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혹(佳惑)한 마흔, 가혹(苛酷)한 불혹

깨달음의 종류가 상관있으랴!

by 김기황

각성하게 되는 흔들림

시퍼런 대숲으로 태풍이 몰아친다. 모든 대나무가 부러질 듯이 흔들리고 있는데 흔들리지 않는 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흔들리지 않는 나무가 선명하게 보일지라도 탁월하다고 하지는 않는다. 탁월함을 얻기 위해서는 태풍의 강력함을 버틴 후라야 가능하지만 흔들리지 않는 대나무는 탁월하다고 하지는 않는다. 그 대나무는 죽었기 때문이다. 변화하는 세상에서 변화를 외면하고 자기의 주장만을 고집하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마련이다. 때로는 너무도 뚜렷하여 세간의 주목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을 대단하다고 평가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자신의 주장에 대하여 흔들리지는 않아서 선명하다는 세간의 평가를 스스로는 탁월하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경력을 인정받으려면 자신이 일하는 분야를 떠나지 않아야 한다는 직간접적인 경험들은 현재를 지키려는 집착을 강요한다. 경험을 눈여겨보는 것은 지식과 정보의 학습에만 의존하기에는 세상은 너무 복잡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험에서 얻은 통찰로 세월을 채운 경력을 지닌 사람들은 늘 더 나은 대접을 받는다. 또한 자신이 종사하는 분야에서 얻은 통찰의 경험을 다른 분야에서도 발휘하는 사람들은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것이 사람들이 타인의 경력에 대하여 궁금해하는 이유일 것이다. 처음 만나서 학력 직장 근속연수를 꼬치꼬치 물어보는 것이 예의가 아님을 알지만, 그 사람의 경력과 경험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판단하는 주요한 자료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전에 종사하던 분야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분야를 기웃거리는 사람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이러한 태도의 저변에는 변화가 가져올 미래의 막연한 혼란과 반갑잖은 불안에 대한 부담감이 자리한다. 새로운 분야에서 삶을 이어가려는 사람들은 타인의 시선에 대한 부담과 본인의 능력에 대한 의문으로 몸짓이 무거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모든 것을 내려놓으며 새로운 출발을 시작한다고들 말한다.


어둠이 걷혀가는 산자락에서 울리는 산새의 지저귐은 머릿속을 청소하는 빗질이다. 햇빛이 방해하지 않는 산속의 새벽녘에는 들리는 산새의 소리는 깨끗하다. 흔드적거리며 내리는 짙은 새벽이슬은 한낮의 뙤약볕을 각오하라는 산신령의 날씨 예보다. 사람들은 각자의 작업 도구와 필요한 물품을 챙기면서 동료의 작업 준비를 돕는다. 작업반장은 어둠과 안개에 둘러 쌓여 보이지도 않는 산의 정상까지 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선명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현장에 투입되는 순서를 정하고 깡통 커피를 하나씩 입으로 가져가면서 서로에게 안전사고에 유의하라는 말로 마음을 다잡아 본다. 이제부터 쉬는 시간까지는 오로지 자신이 모든 것에 책임을 져야 한다. 드디어 조급한 사람의 기계가 먼저 돌아간다. 몇 초가 지나자 기계는 굉음을 내면서 주인을 현장으로 데리고 간다. 예닐곱 대의 기계가 모두 굉음을 내자 좁은 산골짜기는 군대의 전쟁 연습을 하는 훈련장처럼 들썩인다. 약 30kg의 무게와 짊어진 등에서 울리는 최고속도의 엔진소리와 열기, 무엇보다도 길이 없는 산자락을 따라서 심어 놓은 어린나무의 순을 찾아가면서 풀을 제거해야 하는 작업이다. 조상들의 산소에서 풀을 베어 본 경험밖에 없는 나는 경력을 숨기고 겁도 없이 작업단에 스며들었다. 나의 경력을 물어보던 사람들의 미심쩍은 눈길을 애써 외면하면서. 나의 전직들인 사무실의 경험은 거의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단지 본인에게 경계선이 없이 배정된 할당량을 무조건 처리해야 한다는 작업원칙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것을 제외하고선. 경험이 많은 사람들은 심어준 어린나무와 저절로 자라는 풀이 엉켜서 분간이 잘되지도 않는 산자락에 예초기의 날로 경계선을 그리면서 바쁜 몸짓으로 안갯속으로 사라진다. 햇살이 나오고 기온이 올라가기 전에 할당된 작업량의 축이 나야 한다고 했다. 산비탈에 햇볕이 내리쬐고 기온이 올라가면 단 한 발자국도 옮기기 귀찮아진다고 했다. 어떻게 올라갔는지에 대한 그날의 기억은 찬비가 내리는 어느 날, 한 조각의 기억을 들어내듯이 지워졌다. 다음 날의 작업을 위해서 기계를 한 곳에 모으고 땀을 식히고 있었다. 작업반장은 내일의 작업 방향을 지시하면서 지나온 곳을 가리킨다. 초심자인 나에게 약간의 위로와 가능성을 보았다는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그날의 작업이 끝나고 산을 내려오면서 나는 나에게 모든 것을 내려놓으라는 강요를 하고 있었다.

생존과 관계없는 직업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겠는가? 그럼에도 사람들은 생존과 관계없이 일을 한다는 자존심을 부린다. 터무니없는 이 자존심 때문에 경력에 매달리고 경험에 얽매여서 변화를 애써 외면해 왔다는 자괴감이 나를 한동안 괴롭혔다. 그동안 직업이 나에게 준 의미들을 새겨봐야 했다. 생존을 위한 생계가 흔들리지 않도록 시작한 일이 나의 내면을 흔들고 있었다.


자발적 고립은 존재를 인식하는 기회

인내와 감내는 비슷한 듯 다른 것 같다. 차원이 다른 버팀이라고 할 수 있다. 인내는 외부의 자극이나 간섭이 강요되지만, 감내는 내면의 견딤이다. 외부의 강요는 반발을 부르기도 하지만 내면의 몰입에서 얻은 자발적으로 추동(推動)된 에너지는 내부에서 갈무리되어 내면의 존재를 살피게 된다.

산에서의 예초기 작업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몰입을 강요한다. 살필 수 없는 발새, 시도 때도 없이 날아드는 날벌레와 벌, 정상으로 작동하는 지를 들어야 하는 엔진소리, 풀에 묻힌 어린나무, 주변 동료의 위치와 동선, 그리고 경계선이 없는 나의 작업 할당량. 현재의 몸 상태. 이 모든 것을 매 순간 파악하면서 작업을 해 나가야 한다. 초보자일 때는 작업 할당량을 처리하는 것이 힘에 겨워서 벌에 쏘인 것도 몰랐다. 살필 수 없는 발새는 넘어지고 구르는 위험을 초래하기도 했다. 동료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해 동선이 엉키고 서로를 힘들게 하기도 했다. 오직 민폐를 끼치기 싫다는 마음에 다른 사람에게 작업요령을 몇 번이고 물어봤다. 돌아오는 답은 경험이 쌓이면 저절로 된다는 말뿐이었다.

내삶의 여정은 언제 끝날지 모르지만, 단순히 시간만 채우는 경험으로는 언제 흔들릴지 모르는 삶을 지탱하는 내면을 채우기는 곤란하다는 생각이 간간이 부는 바람이 귓가를 스칠 때 지나갔다. 아마도 힘들어서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을 한다는 자괴감의 반발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지상부가 잘려 나간 아름드리나무의 그루터기를 보고 살아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라는 통상적인 표현을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작업의 숙련도가 올라갈수록 작업하는 동안의 인위적 고립은 묘한 쾌감을 가져왔다. 그래서 땅속에 남아있는 아름드리 그루터기가 나타나면 꼭 올라가서 잠시 쉬어가는 야릇한 버릇이 생겼다. 이 행위도 살아있음에 대한 치기(稚氣)였겠지만 일에 대한 적응과 생계가 조금은 해소되는 상황에서 오는 틈이었다고 생각된다. 그 틈에서 나타난 현실 인식이 백척간두(百尺竿頭)였다. 까마득한 백 척의 높이가 땅으로 내려왔다는 생각이 스칠 때 소름이 돋았다. 물리적 세계에 살고 있는 내게 익숙한 사고방식은 물리적 실체를 오감으로 느끼는 것이다. 그런데 허상의 세계 속으로 물리적 실체를 고립시켜 버린 것이다. 내게는 생계가 일부 해소되는 만족보다도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식한 기쁨이 더 컸다. 그날의 작업은 힘들지 않았다. 그러나 육체노동의 약점인 물리적인 체력의 한계를 떠올리며 내삶이 또 흔들릴 것이라는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

귀가해서 새벽의 모자란 잠을 보충하고 다른 일을 하는 동안에도 백척간두(百尺竿頭)는 생생했고, 며칠을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며칠 동안 생각날 때마다 관련된 글들을 찾아보면서 공허한 웃음을 피식거렸다. 그러다가 천상천하(天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尊)이라는 새로운 인식이 찾아왔다. 며칠간 나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것은 존재에 대한 어렴풋한 생각이었던 것 같다. 살아있는 존재에게 죽어버린 존재가 보내는 힐난이라는 생각에 이르자 황당하기도 했다.

부처에 대한 과잉 충성으로 보이는 전설이 입혀진 것이 확실한 이 한자 성어가 또 며칠을 머릿속에 맴돌았다. 하늘 아래 오직 자신이 귀중하다는 해석을 알아듣지 못할 정도의 학식은 아니다. 심지어 한자로 쓸 수도 있다. 지식을 점검받는 시기가 지난 사람에게 이러한 해석은 별로 의미가 없어 보였다. 여덟 글자에 감춰있는 의미를 나의 목소리로 토해내야 한다는 생각이 나를 짓 누르고 있었다. 천문학자들의 추정에 따르면 우주에는 온 인류의 인구수보다도 많은 별이 있다고 한다. 우주에 떠 있는 별이 대단하다고 한다면 내가 대단한 존재임이 확실하며, 사소한 하나의 숫자로 생각한다면 나도 사소한 존재일 뿐이다. 그러나 온 우주에 단 하나로 존재한다는 사실의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 오직 혼자서 존귀하다는 것은 존중받고 귀하게 여겨짐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답답한 것은 ‘홀로’라는 독(獨)의 의미가 쉽게 정리되지 않았다. ‘고독한 존재’라는 것인지 ‘존재는 고독한 것’인지. 어쩠던 고독하게 살아가는 존재가 ‘존재는 고독하다’는 의미를 생각하기로 했다는 점이 나에게는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기계음과 고단함은 자신에게로 몰입하는 시간을 갖게 하였다. 상황적으로는 나의 감각이 대응해야 하는 거의 모든 소리를 예초기의 최고속 엔진 소리가 차단해 주었으며 상당한 시간을 온전히 혼자서 감당해야 하는 작업의 특성이 있었다. 심리적으로는 내삶이 정체가 아니라, 후퇴나 최악에는 파멸에 이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나’가 들어간 온갖 질문과 의문을 혼자서 제기하고 답하고 설명하는 과정에서 지금의 내가 흔들리는 것에 대한 나름의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기존의 습관이나 지식이 내 삶의 질과 양을 향상에 도움이 되지 않을 때, 지나온 여정이 결코 무의미한 것은 아님에도 의미가 없다고 느낄 때, 지금이 정체하거나 퇴보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 다른 사람에게 보호받고 있지 못하다고 느낄 때, 자신이 인간다운 대우를 받고 있지 못함을 느낄 때, 고립되어 외롭다고 느낄 때, 자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없을 때, 경제적인 어려움이 닥칠 때, 새로운 시작에 지나온 경험과 경력이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때, 미래에 대한 믿음을 가지지 못할 때 등등. 나의 상황과 연결되는 많은 생각들이 실타래가 풀리듯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들의 바탕에는 존재에 대한 인식이 자리하고 있다는 생각이 일상의 잡념들을 몰아내고 있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자발적 고립을 자초하고 있다는 정신 승리로 나를 위로하는 넋 나간 생활을 하고 있다는 내면의 의심을 지우지 못하고 있던 나날도 이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림지의 풀을 베는 작업이 나의 예민한 감각을 깨워준 것 같다. 막다른 상황에서의 궁여지책으로 선택한 생계 수단에서 뜻하지 않은 선물을 받은 것이다. 생각이 정리되어 갈수록 귀향한 후로 지속적인 흔들림에 노출되고 있던 나를 직면한 것이다. 우선은 ‘홀로라는 고독’의 의미를 살펴야 했다. 부모의 자식, 아내의 남편, 자식의 아버지, 형제의 형제, 친구의 친구, 지인의 지인, 회사의 직원, 동네의 주민. 셀 수도 없이 많은 관계로 나를 설명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세월만 축내는 경력과 통찰이 없는 경험이 새롭게 시작하는 분야에서 큰 도움이 되지 않듯이 알고자 한다면 누구나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신상털이로는 근처에도 가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독을 내면이 아닌 외부의 도움으로 해소하려 할 때 관계의 물리적 고립을 존재의 고독으로 오해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고독과 존재에 대한 얕은 생각이나마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새들의 이소(離巢)의 시기를 촬영한 영상에는 보내야 하는 어미와 남으려는 새끼의 줄다리기가 안타까운 여운으로 남는다. 홀로 살아가야 하는 독립된 존재로 떠나보내야 하는 어미는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외로움과 둥지를 벗어나야만 하는 미래에 대한 새끼의 불안을 마지막 먹이로 위로하고선 떠나보낸다. 일정한 시기가 지나면 고립된 생활을 영위하는 생명체는 고독한 존재로의 삶을 준비하기 위해 일정 기간 보살핌을 받는다. 인간에게는 고립이 되어야 새로운 관계가 생긴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서 자식이 고립되었을 때 어린이집, 유치원과 같은 사회적 관계가 생긴다. 이 고립은 물리적 고립이 아니라 심리적 고립이다. 부모의 보살핌을 심리적으로 기대할 수 없을 때 다른 보살핌을 찾게 된다. 다른 보살핌은 대부분 사회적 관계에서 나온다. 이소(離巢)의 과정에서 어떤 새끼들은 다시 둥지로 돌아오기도 한다. 그러나 어미의 매몰찬 내침에 굴복하고 만다. 인간사회에서는 자식의 집요한 매달림은 부모의 굴복으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부모의 보살핌으로부터 고립이 되어야 사회적 관계가 생긴다. 이 사회적 관계는 스스로 책임져야 할 관계이다. 심리적으로 독립된 존재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심리적 고립을 자발적으로 결행해야 한다. 심리적 고립의 자발적 결행은 고독이라는 존재의 본질에 접촉할 기회를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일상에서 우리는 심리적 고립보다는 관계적 고립의 불안으로 존재를 느낄 수 있는 자신의 예민함을 눌러 버린다. 모든 사람들은 사회적 관계에서 고립되면 외로움을 느낀다. 외로움을 해소하는 방법은 개인의 본성과 개인의 취향을 적절히 배합하여 해소할 수 있다. 외로움을 해소하는 과정에서 예민함을 잃지 않는 사람들은 고독을 감지할 수 있다. 이때 고독을 관계 단절에서 오는 외로움으로 이해하고 관계 단절을 해소하는 방법을 취하면 삶은 더 혼란하고 복잡해진다. 가정과 가족이 화목하고, 우정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동료들과 아무런 불협화음이 없더라도 외롭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럴 때는 모든 관계를 제거한 나를 살펴봐야 한다. 고독한 존재인 내가 관계적 존재로 살아가야 하는 현실을 파괴할 필요는 없다. 그저 관계적 존재로서의 생각을 조금 줄이고 그 틈으로 고독한 존재를 살피는 관심이면 족하다. 인간은 어쩔 수 없는 관계적 존재로 살아가야 한다. 그래야 나 이외의 존재들과 관계를 통하여 건전하고 제대로 된 인간다움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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