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지교. 리더였던 사람들,
리더라 하오리까?
‘창조’라는 말은 어느 날 갑자기 우리 눈앞에서 마치 눈발처럼 어지러이 흩날리고 있다. 인류는 늘 이러한 행위를 해왔으며 그 결과 오늘날과 같은 문명을 이루었다. 그러나 발전이라는 기준으로 자본주의식 ‘창조’라는 개념은 좀 더 생각해 볼 것이 있는 것 같다. ‘창조’라는 단어는 어느 한 분야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남발할 성질의 단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이 단어는 인간의 일상생활에서 있는 듯 없는 듯 활용되고 있으므로 한 분야의 목표를 위한 강조가 다른 분야를 위축시키고 차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식이 경제적 목표를 달성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한 때를 지배했다. 이제는 지식의 단순한 배열이나 지식이 전하는 내용으로는 그 목표를 달성하기가 쉽지 않음을 알게 되면서 지식을 창조하는 일에 초점을 둔 목표수정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러자 모든 분야에 ‘창조’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녔다.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은 분야에도 이 수식어는 붙어 다녔다. 정치에서도 이 수식어를 붙이고자 하였으나 ‘창조’의 본래의 뜻이 가지고 있는 힘에 정치는 화답할 수 없었기에 슬그머니 사그라지고 말았다. 수십 년 동안 과거에 묻혀 진흙탕 싸움을 하는 사람들이 미래의 그림을 상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폴레옹이 자신의 사전을 들고 불가능은 없다고 아무리 외쳐봐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변방의 하급 관리가 유럽을 흔드는 변혁을 만들어 내었음을 우리의 정치꾼들은 지식으로만 받아들인 것 같다. 평생을 지식을 나열하는 데 몰두해 있는 사람들이 미래를 상상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을 듯하다. 창조적 사고를 위해서는 생각하면서 생각을 만들어야 한다. 이는 생각의 재료들인 지식을 나열하고 그것들을 통찰하는 하나의 생각을 뽑아내는 것이다. 이것은 지혜의 다양한 모습 중의 하나일 뿐이다. 지혜를 고정된 지표로 설정하게 되면 지식을 나열하는 것과 같은 폐해를 답습하게 된다. 지식을 나열하는 도구로 사용해서는 자신이 능력을 갖추었음을 입증하지는 못한다. 지식으로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 내는 도구로 활용할 수 있을 때 능력을 입증할 수 있게 된다. 이미 생산된 지식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지식을 생산하려고 시도하는 태도 속에 지혜가 자리한다. 누군가가 지혜라고 하는 것을 나열해 놓고 지혜를 안다는 착각에 빠지는 것은 초라할 뿐이다. 나열된 지혜가 또 다른 지혜가 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생각을 해야 함을 아는 것이 바뀐 지혜의 모습이다. 일상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는 지식의 실현에 목표를 두기보다는 지식을 활용하여 지혜로 만들고 만들어진 지혜를 어떻게 사용하는가 하는 것이다. 생각을 생각으로 지식을 지식으로 가지고 있는 한 우리는 나열형 인간일 수밖에 없다.
자연인으로서 사람에 대한 자신만의 신념이나 철학이 정치의 근본이다. 정치를 하겠다는 사람이라면 정치 신념이나 정치철학을 가지고 있다고 침을 튀긴다. 가끔 인간에 대한 철학과 정치에 대한 철학을 혼용하는 경우가 있다. 대부분 경우에 최악으로 치달리다가 끝난다. 세계대전과 지금도 끊이지 않는 전쟁, 내란이 대부분 여기에 속한다. 그리고 또한 대체로 그들이 가장 많이 하는 행동은 국민의 뒤로 숨는 것이었다. 국민을 볼모로 하는 것은, 상대를 비방할 때는 가장 좋은 무기이지만 자신이 당할 때는 너무 나쁜 무기라고 하는 최악의 비겁한 행동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서 잠잠해지면 때로는 다시 진흙탕으로 돌아가기도 한다. 그때는 세상에서 가장 역한 냄새보다도 더 나쁜 영향을 끼친다. 역한 냄새는 피하거나 제거하는 대처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이 풍기는 무색무취의 역한 기운은 대처할 방법이 없고 어느 날 구렁텅이에 빠져서 헤어날 수 없는 상황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흐리는 물은 쉽게 가라앉는다. 그러나 미꾸라지가 물을 흐리면 주변의 고기들이 움직이고 더욱 탁해진 물속에는 메기의 어두운 그림자가 나타난다. 어두운 보호색을 지닌 메기가 그 식욕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주변이 모두 어두워야 좋다. 메기는 야행성이라서 밤에 먹이활동을 주로 한다. 흐리고 어두운 물속에서 먹이활동을 한다. 이런 메기에게 작은 물고기가 많은 맑은 물에서 먹이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미꾸라지의 존재가 고마운 것이다. 메기에게는 한 마리의 미꾸라지라도 대단히 고마울 것이다. 송사리와 작은 물고기들은 강자를 위해 쓸데없이 물을 흐리는 미꾸라지가 엄청 많이 미울 것이다. 그래도 물속에서 살아야 하는 것은 숙명이다. 우리 사회는 이러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온갖 종류의 얕은 물웅덩이가 너무나 많다. 심지어 미꾸라지를 잡아야 할 사람들이 웅덩이를 뒤집어 놓는 일을 서슴 대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이 필요하다면 최악의 비겁한 행동도 서슴 대지 않는 미꾸라지를 끊임없이 맑은 물속으로 보내고 있다. 그러면서 사회와 정치와 법이 완벽하지 않다는 말을 뻔뻔하게 내뱉는다. 이런 말은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의 입에서 결코 절대로 나와서는 아니 되는 말이다.
정치꾼들이 비틀고 휘고 부러뜨리면서 정치를 왜곡시키는 과정과 상황을 우리는 지켜보고 있다. 학을 학으로 연구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학위와 명예에 집착하는 동안 그들이 연구한 학문은 세상의 변화를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개인이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을 하듯이 학자들은 자기의 학문이 무엇인가를 질문해야 한다. 정치인도 같은 질문을 해야 한다. 법과 관계된 사람들은 더 엄정한 질문과 절제된 행동을 해야만 한다. 개인의 질문이 정답이 없듯이 학자들의 질문도 정답은 없다. 정치인도 법조인들도 정답은 없다. 그러나 학자, 정치인, 법조인들의 의무감과 책임감은 개인보다는 크고 무거워야 한다. 그래야 정치인, 법조인, 학자로서의 부담을 감내한 사람들에게 보내는 국민의 시선이 따사로울 것이다.
미꾸라지를 잡아내지 못하는 우리의 정치 상황은 왜 이런가? 군부 독재 후 민주 정부라는 곳에 몸을 담았던 정치꾼들은 민주화를 지지해 주었던 국민의 저항 의지를 꺾으려 안간힘을 썼다. 대표적인 예가 그들이 자주 누리는 입법부의 특권이다. 자신들의 특권만은 유지하기 위해서 온갖 방법을 동원하였다. 이는 마치 조선시대 당파싸움을 일으켜 놓고 왕에게 뒤집어씌운 것과 다를 바는 없어 보인다. 그러한 정치꾼들이 저지른 최악의 상황은 젊은 사람들에게 연중 보릿고개를 만들어 놓고 희망 고문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88만 원은 보릿고개의 변형된 이름이자 모습이다. 우리 세대나 전 세대가 보릿고개를 없앴다고 자긍심을 가지면서 으스대고 있을 때 보릿고개는 모습을 변모시키고 있었다. 역사에서 인간과 같이 움직이는 현상이 모습을 바꾸는 것은 그 현상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사고와 행동이 문제이다. 우리가 보릿고개의 실체를 인간의 외부에서 찾으려고 하는 순간 그 실체는 모습을 바꾸고 다른 세상으로 숨었다. 이것은 마술이 아니라 현실이다. 누구에게는 과거이고 누구에게는 현재이고 누구에게는 미래이다. 그런데 보릿고개는 그 성격과 특징을 세상이 변하듯이 변화시킨다. 보릿고개는 배를 고프게 한 것이 육체적 아픔이었지만 변형된 보릿고개는 꿈과 희망이라는 정신을 황폐시켰다는 점에서 가슴이 아리고 뼈가 아프다. 이러한 상황이 보여줄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를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사람에게서 육체적 고통도 물질적 고통도 꿈도 희망도 사라지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되는가는 이미 사회의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자신들의 실수를 참회하고 인정하는 진정한 리더를 만나지 못하는 세대는 내일을 상상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한자 성어의 지식으로 보면 진정한 우정이지만 이야기를 관통하는 주제는 진정한 리더의 표상인 이야기가 있다. 내삶의 리더로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면 인상여의 관용과 포용을 품는 자만(自慢)을 가져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하겠다.
내삶의 리더로 살던 사람, 인상여: 내삶의 리더가 된 사람, 염파
문경지교(刎頸之交). 어떻게 이해하였길래 이 사자성어를 목이 잘리어도 변치 않는 우정으로 해석했는지가 조금 아쉬웠고 약간은 헛갈렸다. 이 사자성어가 목숨을 버릴 정도로 끈끈한 우정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나라에 대한 충성을 이야기하는지가 아리송했었다. 사자성어의 뜻 해석은 우정을 이야기하고 있으나 내용은 나라에 대한 충성으로 서술되어 있는 것 같았다. 왜? 사마천은 이야기를 우정에 방점을 두었을까? 아니면 후세 사람들이 우정에 방점을 찍고 해석을 한 것일까? 오늘날 우리가 이 한자 성어를 이해함에 우정에 방점을 두고 이해한다면 현대의 우리가 목이 베일 정도의 일을 겪을 일이 있을까? 충성에 방점을 두고 이야기한다면 당시의 조나라의 상황과 다르니 그도 현재의 우리가 얻는 것은 그렇게 많지 않다고 하겠다. 물론 사자성어의 뜻을 그대로 받아들여 지식의 축적에 머문다면 그것도 의미가 있을 터이다. 하지만 초고속의 정보가 파도를 치는 현대의 생활에서 2000년이 지난 이야기를 압축한 사자성어를 머릿속에 넣어두는 것으로는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된다.
문관으로 외교를 담당하던 인상여(藺相如)와 백전노장의 무관인 염파(廉頗)는 전국시대 조(趙) 나라의 고위층 인물이었다. 문관인 인상여는 이웃 나라 왕이 탐내는 구슬을 가지고 진나라와 담판하여 영토를 확장했다. 무관인 염파는 백전노장으로 전쟁을 통하여 영토를 넓힌 공이 컸다. 그런데 인상여의 직위가 염파보다 위의 직급이 되자, 염파가 속이 상했다. 그래서 인상여와 담판을 지으려고 하였으나 인상여는 여러 가지 핑계로 조정에 나타나지 않고, 염파가 멀리서 보이면 길을 피해 다니곤 했다. 인상여를 따르던 사람들의 볼멘소리에 인상여는 강대국인 진나라의 왕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자신이 염파와 부딪히지 않으려는 것은 진나라와 이웃한 조나라의 위급함을 먼저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했고, 인상여의 말이 염파의 귀에 들어가자 염파는 자신의 소견이 짧았음을 인상여에게 사죄하고, 목이 베이더라도 변치 않은 사귐을 유지하는 문경지교의 사자성어를 남기게 되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우리 속담이 있다. 이 한자 성어에서 사촌은 누구이고 배가 아픈 사람은 누구인가? 우리 속담에 비추어 본다면 사촌은 인상여이고 배가 아픈 사람은 염파라고 단순하게 생각할 수 있을까? 인상여는 어쨌든 한 번의 외교담판에서 승리함으로써 높은 지위를 가졌다. 염파는 수많은 전쟁에서 공을 세웠으나 문제는 인상여보다 직위가 낮았다. 전쟁으로 나라가 유지되던 시대에 장수가 후한 대접을 받지 못함이 서운했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무관답게 염파는 자신의 기분을 숨기지 않았다. 여기까지 보면 우리 속담의 내용과 잘 맞아 들어간다.
우리는 관용과 포용을 나의 외부에 있는 것들을 나의 내부로 끌어들이는 행위로 보는 경향이 강한 것 같다. 항상 관용과 포용은 나의 내면의 넓이와 깊이로 타인이나 외부의 상황을 품는 것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그렇다면 인상여가 자신을 피하는 이유를 들은 염파의 행동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단순히 직설적이고 행동 우선적인 속 좁았던 장수의 개과천선으로 볼 것인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상대의 선한 뜻을 듣고 나서 염파와 같은 행동을 보일 수 있을까? 쉽게 답할 수 없는 문제라고 본다.
현대의 리더들이 품어야 할 관용과 포용은 기존의 내면과 새로운 외부의 상황이 리더의 내면과 내면을 충돌시켜 새로운 더 높은 시선을 만들어 가는 태도여야 한다. 본인의 행동이 부끄럽다는 것은 타인이나 사회가 만들어 놓은 기준이다. 염파가 뒤늦게 자신의 행위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인상여에게 보인 행동은 당시 사회적 기준으로 본다면 지나치다고 한 사람들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아무리 인상여가 자신보다 직위가 높다고 전쟁영웅인 장수가 자신의 소매를 걷어 맨살을 드러내고 가시나무를 지고서 사죄할 것까지는 없다고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염파는 사회적인 기준이 아니라 자기 내면의 기준을 적용하여 기존의 자기 자신을 뛰어넘는 관용과 포용을 보여준 것이다.
우리가 친구의 우정을 이야기할 때 최고로 꼽는 또 다른 사자성어로는 관포지교가 있다. 관중과 포숙아에만 초점을 맞추면 관포지교를 반만 이해한 것이다. 나는 관중과 포숙아의 관계 이후에 설정되는 관중과 환공의 관계가 더 흥미롭다. 전제군주의 막강한 힘이 발휘되던 시기에 자신의 생명을 위협한 관중을, 친구 포숙아의 추천으로 받아들인 환공의 관용과 포용은 덜 조명받고 있다는 느낌이다. 당시의 최대 강국을 이룩한 것이 어찌 관중의 노력만으로 이뤄졌겠는가? 환공도 자신의 휘하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른 관중을 경계하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권력을 맡겨서 부국을 이룩했다는 기록에는 그러하였기에 환공은 천하를 제패했다고만 실려있다. 사자성어를 기존의 기준인 우정에 치우쳐서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반만 이해했다고 보는 까닭이다. 미래는 상상하는 사람들의 것이라는 말은 이제 현대의 격언이 되었다. 상상은 없는 것을 만들어 가는 고단한 작업이기도 하지만, 기존의 것을 다르게 해석하고 상상하는 것도 상상력의 중요한 덕목이다.
여담으로 사촌의 땅 사기로 배가 아픈 심리는 저 멀리 프랑스에도 있었다. 프랑스 중남부 지방의 페리고르에서는 무를 많이 수확하기 위해서 ‘이웃집 무는 좁쌀만큼, 친척 집 딸기는 씨알만큼, 우리 집의 무는 소머리만 하게 해 주소서’라는 주문을 외우면 무를 많이 수확할 수 있다고 믿었다고 한다. 그러니 괜히 인간사에 관한 속담으로 의기소침해지지는 말자.
리더가 가져야 할 조건들은 시대에 따라 많이 변화해 왔다. 그러나 어느 시대에서나 가져야 할 조건으로는 시대 상황에 대한 인식이다. 시대 상황과 관련된 사자성어가 명확히 구분되어 전해지지는 않는 것 같다. 리더로서의 조건을 갖추기 위해서 사자성어를 읽고자 한다면 창조적 상상력이 많이 갖추어야 한다. 사자성어들을 그 시대 상황에서 읽고 이해하고 분석하여 현재의 시점에서 적용, 대비, 분석, 창조 등의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젊은 사람들이 점수를 획득하기 위한 지식의 수준에서 사자성어를 읽는 것은 사자성어에서 시대 상황을 읽고 예측하기 위한 지혜를 찾아내기에는 어려운 작업으로 보인다. 시대 상황의 인식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박히는 시기는 나이가 어느 정도 작용한다. 이것은 사자성어의 고안자들에게서 보이는 나이나 경륜과도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한다.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라는 한자 성어는 관리들의 혹정을 비판하는 한자 성어다. 관리들의 혹정이 관리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것은 그 시대나 현재나 변함없는 현상이라는 것은 역사는 긍정적으로 발전한다는 논리를 무색하게 하기도 한다. 민주주의를 국가체제로 공표한 국가가 대부분인 현재에도 지구촌의 많은 나라에서 벌어지는 혹정으로 많은 사람이 삶과 죽음의 경계에 내몰리고 있는 상황들이 거의 매일 언론에 오르내린다. 얼마 전만 해도 어느 지역에서 이러한 소식이 나오면 며칠간 언론에 오르내리던 소식들이 이제는 매일 다른 지역에서 발생한 일이 매일 언론에 오르내리는 실정이다. 이것은 역사의 극단적인 경우에서 하나이겠지만, 역사의 퇴보라고 볼 수밖에 없지 않은가? 2,000여 년 전 산속에서 차라리 호랑이가 덜 무섭다고 했던 여인과 현재의 난민으로 떠도는 아이와 엄마의 모습은 데자뷔가 아니라 실제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산업화를 성공적으로 이루었고, 민주화도 달성했다고 세계가 인정하는 우리의 현재의 모습은 어떤가? 정부의 혹정은 사라졌는가? 정부 정책의 기준이 마련되고 안정되어 가는 우리의 현재 시점에서 의미가 없어진 한자 성어인가? 이 한자 성어가 현재 우리에게 던져주는 의미를 찾아본다면 확장된 시대 상황인식이라고 본다. 몇 년간 우리 사회에서 벌어졌던 행정부의 일탈, 수십 년간 제 역할을 내팽개치고 있는 입법부의 저급한 행태, 사심은 없었다고 강변하는 전직 사법부의 고위층들의 작태들이 과연 민주화를 이루었다고, 산업화를 이루었다고 자부할 수 있는 시대 상황인가? 전 연령층의 고용불안과 국가정치는 호랑이를 무서워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여인의 목소리와는 무관한 것인가? 가정(苛政)은 끝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바꾸면서 늘 우리 곁에서 호랑이보다도 무섭다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내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