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이 미친 짓일 리가?
나를 비워서 그곳을 그/그녀에게 내어주면
결혼은 상대가 첫사랑이냐? 마지막 사랑이냐? 의 종결점이 아니라. 더 큰 사랑을 얻기 위한 출발점이다. 결혼은 이 세상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는 더 큰 사랑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두 사람의 삶에서 더 큰 사랑, 끝없는 사랑, 눈부신 사랑을 자신의 찬란히 빛났던 한때로 기억하고 추억할 수 있음은 인간이 누리는 최고의 행복이다.
연애는 바람직한 관계에서 두 사람의 동의하에 한동안 지속되는 두 사람의 삶이며 연인은 이러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신화학자 킴벨은 말했다. 그는 결혼의 상징에 대하여 한 사물에 두 측면이 있음을 상징적으로 인식하는 인류가 만들어낸 장치이며, 이를 인식하는 것이 결혼의 가장 중요한 의미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결혼으로 반드시 더 강화해야 할 것은 성실이며, 결혼 후의 성실에 대하여 어떤 시련이나 고통이 따르더라도 진심으로 임하며, 이런 마음가짐에서 나오는 속이지 않는 태도, 약점을 따지지 않는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 결혼 후의 성실의 기준이어야 한다고 설교(?)하였다. 이러한 글을 접하게 되면 결혼 생활은 분명히 두 사람의 삶을 다른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과정임에 틀림이 없다고 확신하게 된다.
천륜이 만들어지는 유일한 길은 남녀가 행하는 인륜지사이다. 천륜을 만들어내기에 인륜의 큰일이다. 인륜지대사를 눈앞에 둔 여자가 있다. 그 남자와 결혼하려는 이유를 묻자 여자는 그 남자와 결혼하면 자신이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미소를 짓는다. 결혼은 일상의 차원을 영혼의 차원으로 나를 바꿀 수 있는 매우 얻기 어려운 기회이다. 인륜지대사의 목적이 인류의 생존이라는 생뚱맞은 말도 있다. 그러나 이는 개인에게는 너무도 멀리 떨어진 고려할 필요가 없는 목적이다. 결혼은 목표나 목적의 대상이 아니다. 결혼은 삶의 흐름에 변화를 주는 입문 의례의 하나이다. 입문 의례는 전해서 내려오는 비밀을 풀어내겠다는 개인의 강력한 의지가 개입된 의식(儀式)이다. 개인의 삶에서 통과의례와는 무게감이 다른 의식(儀式)이다. 결혼에 들어있는 비밀은 두 사람이 삶에서 풀어내야 한다. 비밀이 포함되어 있기에 모든 것에 우선하여 비밀을 풀어야 한다. 이 비밀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 두 사람이 필요하며 두 사람 각자의 삶이 모두 필요하다. 각자의 삶은 결혼의 비밀을 푸는 수단이 된다. 두 개의 삶을 하나의 삶으로 보이게끔 조화를 이루어 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결혼 후의 성실의 기준을 지킬 수 있다. 따라서 부부들에게는 비밀을 푸는 목적은 공유하되 수단을 개별화하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부부가 되기 전의 각자의 생각과 생활 습관은 각자의 몫이었다. 부부가 되어서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은 새로운 갈등이 시작될 뿐이다. 결혼을 결정할 때는 상대방의 조건에 대한 고려와 고민이 반드시 수반된다. 또한 조건과 상황에 대한 구분도 필요하다. 그리고 결혼에 대한 결심의 최종 버전은 내가 다른 사람의 삶을 받아들임에도 내 삶을 가꾸어 갈 수 있는가? 내가 다른 사람의 삶에 들어감에도 그 사람이 삶을 가꾸어 갈 수 있는가? 상대도 이런 생각에 공감할 수 있는지가 포함되어야 한다. 결혼은 예측하면서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가꾸어 가면서 사는 삶이다. 예측한다는 것은 지금의 조건과 상황으로 미래의 현재를 상상하는 것이다. 결코 만족할 만한 상태가 된다는 보장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결혼 후의 기준이 성실이 된다. 그런데...
결혼은 미친 짓이다
거안제미(擧案齊眉)와 조강지처(糟糠之妻)의 이야기는 실제 인물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거안제미(擧案齊眉)는 인륜지대사를 주도한 아내의 남다른 행동거지에 관한 이야기이다. 남편이 될 사람의 인품을 아내가 선택했기에 주도했다는 것이다. 아내가 살고자 한 삶의 방식을 남편이 이해해 줌으로써 아내는 밥상을 눈썹까지 들어 올려서 결혼 후의 성실의 기준을 실천한다. 이런 행동이 나올 수 있는 배경은 남편의 성실한 태도가 수반되지 않으면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 아내는 부처라는 존경을 받아야 함이 마땅하다. 굳이 그렇게 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애처로움은 있다. 이후의 이들의 삶에 대한 기록은 남편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인데 아내에 대한 평가는 없다. 이제까지 우리는 거안제미의 주인공인 아내가 밥상을 눈썹에 맞추는 것을 남편에 대한 공경이라고 해석해 왔다. 그리고 이 해석을 일반화시킴으로써 거안제미(擧案齊眉)의 핵심인 아내의 기이하기까지 한 공경은 공경할 수 있는 성실한 사람이라야 한다는 것에 혼란을 주고 말았다. 남편이 술주정, 폭력, 불한당의 행동을 하거나, 아내를 하인이나 종처럼 대한다면 과연 이런 행동이 나올 수 있었을까? 밥상을 눈썹에 맞추는 공경의 태도는 자발적이었으며 이러한 공경에는 남편의 성실에 기반한 더 높은 차원의 인품을 아내가 인정해야 함을 놓치면 안 된다. 그래서 이는 순전히 특별한 개인의 결혼 생활이었을 뿐이다.
조강지처(糟糠之妻)는 인륜지대사를 유지해 준 성실했던 아내의 헌신에 대한 남편의 성실에 관한 이야기이다. 지게미와 쌀겨로 끼니를 이어가는 삶을 아내에게 강요해 서는 안된다는 태도를 읽어내야 한다. 지게미와 쌀겨로 끼니를 이어가는 아내가 힘겨운 결혼 생활에도 남편의 곁에 있어 준 것은 남편의 성실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남편은 목숨을 내놓는다. 조강지처의 백미는 모든 이의 생사여탈을 쥐고 있는 황제가 권했음에도 남편이 꿈쩍도 하지 않았음이다. 물론 황제가 임의로 떠본 것은 아니었다. 홀로 된 누이가 지내는 모습이 안쓰러워진 황제가 누이에게 재가의 의향을 묻자 이 이야기에 나오는 남편을 언급한 것이다. 궁중이라는 황제의 주머니에 있는 수많은 사람 중에서 누이의 눈에 든 사람을 황제는 떠 본다. 지금 당신의 지위라면 친구를 바꾸고 아내를 바꿀 수도 있지 않냐고. 남편이 황제를 앞에 두고 대답한다. 자신은 지게미와 쌀겨로 끼니를 이어왔던 아내를 바꿀 수는 없다고. 남편이 이 정도의 성실한 인품이 있는가? 이 정도의 성실한 인품을 결혼 전에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그래서 결혼 후의 성실의 기준을 지키는 것에 진심이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이도 순전히 특별한 개인의 결혼 생활이었을 뿐이다. 조강지처는 미래형이 아니라 과거형이다. 남편이 조강지처의 삶을 각오해 주기를 요구하고 아내는 조강지처의 삶을 살지 않도록 해주기를 요구하는 결혼은 애초에 성립되기 어려운 조건이다.
현모양처(賢母良妻)는 우리나라의 근대 여성 교육의 이념으로 개발된 것이라고 한다. 현모양처는 인륜지대사를 유지해 준 아내가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인 것 같기는 하다. 인륜지대사의 의미가 흔들리고 있는 현재의 한국 사회에서 현모양처는 조강지처와 거안제미가 품고 있던 약 2000년의 압력을 그대로 받아내고 있는 한자 성어인 것 같다. 이는 남성의 지위가 절대우위에 있던 사회에서 벌어졌던 일이다. 세월은 흘렀고 사회는 변화되었으며 여성의 사회진출은 확대되었다. 대부분 국가에서 여성들의 지위는 향상되고 의식이 변화되어 가는 정도에 비례하여 남성들의 기득권 유지에 대한 집착은 더 강해지는 것 같다. 남녀평등을 지향하겠다던 의지를 포기한 현재의 한국 사회에서는 아직도 관습적으로 결혼 생활의 올가미로 작동하고 있는 것은 칠거지악 같다. 이혼의 사유를 면밀하게 검토할 수도 없지만 그 이혼 사유에 숨겨진 서로의 억지 주장들을 분석한다면 대부분 칠거지악의 개정판이라고 생각한다. 칠거지악에는 예외 조항들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미 마음이 돌아선 사람들에게 그러한 조항들은 의미가 없다. 단지 자신들의 주장을 더 왜곡시킬 뿐이다. 이혼은 천륜을 만들고 끝까지 온전히 지키지 못했으며 인륜을 만들고 끝까지 유지하지 못한 성실성의 상실이다. 이래서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인어아가씨의 희망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인어아가씨의 희망은 왕자가 칠거지악이라는 전가의 보도는 숨긴 채 조강지처라는 단검만을 던지다가 현모양처라는 활을 개발하여 사용했기 때문에 물거품이 되었다. 거안제미는 식탁의 도입으로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조강지처는 한국 사회가 쌀 식량의 자급을 달성하면서 사라지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된 이 한자 성어들을 대신하여 새로운 강자가 등장하였으니 현모양처이다. 이는 거안제미나 조강지처에서 묵시적으로 강요되었던 여성의 역할을 명시적으로 강요한 꼴이 되었다. 그래서 인륜지대사는 미친 ‘짓’이 되었다.
결혼이 미친 짓이 된 이유는 남자들은 조강지처의 삶이라는 넘사벽을 당연하게 요구하고, 여자는 넘사벽의 삶을 살지 않도록 해주기를 당연히 바라기 때문이다. 남녀에게 넘사벽인 이것이 현모양처에 몰렸다. 이 둘은 과정과 결과에 대한 평가이지 단순히 해야 한다거나 피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심어볼 수 있는 한자 성어는 아니다. 양처는 남편의 성실에 대한 아내의 성실임에도 남자들은 양처를 자신에게 절대복종해야 한다는 잘못된 이해로 여자들을 압박하고 있으며, 여자들은 절대로 거친 밥을 먹는 세월을 견디기 싫어함을 남자들에게 주지 시키고 있다. 결혼이 미친 짓이 되는 이유는 미친 수준을 요구하는 미친 남녀들이 있기 때문이다. 남녀 모두 먼저 거친 밥알을 보기나 했는지 자문해 볼 일이다.
남녀의 역할은 고정된 것인가?
우리의 일상에서 ‘밥상’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혼자 살던, 가족과 살던, 회사에서 끼니를 해결하던 우리는 매일 밥상을 대하게 되어 있다. 물론 지금은 식탁이 밥상을 대체한다. 하지만 식탁은 고정된 큰 밥상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래서 ‘밥상’은 일상을 영위하는 가장 기초인 셈이다. 그러니 밥상은 일상의 일처럼 그냥 흘러가는 것이다. ‘밥상’은 자신이 아닌 사람을 위하여 고도의 정신과 시간을 집중하여 준비, 배려하는 정성의 결과물이다. ‘밥상’을 매일 지나가는 일상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거안제미, 조강지처, 현모양처라는 한자 성어의 다른 차원이 눈에 들어온다.
이들 한자 성어와 연관을 지어 생각해 볼 것은 남녀의 역할은 고정된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거의 모든 것이 남성 영역이었던 사회에서 여성의 남성 영역으로의 침투는 흥밋거리였다. 남자의 일을 여자가 할 수 있겠는가?라는 조소와 여성의 역할을 거부하는 여자라는 낙인을 찍겠다는 남성의 폭력적 시선을 사회적으로 용인하던 시대가 있었다. 이는 오랫동안 사회적 관습으로 해석되어 온 한자 성어들의 영향도 무시를 못 할 것이다. 남녀 칠 세 부동석이나 부부유별과 같은 한자 성어는 상황 대처를 위한 말이지, 남녀의 역할 고정을 위한 말은 아니다. 만약, 이 말의 원전에 적힌 글자를 그대로 해석하여 고정된 남녀의 역할을 명시한다고 하더라도 현재의 우리가 그대로 따라야 할 필요는 없다. 관습이 된 남녀역할고정의 악영향은 남녀역할의 시작인 상황과 결과의 모습을 다분히 오해하고 있다. 즉, 시작인 상황을 결과의 모습으로 대체시키는 고정관념을 형성해 버리는 것이다. 조강지처의 생활 과정과 거안제미의 상황을 거쳐야 현모양처라는 결과가 나오는데, 시작부터 현모양처의 기준을 세워놓고 사람을 그 기준에 맞추고 있다. 거안제미와 조강지처의 두 남자주인공이 보여주는 정도의 인품과 두 여자주인공이 보여주는 인품이 만나야 나오는 평가가 현모양처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현모양처라고 존경을 담은 시선을 보낼 때 그 눈길을 받는 사람도 고맙다는 시선을 보낼까?라는 질문을 하게 되면 떠오르는 여성들이 있다. 조선시대 선비라는 사람들의 부인들이다. 구체적으로 선비와 청백리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아내들이다. 청백리도 선비들의 집단에 속한다. 하지만 청백리의 아내는 더 딱하다는 생각이 든다. 선비들의 좌우명은 자신의 학식과 경륜을 펼칠 때를 만나면 나라와 백성을 위해서 일하고, 때를 만나지 못하면 물러난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들의 좌우명은 그렇다 하더라도 식구들의 끼니는 어쩌냐는 것이다. 대부분 선비는 글을 읽는 사람이고 양반이다 보니 아마도 끼니는 굶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기록에 별로 등장하지 않는다. 끼니를 굶는 선비들이 기록에 나오며 그중에서도 벼슬을 하면서도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선비들, 즉 청백리들이 기록에 나온다. 그런데 역사의 기록에도 남녀역할의 고정된 인식 때문인지 그들이 가난했다는 것이지 그 가난을 어떻게 이겨냈는지에 대한 기록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물론 이는 내가 한문책을 들춰볼 실력이 되지 않아서 이런 말밖에 할 수 없는 것이다. 선비들이 그렇게 청빈하게 살았다면, 그 소중한 밥상을 차려야 하는 그 부인들은 어떠한 삶을 살았을까를 생각해 보면 애잔하기도 하면서, 엉뚱한 생각도 든다. 무능한 남편과 수완이 좋은 아내. 그래서 청백리 남편의 기록을 돋보이게 하려고 조강지처의 힘들었던 기록이 의도적으로 배제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조선 선비들의 일화를 기록한 많은 책에 거안제미나 조강지처라는 기록들이 많이 보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초심을 끝까지 지켜낸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일반상식인 지식을 얻기 위해 거안제미나 조강지처의 뜻을 암기하는 용도는 한정되어 있다. 이러한 용도를 넘어서려면 이 이야기에 보이는 남녀의 인품과 부수적으로 남녀의 역할은 고정되어 있는가를 생각해 봄 직하다. 가끔 지하철이나 카페에서 대학생으로 보이는 젊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릴 때가 있다. 놀라는 경우는 혼자 사는데 여자가 할 일을 하려고 할 때 짜증이 난단다. 남녀의 역할을 고정된 것으로 보는 사고다. 그러면서 현모양처를 운운한다. 결론은 이렇다. 남녀 구분과 할 일의 성격에서 먼저 살펴야 하는 것은 일의 성격이라는 점이다.
낙향하면서 아내와 아이들은 도시에 있게 하고 혼자서 고향으로 들어왔다. 부모님과 더부살이하다가 혼자서 살림을 냈다. 농촌이니 농사일이 끝나면 밥상을 차려야 했다. 가족이 함께 있을 때는 아내가 밥 짓기, 설거지, 빨래하기, 청소하기. 집 안의 대부분을 처리해 주었다. 나는 전등 갈고 벽에 못 박는 것이 전문이었다. 그러나 혼자 살게 된 후에는 모든 것을 내가 해야 한다. 한때의 자취생 노릇을 믿고 있었으나 그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나는 농사를 짓는 사람이다. 공부나 직장을 다니지 않고 농사를 짓는다. 학생이나 직장인과 농사를 짓는 것은 시간에서 많은 차이가 있다. 학생과 직장인들은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시간을 쪼갤 수 있으나 서툰 농부의 농사는 그날의 해가 떨어져야 하루가 끝난다는 것이다. 혼자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니 해가 떨어져야 집에 돌아오고 그때부터 아내가 해주던 일을 처리해야 한다. 지치면 건너뛴다. 악순환이 시작된다. 하루에도 몇 번씩 옷을 갈아입어야 하는 어느 여름철, 동네 아주머니가 지나가면서 애들 엄마 생각나지 하면서 지나간다. 비가 오는 날 몰아치기로 빨래를 하던 날이었다. 웃으면서 보내고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아내는 이 많은 일들을 어떻게 불평도 없이 해주었나. 그때 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남자와 여자의 할 일이 고정된 것이 아니고, 남자와 여자가 좀 더 잘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즉, 남녀역할의 구분과 할 일의 구분에서 남녀역할에 대한 구분보다는 일이 먼저 생겨났다는 것이다. 밥 하기, 반찬 만들기, 설거지하기, 빨래하기, 청소하기의 일은 반드시 여자가 해야 하는 일이 아니고 여자들이 하면 훨씬 더 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남자가 더 잘할 수도 있다. 잘한다는 것은 상대적인 판단기준이기는 하다. 혼자 사는 사람이라면 이 모든 것은 직접 해야 한다. 물론 여자가 혼자 산다면 전등을 갈고, 벽에 못을 박기는 직접 해야 한다. 당연히 좀 미숙하더라도 그건 감내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남녀의 역할 구분과 강요로 이어지게 되었을까? 아마도 거안제미, 조강지처, 부부 일심동체의 말을 역할 강요의 도구로 사용하여 온 측면이 있다고 본다. 이런 한자 성어의 해석에는 남녀의 차별에 무게가 더 실린 해석과 이해들이 많다. 현자들은 남녀의 차이는 있어도 차별은 없어야 한다고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차이와 차별에서 오는 해석 중에 주목할만한 한자 성어로는 남녀 칠 세 부동석이 있다. 차별에 무게를 두면 ‘동석’은 ‘같은 공간’으로, 차이에 무게를 두면 ‘같은 의자’로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차별에 무게를 두면 참여가 원천적으로 봉쇄되고 차이에 무게를 두면 다른 의자를 준비할 수 있다. 그래서 차별에 무게를 두면 남자가 하지 못하면 여자도 하지 못한다, 여자가 하지 못하면 남자도 하지 못한다는 사고로 이어지게 된다. 차이에 무게를 두면 남자는 하지 못해도 여자는 할 수 있을 것이다, 여자는 하지 못해도 남자는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사실 인간 세상의 일에서 반드시 남자와 여자가 수행해야 할 일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 그 나머지의 일은 다만 효율성의 문제일 뿐이다.
어떤 일을 남성의 일과 여성의 일로 구분하는 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훨씬 더 효율적이라서 구분했을 것이다. 그러한 구분이 ‘차이’가 아니라 ‘차별’로 고착화가 되리라는 것은 조물주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차이와 차별의 가장 큰 구분은 행위의 개입에서 드러난다. 그 행위의 성격을 규정하고 남녀를 배정하는 것은 차별이고, 행위 자체에 남녀를 배정하는 것은 차이다. 두 가지가 비슷하게 이해될 수도 있으나 이 혼란의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차별적 태도가 아니라 차이에 대한 사유이다. 이제는 같은 일에 대하여 남녀가 같은 능력을 발휘할 수가 없음을 일곱 살 배기도 안다. 지금은 이 한자 성어가 생긴 당시보다 훨씬 많은 접촉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제는 일곱 난 아이들을 같은 자리에 앉히는 것을 넘어서, 일곱 난 아이들에게도 남녀가 서로 잘하는 일이 있음을 인정해 주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태생적으로 남녀가 잘할 수 있는 일이 있다. 물론 일반화시킬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긴 하지만 사회를 유지하는 것은 본성에 따른 일을 수행하는 것이다. 인간은 혼자서 모든 일을 처리하는 것보다 남녀의 잘하는 부분을 서로 보완함으로써 문명을 발전시켜 왔다. 오늘날 남녀의 불화는 일의 성격에 대한 생각의 차이보다는 남녀의 역할을 고정시키고 강요한 결과로 보인다. 남녀의 역량과 남녀의 역할을 혼동하는 데서 오는 불화라고 본다. 남녀역할의 구분은 차별적 태도이며 남녀역량의 구분은 차이에 기반하는 태도이다. 생각을 역할에 고정시키지 말고 역량까지 넓혀본다면 갈등이 누그러질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조강지처는 어려움을 극복한 상황에서 내리는 판단이지, 어려움을 극복해 가야 한다는 당위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며, 또한 남편의 모든 행위에 대해서 아내는 그 모든 것을 참아야 한다는 강제성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다. 그러므로 결혼 생활은 고정된 남녀역할의 강요를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과 결혼으로 하면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남녀의 역할을 폭넓게 적용하여 더 좋은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을 실현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결혼의 상징은 한 사물에 두 측면이 있음을 상징적으로 인식하는 인류가 만들어낸 장치라고 한 신화학자 킴벨의 말을 이제는 새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