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하는 삶
흔들리는 삶을 지탱하는 힘
『태사공서(太史公書)』는 명칭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관직이 태사(太史)인 사람이 지은 책이다. 그럼에도 세간에 오르내리고 국가의 관심을 끌면서 『태사공서』는 사기(史記)라는 이름으로 인류 역사의 유물로 보관되었다. 이 책을 지은 사마천이 개인적으로 이러한 위대한 평가까지도 염두에 두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자신의 행위가 떳떳했음을 후세인들이 알아줄 것을 기대한 것은 맞는 것 같다.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나 임안(任安)에게 보내는 서신(報任安書)에서 확실히 이런 생각을 읽을 수 있다.
불혹(不惑). 태사공서(사기)를 지은 사마천이 혹독한 흔들림을 겪게 된 것은 그의 나이가 40대 무렵이었다. 그때까지 가졌던 확고한 신념으로 억울하다고 확신한 어떤 장군을 변호하였으나 절대 권력자의 심기를 어지렵혔다는 이유로 목숨을 목전에 두게 되었다. 죽기보다도 싫은 치욕 그 자체인 궁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궁형은 목숨이 위험하지만 살아남았다는 것이 더 치욕인 형벌이었다. 외형상 회복된 몸은 옷가지로 가릴 수 있었으나 악취가 나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에게 일어나는 사건이 치욕이 되는 것은 사회가 치욕이라는 낙인을 찍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파렴치한 일을 저지르고도 고개를 빳빳이 쳐드는 사람들이 꽤 있다. 태사공서(사기)는 인류의 위대한 유산이라는 명예를 얻었으나 그의 개인적인 치욕은 영원히 따라다니게 되었다. 그 방대한 기록물을 저술한 그가 이러한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
개인의 치적이 유명해질수록 개인적 치욕이 동시에 드러날 수밖에 없는 상황을 그는 결단코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둘 사이의 관계가 별로 돈독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임안(任安)이라는 사람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하인이나 하녀들도 자결할 수 있는데 자신은 자결하지 못하고 죽기보다 싫은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토로한다. 그리고 그 삶은 땅강아지나 개미와 같은 미물과 같다고 하면서 임안(任安)에게 정신을 차리라고 충고하고 있다. 당시 임안이 개인적인 인사청탁을 한 것으로 보이는데 자신(임안)이 좋은 인재이니 윗사람에게 추천을 부탁하는 서신을 사마천에게 보낸 것이다. 사마천의 이에 대한 답장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오지랖은 한 번이면 족하다’는 내용이었다. 사마천이 남긴 명문이라고 후대 사람들이 해석하고 있지만, 필자의 개인적인 느낌은 임안이 아무리 훌륭한 인재라고 해도 사마천이 천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 자신과 같은 치욕을 견딜 수 없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는 세상의 이치를 충고한 것으로 느껴진다.
사마천은 지식인으로서 지키고자 하였던 품위를 손상당하는 극심한 흔들림을 겪고 난 후에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탐구하고 고금의 변화에 통달하여 일가(一家)를 이루고자 하는 개인적인 희망을 품고 살았다’(태사공자서)고 했다. 개인적인 억울함을 개인적인 업적으로 승화시킨 사람들에게서 실마리를 찾고 자신의 분한 생각을 펴고 그 뜻이 세상에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가 겪은 흔들림이 얼마나 심한 것인지는 사마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조용히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으며 죽고 나서야 옳고 그름이 판명될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사건의 전후에서 사마천이 던진 질문은 어떤 것이었을까? 어떤 질문을 던졌고 어떤 답을 내렸기에 치욕의 형벌을 선택했으며, 어떤 질문을 던지면서 치욕의 시간을 보냈을까? 시간을 거슬러 그에게 직접 물어본다고 해도 쉽게 답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의 차가운 두뇌는 가끔 타인들과는 정반대로 행동하기를 요구하기도 한다. 사람들과 반대의 길을 가게 되면 남들의 따뜻한 시선을 받기는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자기 내면의 깊숙한 곳에 있는 본성과 자신의 취향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는 기쁨과 뿌듯함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상향 지향의 의지가 분명한 이런 사람들이 선명함과 탁월함을 추구하게 되면 일상적 쾌락이나 충동에 자신을 맡기는 자신을 점점 더 견딜 수 없게 될 것이다. 이미 차원이 다른 기쁨과 즐거움을 알기 때문이다. 자신의 기쁨을 스스로 발견하는 기쁨을 추구하는 것은 내 삶의 리더로 살아가고 있다는 존재 증명이다. 그러나 사마천에게 이런 위로는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격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마천은 우연과 변화를 역사로 풀어놓았다.
흔들리지 않는 삶을 지탱하는 힘
『종의 기원』을 쓴 찰스 다윈은 인류 정신사(精神史)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 중의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지능이 있는 조물주의 피조물이 되기보다는 고통받는 존재의 고통에 공감하고자 하였다. 당시를 지배하고 있던 사람들의 생각은 위대한 설계자인 조물주가 인간의 육체에 느낌이나 감각을 심어 놓았기에 오감으로 얻는 모든 느낌을 느낄 수 있다고 보았다고 한다. 우리의 일상에서부터 장엄한 자연경관에 이르는 수많은 장면에서 느끼는 느낌, 감각, 감정등을 설계에 반영하고 실행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어떤 상황이나 장면에서 감정을 느끼고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윈은 인간 내면의 확신이나 느낌을 실제로 존재하는 증거로 삼는 태도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인간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혀로 맛보고 코로 냄새를 맡고 나서 느낄 수 있는 것이며, 이미 이러한 감각이 있어서 그에 대응하는 느낌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조물주가 고도의 지성을 갖추었다고 상정하는 건 방대하고 놀라운 우주를 이해하고 해석하기가 지극히 어렵거나 불가능에 가깝다는 생각에서 나왔다고 보았다.
‘비글호’의 탐사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자신이 수집한 자료들을 정리하던 다윈은 기독교의 기적을 믿게 만들려면 명백한 증거가 있어야 하고, 불변의 자연법칙에 대해 알면 알수록 그런 기적은 더 믿을 수 없는 것이 되었으며, 복음서들은 사건이 발생하던 당시에 동시에 쓰이지 않았다는 것은 거의 확실하며, 복음서들의 세부적인 묘사가 많이 다르다는 점들을 회의적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이는 같은 사건을 보는 시각이 모두 다르다고 치부해 버리기에는 너무나도 중요한 사실들이라서 혼란스러웠지만 종교를 포기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는 당시의 동물학적 체계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고, 자신은 묵은 생각을 고쳐서 새로운 정보를 추가하는 일은 매력이 없으며 직접 관찰하는 일에 더 큰 흥미를 느낀다고 자신을 설명하고 있다.
다윈은 어떤 질문으로 자신의 일을 시작했을까? 길고도 긴 기나긴 생명의 흐름에서 변화를 살피고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으려고 던진 질문들은 무엇이었을까? 어떤 질문으로 인간 일상의 평범한 개념인 ‘변화’를 통해 고도의 추상적 개념인 ‘진화’라는 가치를 부여할 수 있었을까?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 궁극적인 가치를 부여하고 싶어 한다. 우리는 세상을 해석하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삶을 추구하는 생물이다. 다른 동물과 달리 내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면 아주 쉽게 좌절하기도 한다. 또한 우리는 필연적으로 소멸할 수밖에 없다는 진실을 받아들이는 것을 몹시 힘겨워하기도 한다. 처참한 자연재해에 놀라고 참혹한 인간의 잔혹함에 괴로워하며 우리의 육신과 영혼이 나약함을 강하게 의식한다. 우리는 빛을 발하는 존재로서 스스로가 매우 귀중한 존재임을 알고 싶어 하며 증명하고자 한다. 그리고 타인을 존중하는 뛰어난 태도를 유지하고 싶어 한다. 모든 인류는 우주 질서에 매료되었었다. 별들이 궤도를 벗어나지 않게 하고 산과 강, 바다를 그 테두리 안에 가두며 사계절로 끊임없는 변화를 지속하는 신비한 힘에 놀랐다. 그 우주 질서 속에 존재하면서 인간임을 증명하는 품위를 유지하려 애쓰고 있다.
다윈은 우연과 변화를 진화로 풀어놓았다.
바탕에 대한 물음, 질문(質問)
질문. 질문을 많이 한다고 내삶이 달라지지는 않는 것 같다. 어쩌면 더 혼란스럽고 더 흔들릴 수도 있다. 세간에는 질문을 제대로 하면 답을 얻거나 지혜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인류의 위대한 업적들은 질문에서 시작되었다고들 한다. 그렇다면 ‘제대로 된 질문’이란 어떤 것인가? 사회적으로 합의하여 서술할 수는 있겠지만 개인에게 강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질문으로 개인의 삶이 확연하게 달라지지 않는 것은 개인 경험의 다양함과 모호함에서 비롯될 것이다.
질문(質問)이라는 단어의 한자 질(質)에는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다. 우리말로 ‘바탕’이라고 해석된다. 한자어로는 ‘본원(本源)’으로 풀이한다. 우리말의 바탕은 물체의 뼈대나 틀을 이루는 부분. 사물이나 현상의 근본을 이루는 것. 타고난 성질이나 재질. 또는 체질등으로 설명한다. 또한 바탕은 어떤 일을 한 차례 끝내는 동안을 의미하기도 한다. 여기에서 질문을 ‘바탕에 대한 물음’으로 이해할 수 있는 근거를 찾아낼 수 있다.
바탕, 본원에 대한 물음은 존재(存在)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사고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존재는 가장 추상적인 개념들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가장 추상적인 존재는 가장 순수하다고 할 수 있다. 순수함은 물들기 쉽다는 약점이 있다. 가장 순수한 존재에 대한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관습, 습관, 편견, 지식등이나 타인들이 만든 가치들이 사고 과정에 끼어들기 때문이다. 누구와 관계로, 어딘가에 소속된 일원으로 소유한 것들에 대한 평가등으로 나를 설명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가끔씩 자신이 가진 고정관념 선입견 습관들이 사회생활에서 타인을 기만하는 데 사용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 괴로워짐을 느끼기도 한다. 어쩌면 나에게 가장 원초적인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가 아닌 ‘나는 무엇인가?’가 아닐까? 이에 관해서는 신화(神話)에서 얻을 수 있는 시사점이 있다. 신화는 보이지도 않는 것을 믿는 인간의 능력을 가장 추상적인 사고로 풀어낸 것이다. 의도적이던 의도적이지 않던 보이지도 않는 것을 믿도록 한 신화는 오염되어 간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도 나와 타인의 편견으로 오염된 ‘가치’가 개입되면서 내삶은 혼란스럽고 어지럽다.
본질과 바탕에 접근한다는 것은 내삶에서 최상의 추상적 사고에 다가간다는 것이다. 물리적 세계에 익숙한 나는 심리적으로 ‘바탕’은 가장 낮은 곳에 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이러한 사고 습관이 인간의 상향을 추구하는 본성을 어렵게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오르기보다 내려가는 것이 심리적으로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탕’이 가장 아래일 것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지도 모른다. 높은 곳에서 시작해서 아래로 내려오는 심리적 홀가분함을 인식한다면 다음 단계에서의 생각은 훨씬 자유로워진다. 사방팔방이 나의 사고 영역으로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의 사건이 모든 방향에서 접근이 가능해진다. 아마도 옛 성현들이 하나를 알면 된다고 한 것은 이런 맥락이 아닐까 싶다. 하나가 둘이 되고 그 둘은 또 하나가 되고 다시 둘이 되는 과정은 무한히 반복된다. 나의 의지만 있으면. 이때 둘은 반드시 수평과 수직, 유사와 반대일 이유는 없다. 그리고 이 과정에는 명사로서의 ‘바탕’을 비롯하여 동사 형용사 부사로서의 ‘바탕’의 개념도 녹아 있어야 풍부함을 확보할 수 있다. 바탕을 점점 넓혀나가게 되면 어지럽고 모호하며 혼잡한 상황에 다다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에 도움이 되는 것이 범주(範疇)라는 개념이다. 하나의 틀에 유사한 것들을 넣어서 구분하면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범주는 질문과 답을 동시에 만족시키기도 하는데 때로는 분리하고 때로는 통합하는 묘미가 있기 때문이다. 분리가 질문이고 통합이 답이며 통합이 질문이고 분리가 답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고는 새로운 상황을 마주할 때 당황하지 않고 의연한 태도를 유지하도록 해준다. 범주, 즉 틀을 조립하고 해체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얻게 되는 통찰이 상황을 해결하기 때문이다. 특히 ‘바탕’을 허공으로 들어 올려 생각하면 모든 방향에서 빛이 번져 나온다. 그 빛을 따라가면 막다른 곳에서 다른 관점들을 찾아볼 수 있게 된다.
존재에 대한 질문이 중요한 것은 형이상학적 사고에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일상에서 우리가 존재에 대한 질문을 한다는 것은 최고의 추상적 존재에 대하여 유추하는 것이며 여기에는 수많은 층위와 범주가 따라다니기에 유추로 살아가는 인간이 희망을 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존재가 흔들리거나 더럽혀지거나 줄거나 늘지도 않는다는 것은 종교에서 주장하는 것이고, 현실에서는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골치 아픈 논리를 펴는 것은 철학에서나 찾아볼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존재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나는 존재하고 있고 내삶은 나의 존재를 설명해야 하며 나의 존재는 일상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쩌면 삶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일상의 본원이나 ‘바탕’에 대한 질문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흐릿한 생각이 무의식에 자리하여 내가 조종당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내면 살피기인 성찰이다. 흐릿한 생각이 나의 무의식에 자리하는 것이 요점이 아니라 그 생각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요점이다. 문제의 근원을 알면 대처할 수 있다. 그 자리 잡은 생각의 바탕으로 거슬러 올라가 넓게 추상화시키서 뚜렷한 범주에 들어온다면 그곳에서 이유를 찾고 그 이유의 원인을 파악하여 대처하면 평안하고 평온해질 수 있다.
바탕에 접근하여 질문하면 말이 없거나 필요가 없어진다. 이 시점에 이르게 되면 사유가 아니라 움직임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맞이하는 상황은 거의 대부분을 ‘내’가 그 일을 처리해야 한다. 따라서 질문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움직임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 상황을 피하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비겁하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비겁하지 않기 위해서 역린(逆鱗)이라는 이야기를 나에게 가져올 수 있게 된다. 역린을 세상이 나에게 가하는 압력으로만 받아들인다면 나는 용(龍)이 될 수도 없고 붕(鵬)이 될 수도 없다. 내가 용이라는 인식을 하기 위해서는 어색하더라도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리고 나의 내면에 있는 인간임을 자각하고 지키는데 불필요한 것들은 죽기보다도 싫더라도 건드려서 나를 파괴해야 한다. 곤(鯤)이 칠흑 같은 어둠의 바다를 견딘 것과 붕이 휘몰아치는 비바람에 자신을 맡기는 것은 자신을 파괴하는 과정이다. 죽기보다도 싫은 그 과정을 이겨내려고 몸부림치는 것이다. 그런 후에 나의 내면에 갈무리된 내공으로 구만리 위의 허공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붕이 될 수 있다. 그곳에 도달한 나는 누구에게도 좌지우지되지 않는 내삶의 리더로 살아간다.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 지혜(智慧)
어떤 일의 한 차례가 끝나는 동안이라는 바탕의 의미를 눈으로 경험하는 방법으로는 우리 전통 운동인 씨름이 있다. 씨름은 한바탕 지나는 것을 눈으로 경험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예인데, 준비와 시작, 과정과 결말을 눈앞에서 볼 수 있다. 세상일의 본말은 쉽게 알 수 없지만 한바탕의 씨름은 쉽게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속에서 이루어진 모든 것을 완벽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작은 것을 미루어 큰 것을 알 수 있다고 한 선현들의 말을 믿는다면 결코 소홀히 할 경험은 아닌 것이다. 씨름에서는 상대방을 이기는 것을 지혜라고 한다면 한바탕이 진행되는 동안 선수들은 자신과 상대방의 숨소리, 태도, 힘을 쓰는 순간, 공격과 방어를 하는 자세등을 온 정신을 집중해서 파악하고 분석해야 한다. 그래서 자신이 이긴 이유와 상대방이 진 이유, 자신이 진 이유와 상대방이 이긴 이유를 머리에 새기고 다음 ‘한바탕’에 임해야 한다. 이렇다고 해서 다음 한바탕의 승리를 장담할 수는 절대로 없다. 다만 상황에 맞게 대처하여 승리가 확정되었을 때 자신이 지혜로웠다고 포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는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을 되짚어 보는 과정에서 얻게 되는 다음을 위한 준비인 것이다. 흔히들 책 속에 지혜가 있다고 하는 말에 이끌려 열심히 독서를 하지만 자신의 지혜가 늘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은 남들이 지혜라고 하는 것들을 찾기 때문이다. 지혜는 개인들이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한바탕’이 지나갔을 때 상쾌하고 깔끔하며 홀가분함과 같은 여러 느낌을 동시에 받는 순간에 지나쳐 갈 뿐이다. 그러니 지혜가 축적되는 것이 아니라 비슷한 과정 속에서 스치듯 지나가는 그 느낌이 축적되는 것이다. 이러한 축적된 느낌들을 세상과의 소통에서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것을 지혜라 한다. 독서에서 찾는 지혜가 주는 폐해는 과거의 경험으로 미래의 일을 예측하려는 인간의 오만함이다. 그럼에도 내삶의 리더로 살아가려는 사람들에게는 독서가 필요하다. 독서는 내가 직접 경험하지 못하는 것들을 생각해 볼 수 있으며, 직접 경험했다고 하더라도 미처 느끼지 못한 것을 깨닫게 해 줄 수 있는 아주 유용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탕’에 대한 질문으로 더 넓고 높은 통찰을 통하여 지혜라는 순간들을 자주 느낌으로써 내삶을 고요하게 유지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혜는 나와 나를 포함한 세상이 주고받는 상황을 나의 오감이 기억의 한편에 저장하고 그 기억들을 추상성과 밀접히 연결할 때 발현된다. 우리의 생각은 이전의 기억에 기반하고 있으며 육체를 통한 대단히 많은 경험에서 나오며 구체적인 세상에서 기반을 본다. 우리는 늘 자신의 경험으로 자신의 삶을 일구어 갈 수밖에는 없다. 그렇다고 매 순간의 모든 일을 기억하고 다시 조합하는 일을 매 순간마다 할 수도 없으며 하지도 못한다. 대부분의 경험은 스치듯 지나갈 뿐이다. 지금 눈앞에서 스치듯이 지나가는 순간과 과거에 스치듯이 지나간 순간이 스칠 때, 그 찰나를 누가 더 예민하게 포착하고 거기에서 생각하는 것들의 성질에 따라 삶의 색깔이 따라가는 것이다. 그래서 지혜는 나의 시공간에서 벌어진 다양한 일들이 내 머릿속의 다양한 경험의 목록으로 저장되어 있다가 내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뜻하지 않게 만날 때 반짝이는 작은 불꽃이다. 이 불꽃은 지금 당장 불쏘시개를 넣어 주지 않으면 꺼지고 만다. 아주 조심스럽고 예민하게 몰입하여 다루었을 때 따뜻함을 취할 수 있다.
생뚱맞은 생각이지만 사마천과 다윈, 두 사람 중에 누가 더 많은 질문을 하였을까?
사마천이 『태사공서』에서 붙인 각 제목은 그가 던진 질문이다. 한(恨)이 맺힌 그가 알고자 했던 것은 ‘세상일의 본말(本末)’이었다. 거기에는 그의 생각이 담겨 있다. 우리가 지혜라고 읽은 것은 그의 생각이었을 뿐이다. 세상일의 본말을 지식으로 암기하는 것은 지혜를 늘리는 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세상의 본말(本末)’에 대한 사마천의 시선과 책을 읽는 사람이 던지는 질문이 만나는 곳에서 지혜의 실마리를 건질 수 있다. 『태사공서』의 제목에 녹아 있는 질문은 삶의 근원에 대한 질문들이다. 그리고 그 답들은 핵심 한자성어에 담아 놓았다. 그렇다고 그것이 나의 정답은 아니다. 그러므로 답이 정해진 닫힌 물음이 아니라 답을 알 수 없는 열린 물음일 뿐이다. 지금은 지식과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인류가 만든 모든 종류의 지식을 펼치고 있으며 새롭게 만들어지는 지식은 정보라는 이름으로 유통되다가 지식으로 굳어지는 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이런데도 불구하고 나의 삶의 지식과 정보는 절대로 알 수 없다. 누구도 말해줄 수 없는 개인의 비밀이기에 개인의 존재가 사라지면 비밀은 공개되지 않고 사라져 버린다. 다만 어떤 개인의 삶의 비밀이라는 것을 참고하여 지식과 정보가 만들어지기는 한다. 그렇다고 해도 그것이 내삶에 대한 정답은 절대로 될 수 없다. 사마천은 태사공서(사기)에 지혜를 담고 있다고 자랑하지 않았다. 다만 후세 사람들의 평가를 기다리는 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하였다.
삶은 일상의 총합이지 삶의 총합이 삶은 아니며 또한 일상도 아니다. 그러므로 미래의 무게와 과거의 무게까지 짊어지는 우를 범할 필요는 없다. 일상과 평범함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하자. 결국 인간은 변화를 떨쳐 낼 수 없다. 우리는 변화 속에서 삶을 영위하기 때문이다. 변화 속에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내삶의 리더가 되어야 한다. 선천적으로 자신의 자질을 아는 것이 내삶의 리더로서의 필요조건이라면 선천적 자질을 질문으로 연결시키고 그 답을 추구하는 것은 내삶의 리더로서의 충분조건이다. 그래서 사마천은 우연과 변화를 역사로 풀어냈고 찰스 다윈은 우연과 변화를 진화로 풀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