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학(小學)과 소학(消學)
『소학』에서 다시 새겨야 할 내용
어쩌면 사회생활의 아주 기본적인 일은 쓸고 닦고 사람을 응대하는 방법을 아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쓸고 닦는 것은 자신의 주변을 청결하게 하는 것과 더불어 자신을 살핀다는 의미이며, 사람을 응대하는 것은 세상에서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을 대하는 것이다. 당연히 세상에는 나도 포함되지만 내가 주체적으로 이러한 일을 수행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싶다. 중국 송나라의 주희와 관련된 『소학』이라는 책에서 주목할 내용은 ‘쓸고 닦고 사람을 응대하는 방법’을 가장 먼저 가르쳐야 한다고 하는 점이다. 그 이후의 내용들은 인품이 있다고 생각되는 여러 사람의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이 내용들은 엄밀히 본다면 그 사람들의 기록을 보는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마음을 닦음으로써 수양의 순기능을 제공할 수도 있지만 이러한 강요는 경력과 경험에 매몰되는 우를 범할 수도 있다.
쓸고 닦는 것은 청소의 범주에 속한다. 대학자인 주희는 청소에 어떤 시선을 보냈을까? 일반적으로 별로 마음에 두고 싶지 않은 청소를 대학자가 주목한 것은 무슨 이유인가?
청소라는 단어의 뜻은 깨끗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청소의 숨겨진 일로서의 본질은 무엇일까? 청소는 어떤 일의 종료와 시작이 겹쳐있는 시점이다. 이 시점의 전후에 해야 할 일과 구분하기 위해서 허드렛일이라고 표현한다. 그렇지만 허드렛일은 어떤 일의 끝과 시작을 담당하는 꼭 필요한 일이다. 가치를 따진다면야 중요하다고는 하지 않더라도 꼭 필요한 일이다. 소위 통칭하는 허드렛일은 어쩌면 지저분하고 더럽다고 하는 작업일 뿐이다. 그런데 가치가 있는 일에 비용을 투자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학습한 우리에게는 청소는 종사하는 직업으로 보이고 그래서 가치가 낮다고 보는 시각이 당연하게 자리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일을 내가 하고 싶지는 않고 누군가는 해야 한다는 생각을 누구나 한다. 우리에게는 지저분하고 더럽다고 취급당하는 것들이 길거리에 쌓이기 전에 환경미화원들이 정리해 준다. 가정에서는 보통은 주부가 하지만 때로는 그 상황을 견디지 못하는 누군가가 처리한다. 그러면 그 일을 왜 할까? 그것은 그 일의 전과 그 일의 후의 일이나 생활을 연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것은 이유나 논리가 아니라 당위나 필요이다. 그 허드렛일이 정리되지 않으면 그 전의 일은 마치지 못한 것이 되며, 그 후의 일은 시작하지 못하는 것이다. 뒤죽박죽 되어있는 상황을 쓰레기 더미라 한다. 쓰레기 더미에서도 마른 수건을 쥐어짜듯이 가치를 찾아내는 현대이다. 청소의 본질을 생각해 보는 것이 전혀 의미가 없는 일은 아닐 것이다. 불평등의 심화는 가치를 기준으로 삼는 것이 원인임을 알아차린 어떤 정치가는 “가치로 평가하지 않는다면 불평등한 것은 없다”라고 했다. 마찬가지로 청소나 허드렛일을 가치로 평가하지 않고, 그 일의 본질에서 생각한다면 일상에서 인품이나 함량의 폭을 넓힐 수 있을 것이다. 인품이나 함량이 뭔가의 도움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렇게 하찮다는 편견에서 빠져나오면 다른 시선들을 가질 수 있게 된다. 하찮거나 사소하다는 재주가 소중하고 대단한 일을 해결하였을 때 우리는 다른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계명구도(鷄鳴狗盜)에서도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 자신에게 닥쳐올 생존의 위협을 모른 채 이웃 나라의 초청에 응했다가 곤란함을 겪은 중국 고대국가인 제나라의 맹상군(孟嘗君)이 있었다. 식객을 잘 대우하여 많은 지식인을 식객으로 두었다. 그는 하찮고 사소한 재주를 가진 사람들도 식객으로 받아주었는데 3,000명이 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웃 나라의 왕이 맹상군의 소문을 듣고 초청하였다. 왕의 초청이니 일행의 품격을 갖추고 방문한다. 그러나 맹상군이 모르는 사이에 이웃 나라에서는 우여곡절을 만들어서 맹상군을 연금시켜 버린다. 이것은 맹상군과 동행한 모두의 생존이 위험에 처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 상황을 타개하지 못하면 모든 일은 끝나게 되는 시점이다. 이웃 나라의 권력 집단은 맹상군의 생존을 끝내려고 결정할 것이 틀림없다. 이대로 있으면 맹상군과 일행의 생존이라는 일은 끝난다. 이 상황을 청소해야 한다. 그래야 다시 맹상군과 일행의 생존이라는 일을 시작할 수 있다. 맹상군과 동행한 식객들이 분석한 결과 이미 이웃 나라의 왕에게 선물한 여우의 겨드랑이털로 만든 갖옷이 있으면 다시 시작할 실마리를 잡을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문제(問題)는 누가 여우의 겨드랑이털로 만든 갖옷을 손에 쥘 수 있게 하느냐였다. 그러자 학식이 높다고 자부하던 식객들이 업신여기던 식객 중에서 개 껍질을 쓰고 훔치기(狗盜)를 잘하는 식객이 맹상군과 일행의 생존의 일을 다시 일으킨다. 이제 이번에는 맹상군과 일행이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귀국을 서두른다. 한 밤중에 탈출을 했는지 아니면 길이 멀어서였는지는 몰라도 이른 새벽녘에 국경에 도착한다. 예나 지금이나 국경 경비는 삼엄하다. 국경문이 잠겨 있는 시각이다. 아직 국경문이 열리는 시간은 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맹상군과 일행의 탈출을 눈치챈 이웃 나라의 권력 집단이 뒤쫓아 오고 있다. 맹상군과 일행은 다시 생존의 일이 위협받고 있다. 일은 끝났다. 청소를 해야 한다. 그래야 다시 일을 시작할 수 있다. 이번에는 닭의 울음소리를 낭랑하게 내(雞鳴)는 식객이 나섰다. 이 식객도 맹상군의 정치적 상황을 분석한 식객들에게 좋은 시선은 받지 못했을 것이 틀림이 없다. 어쨌든 또 우여곡절 끝에 국경의 문이 열렸고 맹상군과 일행은 생존의 일을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맹상군이 겪은 일에서 구도(狗盜)와 계명(雞鳴)은 가치를 떠나서 판단하게 되면 일의 시작과 끝을 연결하는 중요한 일이다. 물론 당시의 지배층의 식견이나 오늘날 우리의 상식으로 보더라도, 구도(狗盜)는 미화시킬 수는 없고 계명(雞鳴)을 훌륭하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또한 그러나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시점에 이르러서는 식객(소위 고급지다는)들의 지식들은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마찬가지로 BTS의 공연이 끝이 난 뒤에 공연장에 흩어져 있는 쓰레기를 치우는 데는 관련된 박사들의 전문지식보다는 그 일을 담당하는 사람들의 묵묵한 신체의 움직임이 더 효과적이다. 허드렛일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아닌 사람들이 쓰레기를 치우는 것을 우리가 좋게 보는 것은 무질서함을 예상하였는데 질서를 보았기 때문이다. 공연이 끝난 후에 만들어진 질서는 다음 일의 시작을 준비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 주위에서 하찮고 사소한 것들이 질서를 유지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지도 세심히 살펴볼 일이다. 그 속에서 사소함의 구분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일의 시작과 끝을 공부할 수 있을 것이다.
『소학』의 핵심 내용의 두 번째는 사람에 대한 응대이다. 『소학』을 해석한 글들에서는 손님이라는 하는 경향이 대부분이다. 나는 이 부분을 자신에 대한 응대와 상대방에 대한 응대로 구분해보고자 한다.
사람과 만남에서 나의 손끝과 발끝을 반드시 살펴야 한다. 만나는 사람의 손끝과 발끝만을 살펴서는 안 된다. 그리되면 굽히지 않아도 될 허리를 많이 굽히게 된다. 그리되면 꿇지 않아도 될 무릎을 꿇게 된다. 자신을 안다는 것이 본격적인 내삶의 출발이다. 내삶에서 나의 본성이나 개인적 취향을 소홀히 하면서 살아가기는 어렵다. 누구나 자기 본성과 개인적 취향을 고집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소홀히 한다는 것은 무시한다는 것이 아니다. 배제, 제거, 제외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러므로 소홀히 하지 않는다는 것은 나의 내면을 살펴가는 과정에서 나를 단단하게 지키는 삶의 자세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그것이 아집이나 고집으로 형성되어 고착된 습관이 아닐 경우를 말하지만.
나의 손끝과 발끝에 나의 시선을 머물게 하면 벌어지는 일은 나의 내면과 끊임없이 만나게 되는 것이다. 거울을 보고 자신의 결심을 다지는 것은 외면을 꾸미는 행위일 뿐이다. 거울 속에 있는 모습너머에 내면으로 가는 길이 있다. 그리고 거울은 나의 외부 물건이다. 손끝과 발끝 시선은 나의 내부와 외부를 연결하는 처음과 끝이다. 이것의 반복이 일상이다. 일상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만나는 것이 내면을 살피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손끝은 인간만이 가지는 특징이다. 물품을 조용히 내려놓는 것을 마치 그 물품이 처음부터 거기에 있었듯이 해보라. 자기 존중의 마음이 무의식에 자리를 잡는다. 문을 손잡이를 잡고 조용히 닫아보라. 이미 문이 서 있는 목적을 사용했다고 내 뒤에서 쿵 소리가 나도록 밀쳐내면, 그 소리는 나의 귀를 통해 문을 소홀히 대한 항의의 소리를 할 것이다. 뭘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가 반문할 수 있다. 세상살이에 신경을 쓸 것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데 세상살이의 그 신경을 써야 할 것이 나의 삶을 지탱하는데 중요한 일들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내가 인간임을 인식하는 것만 한 중대한 일은 아닌 것 같다. 어느 선사는 따뜻한 차 한잔과 추위를 막아주는 옷 한 벌과 누추하지만 정돈된 거처, 그리고 단지 한 끼의 밥만으로도 인간임을 인식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는 오만을 부리기도 하였다. 인간임을 인식하는 것을 배우는 것을 사회생활의 시작으로 하고 인간임을 공부하는 것이 삶이며 인간이었음을 깨닫는 것이 죽음이다.
『소학』을 시작하는 연령에 도달한 아이들이라면 자기 존중의 개념은 설명하지 못하더라도 뜻은 어렴풋이 알아차릴 수 있다. 그리고 여럿을 모아 놓으면 타인과의 교류를 통하여 더 넓게 알아가게 될 것이다. 자기 존중의 시작은 육체의 존중이다. 육체는 영혼은 잠시 머문다고 할지라도 자신은 오랜 시간 동안 거처해야 하는 집이다. 자신이 거처하는 몸과 몸이 거처하는 주변을 깨끗이 하는 것은 노동이라는 외부의 관점이 아니라, 일의 시작과 끝이라는 내면의 관점이 움직일 때 자기 존중이 유지될 수 있다.
사람들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제 얼굴에 침 뱉기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누워서 제 얼굴에 침 뱉기는 절대로 하지 않는다. 이는 인간 본성의 자기 존중이라는 태도가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자기 존중의 생각들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확장해서 나를 포함한 세상으로 내보는 일을 가르치는 것이 『소학』이 추구하는 교육의 목표이다. 주변 정리는 마치 자석이 주변의 쇳가루를 몰아가듯이 육체의 주변을 늘 고요하게 유지하고 정돈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시각적으로 평온하고 마음은 평온해진다. 그래서 자기 존중의 태도가 유지될 수 있다. 그러므로 물 뿌리고 쓸고 닦는 것이 기본이 되는 것이다. 자신이 거처하는 어떤 공간이라도 이렇게 하면 늘 달라 보인다. 이때 외부의 관점인 노동과 내부의 관점인 일의 시작과 끝을 생각으로 개입시키는가가 자기 존중으로 가는 갈림길이 된다.
배우는 아이들의 개인 성향에 따라 수준은 달라지겠지만, 더 비중이 있는 영향은 가르치는 사람에게서 온다. 그래서 가르치는 사람에게는 지식이 많고 적음이 아니라 높은 인격과 넓은 인품이 요구된다. 타인을 가르치겠다는 사람들은 이러한 자질이 요구되어야 한다. 현재의 우리에게는 물 뿌리고 쓸고 닦는 것은 하루의 일회성 행위로 끝남으로 자기 존중의 습관화는 어렵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물 뿌리고 쓸고 닦는 것의 본질은 일의 시작과 끝이다. 일의 시작과 끝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 목적이지 청소라고 하는 허드렛일을 지속하는 것이 목적은 아니다. 반드시 자신이 해야 하는 주변 정리를 통하여 자기 육체를 존중하는 마음을 얻도록 하고 이를 미루어 자기 존중의 마음을 갖도록 하는 것이 『소학』을 대철학자가 관심을 가진 이유일 것이다.
지금의 우리에게 소학의 이념은 사라져 가고 있다. 소학에서 이야기하는 물 뿌리고 쓸고 닦고 사람을 응대하는 일은 박제가 되어 박물관에서 전시를 기다리고 있음이 틀림없다. 물 뿌리고 쓸고 닦는 일은 교육을 받은 사람은 어쩔 수 없을 때 하는 것이지 직업으로는 절대로 안되며, 사람은 응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섬김을 받아야 함을 강요하는 시대인 것이다. 결정적으로 『소학(小學)』에서 ‘소(小)’을 어린이라고 고착화시키고 내용을 진부하다고 폄하함으로써 『소학(小學)』은 소학(消學)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끼어든 그다지 좋지 않은 성향으로 인하여 세상살이의 이해관계는 더욱 복잡하게 얽히고 있는 것 같다. 『소학』의 기본 이념이 사라진 그 자리에는 아이들에게 일방적으로 가르치고 지식을 주입하는 방법이 차지했다. 아이들의 고역으로 부모의 소유적 욕망을 풀면서 희생으로 강변하는 풍조가 들어앉았다. 이미 부모의 사회적 욕구와 욕망 때문에 자기 존중의 배움을 놓쳐버린 아이들에게는 자아 존중의 기회도 차단된 것 같다. 육체와 마음이 모두 자신에게서 멀어져 있는 것이다. 아이들이 부모를 만나는 시간은 자꾸만 짧아진다. 미래를 위한 생각이 아니라 현재를 위한 생각에서 유치원과 어린이 집을 공공(公共)으로 전환시켜 버렸다. 이것이 돈벌이 수단임이 명확한데도 아니라고 강변한다. 이 과정에 아이들이 자기 존중을 배울만한 기회는 매우 희박해 보인다. 그렇게 우리는 미래 세대들을 사회가 만들어 놓은 열차에 강제로 탑승시켰다.
학년이 올라가도 자기 존중의 시초가 될 수 있는 청소를 학생들이 하지 않는 학교도 있다. 부모의 왜곡된 인식으로 인해 부모의 재산으로 청소하는 일을 타인에게 맡긴다. 오로지 소문난 상급학교로의 진학이 목표인 부모의 욕망으로 인해 지식의 흡수와 암기에만 매달리는 불안한 시기를 보내고 있다. 불안은 시한폭탄이다. 알 수 없는 것이 더 두려운 일이다. 청소가 하찮고 더러운 일이라고 하더라도 일의 시작과 끝을 살피는 중요한 순간이라는 인식으로 전환되지 않는 한 학생들에게 청소는 절대로 시키지 않을 것이다. 교실 청소는 자신이 머물렀던 공간과 타인이 머물렀던 공간을 정리함으로써 자기 존중의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일이다. 태어나서 한 번도 자신의 주변을 정리해 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감정일 것이다. 자신의 주변을 정리한 적이 없다는 말은 스스로가 자기를 존중한 적이 없다고 하는 말과 같다.
이미 늦은 자기 존중을 어떻게 연습할 것인가? 자기 주변을 구름처럼 조용하고 고요하게 몰고 다니는 것을 가장 많이 방해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자신의 손과 입 그리고 발이다. 발보다는 손의 영향이 큰 것 같다. 말소리와 발소리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것은 손에서 이루어진다. 손으로 내는 모든 행위를 정리하는 일을 시작해 보라. 숟가락을 조용히 식탁에 내려놓고, 의자를 소리 나지 않도록 옮기고 문을 소리 나지 않게 닫는 행동들을 줄이면 주위가 조용하고 고요해진다. 그 속에서 어느 날 대숲에 부딪히는 ‘탁’ 소리가 들릴 것이다.
자기 존중의 생각을 간직하고 타인을 응대하는 것은 상황의 주도권이 자신에게 있음을 알리는 일이다. 그러므로 자기 존중은 내면의 살핌을 통하여 주체적인 내삶의 살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자세이다. 자신의 의지가 반영되지 못한 상태로 돌아가보자. 모체에서 분리되는 것을 낳는다고 한다. 닭이 알을 낳고 동물이 새끼를 낳고 엄마가 아이를 낳는다. 모체에서 분리되지 않고 커가는 것을 기른다고 한다. 엄마는 자신의 뱃속에서 아이를 기른다. 엄마의 기르고 낳은 것이 낳고 기르는 것보다 먼저이기에 기른다고 한다. 어머니는 자신의 뱃속을 내어주고 오롯이 혼자 기름을 담당하였음으로 어머니가 나를 길렀다는 표현이라야 정당하다. 어머니가 길렀다는 의미는 과거에서 종결된다. 이 길렀다는 의미가 변화되는 시점이 있기 때문이다. 이 시점은 어머니의 몸에서 분리되는 ‘태어났다’이다. ‘태어남’은 삶의 주도권이 이동되었음을 뜻한다. 어머니가 길렀다는 것은 어머니가 주도했음을 말하는 것이다. 내가 태어남으로써 세상의 주도권은 나에게로 옮겨진다. 이때부터의 어머니의 ‘기르다’의 의미는 온갖 보살핌이라는 양육이라는 단어에 담긴다. 이제부터는 어머니 혼자의 기름이 아니라 어머니의 주도하에 나와 연관되는 모든 사람의 노고가 포함된다. 사람에 대한 응대가 『소학』의 핵심 이념인 이유이다. 사람에 대한 응대는 자기를 존중하면서 모든 사람을 존중하는 응대라야 한다. 당연히 차이는 있되 차별이 없는 응대를 배우는 것이 『소학』에 녹아 있는 이념일 것이다.
인간 본성 중에서 자신에게 해를 주지 않겠다는 생각이 깊어지면 자기 존중의 태도를 가질 수 있게 된다. 이 자기 존중이 깊어져서 내면으로 향하면 자기에게 엄격하게 되고 자기 존중이 넓어져서 타인에게 미치는 것을 너그럽다고 한다. 자기 존중의 생각과 습관이 내외면으로 확대되어 깊고 높아지면 자기의 존귀함을 알게 된다. 자신의 존귀함을 깨달은 순간부터 삶을 함부로 막살아가지는 못하게 된다.
자신에게 엄격하다는 것은 인간 본성을 유지하면서 자신의 개인적 성향을 소홀히 하지 않으며 자신의 존귀함을 길고 거대한 생명의 흐름에서 내려가는 순간까지 잃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회가 만들어 놓은 관습과 같은 외부 기준을 철저히 지키는 태도는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의미가 없다고 한다. 이미 이런 사람들은 인간이 정해 놓은 그러한 기준을 넘어서는 생각과 행동을 몸에 지녔기 때문일 것이다. 공자가 말한 60살의 이순(耳順之年)과 70살의 불유(不踰之年)는 이러한 차원을 일 것이다.
타인에게 너그러워질 수 있는 것은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넓은 시야와 높은 시선이 생기게 되어 더 많이 더 다르게 볼 수 있기에 자기주장을 강요하지 않고 타인의 행동과 생각을 기다려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타인의 움직임이 자연스럽게 될 때까지 지켜볼 수 있는 내면의 힘이 갈무리되어 있다는 것이다.
세상이 변했다고 해서 예절(禮節), 예의(禮義), 범절(凡節)등을 허례허식(虛禮虛飾)으로 격하시키려는 태도는 현대인의 정신적 나태함을 합리화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기 존중의 태도와 자세가 내면으로 향하고 그 속에서 숙고를 거친 시선이 타인에게 보내질 때 나타나는 것이 예절(禮節), 예의(禮義), 범절(凡節)이다. 타인을 대할 때 예절과 예의, 범절에 드러나는 행동과 행위, 생각은 자신에게 내면화되었을 때 품위 있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절과 예의, 범절을 체면을 중시하고 자신을 과시하려는 허례허식으로 폄하하는 것은 자신을 살피지 않은 사람의 볼멘소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절과 예의, 범절을 가장 잘 파악할 수 있는 것은 말과 행동이다. 입에서는 육두문자나 저급한 말이 끊이질 않고 행동은 세상이 모두 제 것인 양다리와 팔을 흔들면서 사람들에게는 예의가 없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내릴 평가는 ‘게으르다’는 표현밖에는 없어 보인다. 육체적인 게으름은 자신만을 피폐하게 하지만 정신적 게으름의 최악은 타인까지도 황폐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절과 예의, 범절의 본질은 어릴 때부터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 같다. 습관과 행동을 개선하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으며 게으른 습관이 이미 정신에 박히면 자신이 게으르다는 것마저도 모르게 된다. 개과천선(改過遷善)이라는 한자 성어는 단순히 지난날의 허물을 고쳐서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지식의 암기를 넘어서는 내용이 있다. 호랑이와 상상 속의 교룡(蛟龍), 그리고 사람이 나온다. 호랑이와 교룡을 죽이고도 사람은 타인의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가 크게 뉘우치고 덕망 있는 대학자를 찾아가 공부를 하기 시작하여 10년 뒤에는 대학자가 되었다는 내용이다. 이 한자 성어를 창작한 사람은 교룡(蛟龍)이라는 전설을 집어넣으면서 이미 지은 허물을 고치기가 매우 어렵다는 교훈을 전하고 있다. 또한 주인공의 허물을 고치고 다른 사람이 된 그 각고의 노력을 칭송하고 있다. 이 한자 성어의 주인공처럼 대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학습을 해야 하고 새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공부를 해야 한다. 학습은 지식을 채우는 노력이고 공부는 삶을 채우는 행동이다.
태어나기도 하고 깨어나기도 하는 모든 생명은 일정한 기간까지의 생존은 모두 본능의 지배를 받는다. 억지스럽지만 이후부터는 학습의 반복이다. 특히 인간은 학습이 나머지 삶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누구나 알듯이 학습이 인간의 삶을 완전히 장악하지는 못한다. 학습의 단계가 지나면 공부의 단계가 있기 때문이다. 공부는 삶의 차원을 바꾸는 도구이자 계기이기 때문이다. 배움과 학습, 공부는 거의 같은 맥락으로 쓰이지만 분리해서 보면 다르게 보일 수도 있다.
인간에게는 본능의 지배가 끝나면 배움이 시작된다. 갓난아기는 배가 고프면 울어야 하고 볼일을 보면 울어야 자기의 욕구와 불만을 해소할 수 있다는 것을 배운다. 이것을 초보적인 터득이라고 해두자. 터득에 내포하고 있는 것은 스스로 생각해 냈다는 것이다. 이러한 초보적인 터득의 기간이 지나면 배움이 지배한다. 엄마와 눈을 마주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인간에게만 있다는 눈을 마주치는 행동이 본능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다고 하니 본능이 아니고 배우는 것이 맞는 것 같다. 아기는 엄마와 눈을 마주치고 웃어주어야 엄마를 더 오랫동안 붙잡아둘 수 있음을 배운다. 위대한 생존 기술이다. 요즈음은 그리 오랜 기간을 사용할 수 없지만 예전에는 더 긴 기간 동안 사용할 수 있었다. 생존에 필요한 것은 배우기만 하면 된다. 생존은 일상이기에 자연히 익히게 된다. 숟가락을 사용하는 법을 배우고 사용하지 않으면 생존에 문제가 된다. 다른 사람이 그 생존 기술을 대신해 주는 것에도 한계는 있다. 어쩔 수 없이 스스로 익혀야 한다. 엄마의 보살핌과 가족의 도움으로 갖가지 생존 기술을 배우고 나면 단순한 생존에는 문제가 없다. 그러나 인간은 상향을 지향하는 본성이 있어서 맹목적 생존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상승하기 위해서는 생활 기술을 배워야 한다.
생활 기술을 배우는데 등장하는 단어가 ‘학습’이다. 사실 ‘학습’이라는 단어는 익힌다는 뜻이 배운다는 뜻과 결합된 단어일 뿐이다. 배움의 과정 속에 익힌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으나 효율성과 비용을 강조하는 시대가 되면서 배움을 강화하려는 의도에서 널리 사용되는 것 같다. 물론 공자의 말이라는 기록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 생존의 기술은 배우기만 하면 스스로 익히게 되기에 익히는 것이 생략되어 있는 표현이다. 생활의 기술은 일상이 아닐 수도 있으므로 생존 기술의 배움 속에 생략되어 있던 익힘을 강조할 수밖에 없다. 생존 기술만으로도 충분했고 생존 기술만으로도 충분히 골치가 아팠는데 생활 기술을 배우고 익히라니 더욱 골치가 아프다. 이것은 아마도 생존 기술을 배우는데 익히는 기능을 너무 심하게 박탈했기 때문인 것 같다. 지금은 통상적으로 학습을 국가의 정규 교육과정을 거치는 통과 의례로 보는 것 같다. 이 과정을 무사히 마쳐야 우리 사회가 만들어 놓은 테두리에서 일상을 보낼 수 있다. 학습이 지겨운 이유는 이미 만들어진 틀을 만들어지고 있는 틀에 적용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개인의 취향에 따라 다양한 틀이 만들어질 수 있다. 개인적 취향의 틀이 이미 만들어진 틀과 맞지 않으면 목수는 비용을 고려한 판단으로 개인적 취향의 틀을 과감히 또는 부분적으로 손을 본다. 그래서 개인적 취향의 틀은 모서리가 깎기고 요철(凹凸)은 평평해진다. 깎겨 나가고 파이고 튀어나온 부분이 개인적 취향의 핵심일 경우에는 심한 좌절을 겪을 수밖에 없다.
이렇게 심한 좌절을 겪은 개인적 취향들은 삶이 끝나는 가? 그런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삶을 영위하는 데 별 문제가 없다. 목수가 포기한 틀은 다른 곳에서 집을 구성하는 아름다운 역할을 하기도 하고 아궁이의 불길을 달구기도 한다. 공부(工夫)라는 단어는 배움, 학습등과 함께 국가의 정규 교육과정이라는 틀에 맞추라는 부모와 교사의 강요를 위한 전가(全家)의 보도(寶刀)가 되었다. 이는 아마도 학습이라는 단어가 아직 우리의 예사말로 자리하지 못한 경우인 것 같다. 그런데 공부의 공(工)은 하늘과 땅사이에서 사람이 일하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다고 한다. 아마도 이런 뜻에서 사람은 평생 공부하고 배워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온 것 같다. 학습 시기의 좌절을 겪은 사람들도 제대로 된 삶을 영위하는 것은 공부라는 또 다른 배움의 기제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공부는 일하는 사람이고 사람은 죽을 때까지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때의 공부는 생존의 기술과 생활의 기술을 접목하는 배움이다.
공부는 배운 것을 익히는 것에만 집중하지 않는 것이 요점이다. 음식물을 익히는 것이 부드럽고 맛도 좋은 경우가 많다. 그러나 너무 많이 오랫동안 익히기만 하면 곤란하다. 너무 딱딱해져서 먹을 수가 없게 될 수도 있다. 삶에서도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배운 것을 너무 익히게 되면 사고(思考)가 편향될 수가 있다. 공부는 익힌 것을 다시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삶에서는 익혀서 유동성이 줄어든 것을 유동성을 살리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렇게 해야 차원이 바뀌게 된다. 이러한 차원을 바꾸려는 공부가 우리의 삶을 지탱해 준다. 차원을 바꾸려는 노력을 ‘뜸을 들인다’로 봐도 좋을 것이다. 밥을 지을 때마다 전기밥솥은 밥이 완성되기 전에 꼭 뜸을 들인다고 외친다. 뜸을 들이지 않고도 밥은 먹을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사람은 없다. 공부는 뜸을 들인 밥맛이 차원이 달라지듯이 외부에서 익힌 것을 내면에서 뜸을 들이는 삶의 기술이다.
기본을 배우고 지식을 학습하고 삶을 공부하는 것은 모든 인간의 숙명일 수밖에 없다.
폭력으로 급우들을 지배할 수 없고 우집질로는 직원들의 통제할 수는 없다. 메기와 미꾸라지의 어린 새끼는 잘 구분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메기는 포식자가 되고 미꾸라지는 물을 흐리게 하면서 헤엄칠 수밖에 없는 약자가 된다. 메기와 미꾸라지는 생존의 기술만으로 살아가야 하지만 인간은 달랐다. 교육기관으로 소학을 만든 옛날의 통치자들은 이런 이치를 깨닫고 자신들의 자식과 또래의 아이들을 모아서 가르쳤다. 당시에는 물론 통치의 수단으로 등장하였겠지만 지금에 와서 그것을 비판할 일은 아니다. 그렇게 모여서 자기 존중과 예절을 배웠을 것이다. 학교폭력을 저지르는 학생이나 우집질을 아무런 가책도 없이 일삼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자기 존중을 배우지 못하고 예절을 공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소학』에서 물 뿌리고 쓸고 닦는 것은 자신을 보라는 것이고, 사람을 응대하는 것은 자신의 내면을 살피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배운 아이들은 타인의 존중을 받았고 이러한 태도들이 습관이 되면 스스로를 존중할 수 있게 되고 이 태도가 타인에게 향하는 것이 예의(禮義)와 범절(凡節)이다. 이러한 태도는 기성세대가 잊지 말아야 할 공부(共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