어진다고 모두가 친구가 되는 것은 아님을 명심하자. ‘사귐’이라는 말은 사람 사이의 관계 발전을 설명하기에 참 좋은 말이었으나 지금은 온전히 연인관계로 발전해 보려는 청춘들에게 한정되는 것 같아서 참 아쉽다. 불쑥 옆에 있는 동성에게 ‘우리 사귀자’라고 한다면 그 순간 이후부터는 오해가 풀릴 때까지 피해 다녀야 할 것이다. 무겁고 무서운 말로 변해버렸다. 사귐의 계기가 있었고, 사귐의 깊이가 깊어짐을 느끼고 사귐의 수준에서 우정이라는 차원으로 변화된 계기가 있었을 것이다. 어떻게 친구 관계를 세세히 분석해서 마음을 쓰겠냐고 하겠지만 우리가 친구라고 생각하는 사람 중에 우정을 팔아먹고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우리의 영혼을 갉아먹는 사람들이다. 부모와 형제 친지들은 천륜으로 엮었으니 끊어낸다고 끊어지는 게 아니지만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우정을 팔아먹은 사람과의 관계를 완전히 정리한다고 해서 비난받을 일은 아니다. 오히려 그 사람을 끊어내지 못하는 내가 비난을 받을 것이다.
인류 역사에서 꾸준히 우정에 관한 이야기가 추가되었던 것은 우정은 과거에도 현재도 개인의 사회적 관계에 많은 영향을 주는 중요한 가치임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과거에는 이야기의 형태로 전해지고 현대사회에서는 연구의 보고서라는 형태로 대체되었을 뿐이다. 다만 현대의 연구보고서에는 우정에 대한 직접적인 이야기가 없어서 낭만적이지 않다는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있다. 특히 현대에 와서 개인의 인생에서 우정이 중요한 가치가 되는 것은 물리적으로는 가정을 벗어나야 하고, 정신적으로는 가족을 벗어나서 사회활동을 해야만 하는 현대인의 숙명과 연관된다. 부모의 경제활동을 위한 자녀의 희생으로 우정을 연습이나 과정으로 터득하지 못하고 우정을 강요받는다. 강요된 우정을 주입받은 자녀가 우정을 이해하기 위한 자신의 기준을 세우지 못할 때 우정은 어지럽고 혼란스러워진다. 지나간 시대의 우정에 관한 직접적인 이야기로는 한자 성어가 있는데 사귐, 우정, 친구를 포괄하고 있다. 거의 모든 자료에서 우정이라는 주제로 분류해 놓고 있다. 이 한자 성어들의 이야기를 기존 해석과 더불어 창작의 배경에 대한 해설, 본인의 지식과 상상력을 발휘하면서 읽다가 보면 우정에 대한 혼란스러운 마음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우정을 만드는 연습
우정에 관한 이야기 중에서 가장 어린 시기를 언급하는 것이 죽마고우(竹馬故友)이다. 이 말은 창작자가 나이가 많아서 벼슬도 내려놓을 무렵에 친구와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한 말이다.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되는 시기는 대개는 현재의 유치원에 들어가기를 전후하는 시기이다. 이 시기의 어린이들이 놀고 있는 장소에 대나무막대기를 하나 던져주면 대나무막대기는 말(馬)이 된다. 한 아이가 대나무막대기를 말이라고 타고 다니면서 놀다가 보면 다른 아이가 합세하여 같이 말을 타고 논다. 주변의 아이들이 비웃어도 말(馬) 놀이에 푹 빠진 아이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누가 뭐라고 해도 그들에게 대나무막대기는 말(馬)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 말(馬)이 어디엔들 가지 못하겠는가? 어른들의 기준으로는 이런 말(言)도 되지 않는 생각을 어린이들은 곧잘 한다. 아직 사물의 이름이 사회의 약속임을 모르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을 같이 보낸 사람들에게는 이와 유사한 경험들이 모두가 있다. 그 경험을 기억에 남기기도 하고 아주 잊어버리기도 한다. 기억에 남기는 사람들은 대나무말타기의 신체적 경험보다는 어렴풋이 느꼈지만 강렬한 심리적 경험을 간직했기 때문이다. 죽마고우(竹馬故友)를 창작한 사람도 노년까지 기억에 남아있던 그 시절을 떠올리면서 오랫동안 서로의 곁에서 자신의 삶을 가꾸었던 친구와 담소를 나누는 것이 흡족했을 것이다. 오늘날 죽마는 단연코 스마트폰이다.
이렇게 시작한 우정을 만드는 연습은 더 많은 사람과의 접촉으로 넓어진다. 우정이라는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사귐이라는 단계를 거쳐야 한다. 사귐과 우정은 다르다. 우정을 얻기 위해서는 사귐이 필요하지만 사귐을 위해서는 꼭 우정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사귐은 자신의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궁금증 그리고 사람을 향한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
구색친구(具色親舊)는 다방면의 사람들과 사귀어 만들어진 친구를 말한다. 다방면의 사람들과 사귀다 보면 반드시 모였다 흩어지는 과정이 일어나게 된다. 이러한 시기에 등장시킬 수 있는 한자는 붕(朋)이다. 대략 하여서 친구나 벗으로 뜻을 새기는 붕(朋)은 같은 관심사를 찾거나 더 많이 알기 위해서 무리를 이루어 다니는 정도의 친밀감으로 이어진 사이를 말하는 것 같다. 무리(朋)의 모든 사람과 우정이 쌓이고 친구가 되지는 않는다. 같은 사안에서도 서로의 시각이 달라서 다른 길을 선택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무리에 여러 신분의 사람들이 들어 있을 때 교우투분(交友投分)을 말할 수 있다. 교우투분은 자신보다 더 나은 사람을 벗으로 사귀기 위해서 신분을 잊겠다는 결심이 반영된 이야기다. 신분(身分)의 엄격함이 사회를 유지한다고 믿었던 사회에서는 낮은 신분의 사람과 교류하는 것은 때로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 공통의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이 무리를 이루어서 지속적인 교류를 이어가며 사귐의 깊이가 깊어 갈 때 망형 지우(忘形之友), 망년지우(忘年之友)의 차원이 될 수 있다. 그 사람의 겉모습을 잊고 그 사람의 나이를 잊어도 될 정도의 내면을 갖춘 사람들이라야 할 수 있는 말이다. 강요된 우정을 주입받은 사람들에게는 애초에 꿈도 꿔보지 못할 차원이다.
우정의 핵심에 대한 낭만적 체험
사귐의 넓이가 확대되고 깊이가 깊어지는 것이 반드시 순차적으로 일어나지는 않는다. 굳이 이것을 구분해서 살펴보는 것은 우정에 대한 더 많은 이해를 하려는 의도이다. 어떤 사귐은 금방 시들해지다가 끊어지고 어떤 사귐은 아주 끈끈해져서 자신들의 삶이 끝나도 그들의 후손이 이어가기도 한다. 이러한 차이에는 분명히 특별한 계기가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것이 남들에게는 사소하고 하찮은 것이라 할지라도 깊은 우정을 얻은 사람에게는 대단하고 가치가 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낭만적인 경험은 꽤 깊은 인상을 남긴다.
야우대상(夜雨對牀). 정자의 마루에 마주 보고 누워서 밤에 내리는 빗소리를 듣는다. 형제나 친구의 친밀함을 낭만적으로 표현한 이야기라 해석하고 있다. 우리의 관심은 우정이니 형제끼리의 일은 밀쳐 두도록 하자. 이러한 상황에서 친구끼리 무슨 말을 주고받겠는가? 아마도 남들에게는 하지 못할 자신의 신변에 관한 이야기들일 것이다. 부모, 형제, 연인, 다른 친구, 장래에 대한 고민이 대부분일 것이다. 이러한 체험은 우정이 깊어져서 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러한 체험에서 얻는 심리적인 경험은 우정을 더욱 깊게 할 것이 틀림없다. 장침대금(長枕大衾). 긴 베개와 큰 이불. 길고 큰 침구가 관심의 대상은 아니다. 하나의 베개와 한 장의 이불로 잠을 청해야 한다. 뜻하지 않게 우연히 이러한 상황에 맞닥뜨리게 될 수도 있다. 이성이 아닌 동성에게는 분명히 난처한 상황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이 우연이 아닌 의도된 상황이라면 야우대상(夜雨對牀)과 유사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장침대금의 상황에서는 한숨도 못 잘 수도 있다. 웬만큼 깊어진 우정을 공유하는 두 사람은 서로의 잠자리를 불편하게 하지 않으려고 조심 또 조심하느라 뜬눈으로 밤을 지새울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둘 중 하나는 엄마 품에서 잠을 잔 포근한 느낌을 받았을 수도 있다. 어쨌든 아침에 일어나서 밤새 서로의 행동을 알아차리고 소리 없이 웃는다. 이들의 입가에 번지는 미소는 부처의 미소를 닮지 않았을까? 그래서 이러한 체험을 정신적으로 승화시킨 우정을 나누는 사람들은 이른 봄소식을 매화꽃 한 가지를 보내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우정의 넓이와 깊이 그리고 높이
우리가 철저한 박애주의자가 아닌 다음에야 아무리 우정이 깊은 사이일지라도 마음을 씀에 있어서 미묘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는 모든 인간이 처한 상황이며 모든 친구에게 똑같은 우정을 베풀지 못하는 자신을 책망할 필요는 없다. 이는 자신의 감정을 허비하는 일일 뿐이다. 우정을 연습하는 넓이의 사귐과 깊이의 사귐으로는 아쉬움이 남았다면 높이의 차원이 있다. 이때 떠올릴 수 있는 한자 성어에는 막역지우(莫逆之友)가 있다. 이 한자 성어를 찾아보면 반드시 나오는 해설이 있다. 이 말이 나오게 된 배경은 장자가 말했다고 하는 막역어심(莫逆於心)이다. 요약하자면 사귄 지가 오래되지 않아서 약간은 서먹한 몇 사람이 모여서 삶에 대한 통찰과 자신들이 추구하는 삶의 이야기를 하면서 서로 쳐다보면서 웃었는데 아무도 그들의 마음에 거슬림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들은 친구가 되었다고 한다. 배경 이야기에는 이들이 초면이었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이것이 궁금한 이유는 초면인데도 삶에 대한 통찰과 추구하는 삶을 이야기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들은 일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들으면 이해하기가 힘들어 비웃을 수도 있는 이야기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께서 궁금해하면 좋겠다. 어쨌든 그들은 그렇게 친구가 되었고 장자의 글을 해설한 어떤 사람에 의해서 그들의 우정을 막역지우(莫逆之友)로 창작해 놓았다. 우리는 서로의 마음에 거슬림이 없었다는 내용에 주안점을 두어 보자. 우정을 연습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수많은 충고와 격려를 주고받는다. 충고와 격려가 효과를 나타낼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그렇다면 상대의 마음에 거슬리지 않는 충고와 격려는 어떤 것일까? 아마도 상대의 입장이 되어서 최대한 넓고 깊은 생각을 한 후에 상대의 본성과 개인적 성향과 취향을 고려한 충고와 격려가 아닐까? 이러한 태도는 쉽지 않으며 오히려 상대보다 자신의 우정이 힘들고 혼란스러워질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쉽게 충고하고 격려하려고 덤비며 받아들이지 않는 상대에게 더 큰 상처를 주기도 한다. 그러니 충고와 격려를 하기 전에 두 가지만 생각해 보기를 권고한다. 충고하려는 내용이 자신이 믿고 있는 가치를 강요하려는 것은 아닌지, 격려하려는 내용이 상대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것은 아닌지를. 막역지우에서 살필 수 있듯이 삶에서 얻은 인식과 추구하는 삶의 방향에 대한 공감대가 있다면 초면에도 친구가 된다. 충고와 격려를 할 수 있으려면 친구의 본성과 개인적 성향과 취향 정도는 파악하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니 친구의 고민을 해결해 주려고 애쓰지 말자. 그저 친구에게 말 없는 관심을 유지하고 그가 고민을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지켜보자. 우정을 높이의 차원으로 끌어올리려면 상대의 생각과 행동이 마음에 거슬리지 않는다는 맞장구를 치는 행위로는 되지 않는다. 특히 상대의 생각과 행동에서 내 마음에 거슬리는 부분에 대한 내 생각을 상대가 이해하지 못한다면 더더욱 힘들게 된다. 그러기에 현대사회에서의 우정을 만드는 연습은 과거의 시대보다도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다.
우정을 만드는 연습으로 수준 높은 인품의 차원으로 승화시킨 우정에 대한 한자 성어로는 지란지교(芝蘭之交)가 있다. 지(芝)와 난(蘭)의 사귐이라는 뜻인데 고상한 사귐이라고만 하지 다른 해설들은 찾지 못했다. 난의 향기는 맡기가 쉽지 않지만 한 번만으로도 각인이 되는 향기였다. 지(芝)는 지치 또는 상서로운 기운이 있다는 버섯이라고 하는데 실물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지치라는 식물도 향기가 난다고 하는데 경험은 없다. 이 둘이 어째서 고상한 사귐의 이야기에 등장하는지는 잘 이해는 되지 않는다. 각자의 상상력을 동원하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우리는 난은 군자의 품격을 대신한다는 강요된 학습의 기억이 있다. 지치의 뿌리는 자색(紫色)의 염료로 사용되기도 한다. 과거는 물론 오늘날에도 자색은 고귀함을 상징하는 색깔로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지란지교는 자색의 고귀함과 군자의 품격으로 어우러진 우정이다. 우정을 연습하면서 넓이와 깊이를 넘어서는 차원이 다른 우정에 대한 우아하고 고상한 표현이다.
이렇게 우정을 이해하고 나면...
사귐이 우정 연습의 시작이고 우정 연습의 열매가 친구다. 이러한 이야기의 목적은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우정을 생각하고자 함이다. 과거와 비교할 때 현대사회에서도 친구의 존재는 개인의 삶에 더 많은 영향을 줄 것이며 결단코 줄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각자가 이로운 친구의 기준은 다르겠지만 보편적으로 인정하는 이로운 친구와 평생을 함께하기를 소망하고자 하는 것이다. 삼익지우(三益之友)에는 정직하려 노력하고 성실하려 노력하며 견문을 넓히려고 노력하는 친구가 있다. 이러한 친구들이 곁에 있다면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의 끈이 더 단단해질 것이다. 그리고 삼익지우의 존재는 손자삼우(損者三友)가 접근한다고 해도 우정이 흔들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나의 영혼을 갉아먹으려는 사람을 친구나 벗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우정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는 것은 이들을 구별하고 끊어내는 부수적 목적이 있다. 아첨으로 살아가려는 사람의 말을 잘 구별해야 한다. 학창 시절의 얼굴이 가물가물한 사람이 졸업한 지 수년 만에 연락하면서 무척 보고 싶어서 힘들게 수소문했다는 말에는 경계심을 가져야 한다. 겉치레에 많은 공을 들이는 사람에게 주는 눈길은 내 눈을 아프게 할 뿐이다. 내면에 공을 들이는 사람은 목적이 없이는 겉치레에 많은 공을 들이지는 않는다. 그는 상당한 집중과 몰입이 요구되더라도 자신의 주변을 고요하게 유지하려고 한다. 그를 움직이는 평안한 몸짓과 평온한 표정은 상대를 따뜻하게 한다. 그는 명품이라는 것이 자신의 품격을 높여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수수한 차림에는 풍기는 온기가 있다. 말(言)만 앞세우는 사람을 상대하는 게 힘든 것은 그에게 진정성이 있는지를 알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의 특기는 말 뒤집기다. 앞에 한 말과 뒤에 한 말이 같은 말임에도 자신의 의도는 그것이 아니라고 해 버린다. 상대에 대한 이해나 배려는 안중에도 없으며 늘 자기 합리화로 상대의 진력을 소모하게 한다. 지금부터는 아첨을 잘하는 사람, 겉치레에 많은 공을 들이는 사람, 말만 앞세우는 사람을 손자삼우(損者三友)라고 하는 말을 기억에서 지워 버려야 한다. 이들에게 친구(友)라는 글자를 사용한 사람은 정신 나간 사람이다. 손자삼인(損者三人)이라고 하면 되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지식을 뽐내려 친구를 버렸다.
사기를 당한 친구에게 위로할 말의 정확한 표현은 ‘사기꾼에게 사기를 당했다’이다. 친구와 그 사기꾼에게 어떤 친분이 있었는지는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친구에게 사기를 당했다’라는 표현은 금기된 표현이라야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