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 무게
조선 최대의 국난이었던 임진왜란을 극적으로 수습한 서애 유성룡이 말년에 지은 것으로 보이는 시에는 그가 스승임을 보여주는 바가 있다. 이 시에서 서애는 자연스럽고 평범한 일상이 위대하다는 것을 조용히 살아가면서 보여주는 것이 스승임을 느끼게 해 준다. 중국 옛 시인이자 정치가인 한 유는 사설(師說)이라는 글에서 ‘나보다 먼저 나서 그 도(道)를 듣기를 진실로 나보다 먼저라면 내 이를 스승으로 좇을 것이다. 나보다 뒤에 태어나서 그 도를 듣기를 나보다 앞이라면 내이를 스승으로 좇을 것이다. 나는 도를 스승으로 한다’고 했다. 공자는 스승에 대하여 옛것을 두터이 하고 새로운 것을 알고자 하면 스승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강제적 휴식이 아닌 자발적 물러남의 품격
서애 유성룡은 조선 최대의 국난을 극복하는데 자신의 역량을 쏟아부어야 했었다. 그리고 상처를 입은 사회의 혼란을 안정시키기 위해 자신의 여력을 아낌없이 제공한다. 상처가 많은 사회는 반드시 혼란을 거쳐야 새로운 질서가 세워질 수 있음을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때때로 국난을 극복하는 역량과 국난 이후의 혼란을 극복하는 능력은 다르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 말은 한 사람의 일대기를 순차적으로 살피면서 국난을 극복할 때의 역량과 국란 이후의 혼란한 사회를 안정시키는 데 발휘한 역량이 다름을 평가하는 말일뿐이다. 개인의 능력을 절대적으로 평가한다면 분명히 전쟁을 극복하는 능력을 더 월등하게 평가해야 한다. 전쟁은 사회의 혼란을 포함하고 있지만, 사회의 혼란은 전쟁을 포함하고 있지 않을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서애 유성룡이 조선의 최대 국난을 극복하고서 전후의 혼란을 제대로 수습하지 않고서 고향으로 물러났다고 해서 비난을 받을 이유는 전혀 없다고 본다. 그는 고향으로 물러나서도 옛사람들의 글로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면서 전후 혼란 수습에 도움을 주었다. 설사 그의 물러남을 정치적 역학관계에서 살핀다고 하더라도 뛰어난 능력을 갖춘 후인(後人)들에게 길을 터준 것은 비판받을 처사는 아니다. 전후(戰後)의 혼란한 상황에서 정치 원로의 물러남이 정치와 완전 단절을 의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옛사람들의 글로 정치 일선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면서도 ‘물러나서 쉼’의 의미를 은 모든 것을 함부로 하는 젊은 시절의 나태함으로 돌아가라는 뜻이 아니었다. 옛사람들의 쉼은 물러남을 뜻한다. 서애 유성룡이 옛 선인들의 물러남의 뜻을 마음에 새기면서 쉼은 늙어서 혼몽하더라도 모든 것을 보고 들으면서도 자발적인 물러남을 강조한 것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스승의 품위에서는 절대로 꼰대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다.
스승이라는 단어는 왠지 숙연해지는 감정이 담긴 단어이다. 스승은 세대 간의 영혼을 이어주는 소중한 사람들이다. 사회는 스승을 만들고 스승은 사회를 만든다. 사회가 스승이라는 열매를 많이 달고 있으면 많은 제자들이 그 열매를 맛볼 수 있다. 과일나무의 열매가 자신을 맛보는 생명들을 가리지 않듯이 스승은 자신의 열매를 맛보는 사람들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스승은 일상의 평범함을 특별한 위대함으로 차원이동을 한 사람들이다. 자신의 전문 분야에 대한 깊이를 만들고 그 분야의 사람들에게 그 분야의 높이를 제시하는 것은 당연하다. 높이는 넓이가 밭쳐주고 넓이는 높이가 눈길을 줘야 한다. 스승의 덕목 중 하나인 이 넓이는 전문 분야의 높이를 일상의 차원으로 퍼뜨리는 것이라야 한다. 스승은 많은 열매를 달수 있는 나무여야 한다. 그러기에 스승은 존경받는 마땅함을 누린다. 선불교의 어떤 선사는 자신의 제자가 타인들의 스승이 될만함을 감지하고 기쁘게 외쳤다. ‘이 산기슭에 매실이 잘 익었다. 모두 가서 따먹어 보라’고. 같은 나무에서 매실을 따더라도 사람마다 맛은 다르게 느낄 수 있다. 매실의 신맛은 일상의 평범함이고, 신맛과 다른 맛은 특별한 위대함이다. 한 스승에게서 두 가지 맛이 나는 것이다. 스승으로 삼고자 하는 과거의 인물들에게서 그들이 가꾸어 놓은 열매를 맛보려고 할 때 일상과 특별함이 부딪힐 수 있다. 과거의 인물들은 이미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맹목적인 추종을 하는 사람들은 특별한 업적에만 시선을 두기 때문에 과거의 인물들을 비판할 경우에 싫어한다. 과거의 인물들을 스승으로 마음에 새기는 것은 그의 업적을 새기는 것이여서는 안된다. 많은 사람들을 추종할 수 있게 만든 열매의 다른 맛을 찾아내는 것이어야 한다. 과거 인물들이 만든 업적은 그 사람이 그 시대 상황에 맞게 적절히 대응하여 만든 결과물일 뿐이다. 그러므로 스승의 기록물인 역사의 열매에서 다른 맛을 찾아내는 것은 순전한 나의 몫일뿐이다.
우리의 스승의 날은 세종대왕의 탄신일
스승의 날을 지정해 놓고서 스승이 없어서 사회가 혼란스러운 상황을 우리는 늘 목격한다. 우연히 먼저 태어난 세대들이 우연히 나중에 태어난 세대에게 텃세를 부리는 것을 꼰대짓이라고 하고, 우연히 나중에 태어난 세대에게 우연히 먼저 태어난 세대가 더 나은 세상을 열어보라고 격려하는 것을 세상이 열려있다고 한다. 그 열려있는 세상에 도전하기를 권하고 그 성취를 기뻐해주는 사람들을 스승이라고 한다. 스승은 교사, 선생, 교수등과 유사한 뜻으로 쓰이기는 하지만 차원이 다른 넓이와 높이가 있다. 교사, 선생, 교수등은 온갖 수식어를 붙일 수 있지만, 스승이라는 단어에는 수식어를 붙일 수가 없다. 수식어가 붙는 순간 스승의 의미가 무너지며 그러한 수식어를 붙이는 행태를 거부하는 사람이어야 스승이라는 칭호를 붙일 수 있기 때문이다. 본인이 교사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다. 자신이 선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지식을 전달하고 학생들과 그 시절을 지내면서 사람들을 길러내는 역할을 한다. 가르치는 일에 종사한다고 해서 모두가 선생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선생은 자신이 택한 그 일이 신성함과 중요함을 각성하며 어깨는 무거우나 손은 가벼울 것이라는 인식을 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인식을 오랜 세월 동안 감당해 나가는 선생들에게 ‘님’이라는 칭호를 붙여줄 수 있다. 선생‘님’이라는 칭호를 거부하는 사람에게 선생님이라고 불러야 하는 역설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 현 세태인 것이 씁쓸한 것도 있다. 선생님이 중요한 것은 세대를 이어가는 역할이 부여되기 때문이다. 우연히 먼저 태어난 사람들이 만든 세상을 우연히 나중에 태어난 사람들에게 전달하여 다시 또 우연으로 이어지는 사람들에게로 이어지도록 하는 것은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일만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새로운 단어를 찾아냈다. 스승은 단순히 지식의 전달자가 아니다. 지식은 교사나 선생, 선생님, 교수들도 전해줄 수 있다. 스승은 삶의 전반에 영향을 주는 사람일 것이다. 스승은 넓은 지성과 높은 이상을 위해서 중단 없는 전진을 지속하는 사람이다. 스승을 완전무결한 사람으로 만들 필요는 없다. 스승들도 평범한 사람들일 뿐이다. 다만 그분들의 삶의 태도가 우리와는 다를 뿐이다. 우리에게 스승이 필요할 때는 혼돈이 삶을 흔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이다. 한때 스승은 뭔가를 전하고 전해받는 관계에서만 존재하는 단어로 사용되었다. 우리가 이렇게 좁은 의미로 스승을 해석하는 사이에 스승의 의미는 추락하여 평범한 명사가 되어 버렸다. 분명히 지금도 사람들은 아무에게나 스승이란 단어를 붙이지 않는다. 학창 시절에 나에게 커다란 영향을 준 선생님에게 은사님이라는 정도의 단어를 사용할 뿐이다. 스승은 한 시절에 영향은 주거나 한 분야에서 가르침을 준 사람들을 지칭하기에는 차원이 다른 단어이다. 스승은 그를 만나고 나서부터 자신의 삶이 중단되는 때까지 영향을 끼치는 사람으로 소위 영혼을 흔드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스승을 만나기는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사람들의 소유적 욕망에서 스승이라는 용어를 남발하게 되면서 스승의 모습을 대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현대사회에서 스승은 넓은 의미의 가르침과 배움의 관계와 간접적인 인연에도 적용될 수 있는 개념으로 확장하여야 한다. 문명을 이어가는 데 있어서 그 전달자가 어떤 사람인 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임은 누구나 알고 있다. 인류의 역사가 이러한 사실을 반증하고 있다. 특히 폭군이나 전쟁이 일어난 배후에는 그것을 부추긴 사람들이 꼭 있다. 혹자들은 그들을 스승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절대로 그렇게 불러서는 안 된다. 스승은 절대로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터지는 사건들에는 사건당사자가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한다. 사건당사자가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한다면 누군가는 간접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 그것을 우리는 최소한의 도덕적 감정이라고 부른다. 이 사회의 스승이 사라진 것은 이러한 사회적 사태에서 우연히 먼저 태어난 세대가 먼저 도덕적 책임을 져야 함에도 우연히 늦게 태어난 세대에게 도덕적 책임을 전가시키는 현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 늘 있는 일이겠지만 가끔씩 부각되는 학위논문에 대한 대필이나 표절 논란이 있다. 나의 기억으로는 힘없는 사람들은 논문과 학위를 취소당하고 힘 있는 사람들은 논란이 잠잠해지면 예전으로 돌아간다. 이러한 논란이 우연히 나중에 태어난 세대에게 어떻게 보일까? 자신들은 관행이라고 하면서 다른 세대에게는 다른 기준을 적용하는 사람들에게 시선이 고울 리 없다. 우연히 나중에 태어난 세대는 이러한 사람들을 꼰대라고 부른다.
스승은 개인마다 다른 시선을 가져야 하겠지만 공통의 사회적 합의는 있다. 그것이 사전적인 정의일 것이다. 사전적인 정의에도 여러 가지가 있으니 그 정의들 속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스승의 의미를 창조해 내는 것이 스승이라는 단어가 존재하는 이유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비약일 수도 있겠지만 스승이라는 단어 속에 반드시 함축되어야 할 단어는 창조성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에서 스승의 날은 5월 15일로 기념하고 있다. 원래는 이날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날이 한글을 창조한 세종대왕의 탄신일이라고 한다. 세종대왕에게 수식어를 붙일 필요가 없는 것은 우리 민족에게는 그 자체로 모든 것을 설명하기 때문이다. 아주 먼 후일에 세종대왕이 인류의 신화가 된다면 창조성이 첫 번째의 이유가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모든 인류의 신화 속에는 창조성이 다른 모습으로 스며들어 있다. 세종대왕만큼은 아니지만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친 사람들은 많이 있다. 그들 중에서 자신의 생각을 가다듬어주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면 자신의 삶을 풍부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세대 간 영혼의 울림, 스승과 제자
구관이 명관이라는 말은 항간에서 자주 듣는다. 이 말은 자주 듣기는 해도 씁쓸한 뒷맛을 남기는 듯하다. 당장 눈앞의 상황은 처리했으나 새로운 상황이 되면 어쩔 수 없이 구관을 찾아야 하나 딱히 믿음직스럽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그래도 배운 사람이 낫다는 말이 생겨났을 것이다. 기존의 것을 새롭게 해석하고 새롭게 적용하는 상황에 대한 한자 성어들은 많다. 하지만 스승과 제자라는 틀을 고정하면서 스승과 제자를 한 차원 높게 평가하는 말은 청출어람이 제격인 것 같다. 영화‘기생충’의 봉준호 감독이 아카데미시상식에서 비록 직접 배우지는 않았지만, 자신에게 정신적 가르침을 준 외국의 원로 감독에게 감사의 인사를 할 때 떠오른 한자 성어는 ‘청출어람’이었고 시상식장의 분위기는 격이 올라갔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해의 그 영화제가 가지는 의미는 수많은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으니 더 언급할 필요는 없겠다. 그 외국 원로감독이 그 영화제를 통하여 하나의 의미를 기록하였다면, 봉준호 감독은 외국 원로감독의 기록보다 더 높고 넓고 깊은 의미를 기록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영화나 영화제의 의미를 벗어나서 인류에게 더 나은 의미를 전달했다고 보며, 예술은 그렇게 인류의 발자취를 남기고 있다고 하겠다.
‘청출어람’이라는 뜻을 알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한자 성어를 대하면 아마도 학창 시절을 떠올릴 것이다. 왜냐하면 스승이라는 단어 때문이다. 우리는 스승이 선생이라는 평범한 의미로 전락한 시대에 살고 있다. 스승이라는 단어보다는 선생님이라는 단어에 익숙한 현재 세대가 스승이라는 단어를 기억하는 것은 순전히 스승의 날이라는 기념일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학부모와 학생들에게는 꺼림칙하고, 어떤 선생들은 왠지 거북스러운 날이기도 할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스승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스승의 위치에 있던 사람들과 그 절대적 신뢰를 악용한 사람들로 인해서 처참히 무너뜨렸기 때문일 것이다. 스승의 신뢰도가 단지 점수를 높이는 지식전달자로 떨어진 지금도 혹자는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말을 하고 있지만, 그 말을 하는 사람의 스승에 대한 인식과 선생의 그림자를 밟고 다니는 사람 간에는 차원이 다른 경험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의 기억에 남는 스승과 선생님의 명칭을 약간은 혼용할 수 있도록 하는 분이 있다. 내가 이분을 스승이라고 굳이 명확하게 부르지 못하는 것은 내가 당시의 상황이 혼란스러워 그분의 참모습을 받아들인 것이 부족하기 때문이고, 반드시 ‘님’ 자를 붙이기에 기억에 남는 것은 한 해 동안 학급 비품을 조달하는 비용을 단 한 번도 부담시키지 않았다는 점이다. 물론 학급 비품의 비용을 부담한 학생들이 있었다. 부모가 재력이 있는 급우들이었다. 누가 언제 얼마나 부담했는지는 끝까지 알려 주시지 않았고 나는 졸업을 했다. 졸업 후 사회에 나와서 생각해 보니 선생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선생님과 관련된 단어를 접할 때마다 그분을 생각한다.
청출어람이 다시 떠오른 것은 어떤 대학 총장의 양아치질이 보도된 때이다. 드러나지 않은 추악한 일들을 벌이는 선생들이 있다는 것은 그렇지 않은 선생님들에게 정말 맥이 풀리게 하는 짓이다. 사회는 대학 총장보다 더 훌륭한 사람들을 길러주기를 바라면서 사회적 존경과 위엄을 부여한다. 청출어람에서 청은 제자이다. 람은 스승이다. 스승은 철학, 윤리, 도덕, 전문 지식과 이론은 물론이고, 그러한 지식과 정보들을 바탕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단초를 얻도록 해줄 수 있어야 스승보다 푸르른 제자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청출어람을 제자의 뛰어남을 추켜세워서 스승의 업적을 자랑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여 서는 안된다. 그래서 우리는 스승이 스승 될 수 있는 자격을 생각해보아야 하며, 스승이 되려는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는 더 높고 다른 차원의 노력이 필요한 자리임을 인식해야 한다. 스승이 스승 될 수 있었던 것은 스승이라고 불릴 수 있는 사람들을 역사가 가르치고 단련시켰기 때문이다. 스승은 세대 간의 영혼을 이어주는 소중한 사람들이다.
엄격한 관념으로 교육에 관한 관심을 기울인 동양에서는 기원전부터 시작되었다. 중국의 춘추 전국 시기의 극심한 혼란을 겪고 난 사람들은 교육의 중요성을 알아차리고 훌륭한 사람들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를 깨달았다. 그래서 스승이라는 사람들의 인품과 인격의 차원을 대단히 높게 설정하였다. 중국사상의 한 획을 그은 제나라는 ‘직학’이라는 학문연구기관을 세우고 지원하였다. 그러한 나라가 그 자원을 활용하지 못하고 천하를 통일하지 못한 것은 의문으로 남는다. 역사에서 만약이란 상상은 의미가 없다고 하나, 제나라가 직학에서 얻은 다양한 사상을 활용하여 나라를 통치했다면 분명히 지금의 모습은 달라졌을 것이라 확신한다. ‘직학’에서 연구한 학문을 기록한 『직자학』에는 교육이라는 인간 활동의 의미와 교육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자세를 무게 있게 전하고 있다.
이천 년 전의 가르침의 무게
若夫敎者, (약 부교자)
標然若秋雲之遠, 動人心之悲, (표연약 추운 지원, 동인심지비)
藹然若夏之靜雲, 乃及人之體, (애연 약하지 정운, 내급인지체)
窵然若皓月之靜, 動人意以怨, (조연약호월지정, 동인의 이원)
蕩蕩若流水, 使人思之, 人所生往, (탕탕약유수, 사인 사지, 인소생왕)
敎之始也.身必備之....(교지시야, 신필비지)
가르침이라는 것은
드높기가 마치 가을 구름처럼 아득하여 사람의 슬픈 마음을 일으키고,
부드럽기가 마치 여름의 고요한 구름 같아서 사람의 몸에 스며들며,
그윽하기가 마치 고요한 달과 같아서 사람에게 애달픈 생각을 일으키고,
넓은 무거움이 마치 흐르는 물과 같아서 사람으로 하여 생각과 지향하는 바가 있게 한다.
교육의 시작은 윗사람이 반드시 이러한 것을 갖추어 모범이 되어야 하는데...
표(標)는 우듬지를 말한다. 우듬지는 나무의 중심에 있는 가장 높은 가지를 말한다. 이 가지는 나무의 성장을 결정하는 아주 중요한 가지이다. 산림이 우거진 곳에 가보면 이 가지가 다른 나뭇가지에 막혀서 눌리면 말라죽거나 별로 모양이 좋지 않게 된다. 표연의 뜻을 느껴보려면 가을철 낙엽이 진 후에 거목들의 밑둥치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면 느낄 수 있다. 물론 그 나무의 높이를 자로 재면 얼마 되지는 않을 것이나, 그 느낌은 눈이 어질어질하게 높게 느껴진다. 가을하늘의 높이는 사람들이 그저 높다고만 느낄 것이다. 거기에는 특별한 비교 대상이 없을 것이다. 그곳에 떠 있는 가을 구름은 그저 아득할 뿐이다. 그 가을하늘의 구름을 향해서 우듬지가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있다. 인간이 이때 느끼는 감정을 ‘슬프다’고 했으나, 이는 외부 자극에 대한 반응에 따른 슬픔이 아니라, 원초적 감정일 것이다. 인간이 저 높은 곳에 닿지 못하는 육체적 능력에 대한 슬픔은 더더욱 아닐 것이다. 우리는 그 높은 곳에 다다르지도 못하는 쓸데없는 몸짓을 할 필요가 없다는 좌절감이 아니라, 그곳에 이르지는 못해도 발버둥이라도 쳐보겠다는 용기를 내어 봄 직하다. 우듬지의 시선은 높고 넓음을 추구해야 한다. 우듬지가 자신의 살아온 시절을 이야기하는 것은 주저앉는 것이다. 겨울 산과 여름 산의 차이는 우듬지의 역할을 살필 수 있는 시기이다. 여름 산에서는 온갖 생명들이 얽히고설키어 인간이 발을 들여놓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여름 산에는 생명의 왕성함을 대면할 수 있다. 아무리 작은 풀도 키 큰 나무 아래에서 생명을 유지한다. 넝쿨은 키 큰 나무들의 꼭대기를 향해 올라가기 위해 몸부림친다. 겨울 산에서는 여름 산의 그 생명들이 잠을 잔다. 모든 잎이 떨어지고 나서 산으로 들어가 보면 의외의 장면을 대한다. 여름의 그 빽빽하던 풀잎들이 잠자고 있을 때 키 큰 나무들이 차지하고 있는 공간이 의외로 넓음을 느낀다. 우듬지의 역할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좋은 광경이다. 우듬지가 좁고 낮게 발달한 나무들은 거의 살아남지 못함을 예견할 수 있는데 나무의 느낌이 강하지 못함을 느낀다. 우듬지는 그 장소에서 살아남기 위해 높고 넓게 자랄 수 있도록 나무의 형태를 갖추면서 올라간다. 그런 나무 아래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면 장엄함이 느껴진다. 사람의 스승이 되려는 사람들은 우듬지의 기량을 닦아야 할 것이다. 후배들에게 자신의 살아온 시절에 얽매여, 우듬지를 안주시키는 태도를 보여 선 안된다. 스승은 우듬지가 동량이 될 수 있도록 곧게 높게 넓은 세계를 보여주려는 태도를 지속해야 한다.
애(藹)는 사전에서 열매가 많이 열린, 우거진 형상을 의미한다고 되어있다. 마치 스승에게는 제자가 많으며 그의 영향은 넝쿨 줄기 마냥 번짐을 묘사한 것 같다. 열매가 많이 열려서 우거진 광경을 쉽게 접하기는 어렵다. 씨앗도 열매이고 보면 눈 아래에서 애연한 모습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봄철의 민들레는 꽃을 일찍 피우고 씨앗을 날려 보낸다. 꽤 넓은 면적에 민들레가 거의 동시에 홀씨를 날리는 장면은 따사한 햇살 아래서 고운 눈송이가 하염없이 휘날리다가 사람의 몸에 고요히 내려앉는 광경을 닮았다. 고무풍선이 늘어나듯 아지랑이가 살찌면 어디선가 반드시 바람이 분다. 그 바람에 민들레 홀씨가 한꺼번에 날아오르면 구름 속에 들어있는 기분이 든다. 바람이 멎고 홀씨들이 머리와 어깨에 내려앉으면, 마음까지도 내려앉는 것 같다. 여름 하늘의 구름은 고요하다. 비가 많이 와서 많이 움직일 것 같지만, 비구름이 아닌 경우에는 고요하다. 거의 움직이지 않는 것 같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내려올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아마도 여름의 습한 기후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여름의 구름은 다른 계절에 비해서 유난히 하얗다는 느낌을 받는데, 비가 온 직후에 산등성이를 지날 때, 비가 온 직후 바닷가에 있을 때, 새벽녘 산마루에서 발아래 구름이 흐르고 햇살이 비칠 때이다. 바람이 멎어야 민들레 홀씨가 주변을 덮을 수 있는 것처럼, 여름 구름의 하이얀 고요함이 사람의 신체에 깃들 듯이 가르침은 스며들어야 한다. 가르침이 스며든다는 것은 스스로 받아들여 자신의 마음속에 간직한다는 것이다.
조(窵)는 그윽하면서 깊숙하고 고요하다고 뜻을 새긴다. 현대문명의 총아 중의 하나인 전기는 우리의 감상을 몰아내고 있는데, 흰 달의 그윽함도 그중 하나이다. 식물도 밤에는 잠을 자야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인간의 안전에 밀려서 식물들은 잠을 설친다. 전깃불을 켜주어서 밤에도 놀 수 있다고 식물들이 고마워하지는 않을 것이다. 전기가 부족하여 가로등이 없던 시절에 하얀 보름달이 떠오르면 낮의 풍경에서 보는 거리감과 다른 거리감을 느꼈었다. 징검다리를 건널 때, 처마에 올라갈 때는 반드시 확인해야 했다. 달빛이 고요하니 더 깊숙해지는 거 같았다. 달의 하얀빛도 깨끗함을 드러내어 깊이를 깊게 하는 듯하다. 하얀 보름달의 위력으로 밤은 세상 만물을 잠재워 고요하게 하며, 그 깊이를 영원하게 하는 것 같다. 하얀 보름달의 깨끗한 기운은 설핏 날카로운 푸른빛을 연상시키는데, 사람 몸에 스며들면 정이 떨어질 것도 같다. 이러한 가을날의 시퍼런 그윽함은 그에 범접하기 두려운 원망을 느끼게 한다. 이 또한 나에게 해로움을 주는 데서 오는 원망은 아니다. 이것은 빛깔의 깨끗함이 아니라 경지의 깨끗함이며, 만들어내는 그윽함이 아니라 자체가 그윽함이라는데 도달하지 못하는 아쉬움의 다른 표현이다. 그래서 스승들은 더 높은 경지에 도달하기 위하여 그 경지를 원망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자신을 다잡는다.
탕탕(蕩蕩)은 물이 흐르는 모양을 묘사한다. 그러나 이러한 물의 흐름은 개울물이나 강물이 유유히 흘러가는 모습과는 차원이 다른 물의 흐름이다. 홍수가 나서 강물의 흐름이 커지면 그 모습은 당당하기가 그지없다. 모든 것에 구애 없이 흐르는 강물의 힘은 모든 것을 한순간에 정리하고 일순간 고요함을 드러낸다. 탕탕(蕩蕩)하다는 것은 넓은 강에 홍수가 났을 때 강의 중간에서 흐르는 물을 바라볼 때의 느낌과 같을 것이다. 넓게 흐르면서도 두렵지 않으며 혼탁한듯하나 깨끗하며, 강한듯하지만 부드럽게 보이며 모든 것을 삼킬듯하지만 사납지 않으며 뛰어들어도 품어줄 것 같다. 당당함 속에 드러나는 고요함이 탕탕하게 흐르는 물의 모습이다. 그 속에서 물의 세력을 보는 것이 아니라, 고요함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인간의 함량을 보아야 한다. 그래서 사람으로서의 당당함을 생각하고 의연하게 행동하는 힘을 보아야 한다. 이러한 것들이 교육이 지향하는 바이다.
교육이 이러한 대단히 높은 경지의 뜻을 가진 만큼, 교육자는 그 생각과 행동거지는 남달라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사상에 흐르고 있는 스승의 상이다. 우리가 비록 스승의 관념을 많이 망가뜨렸다 하더라도, 이러한 교육의 관념을 한 번씩 되돌아볼 수 있으므로 사회는 유지되어 가는 것이다. 만약 지금과 같은 혼란한 교육 현장이 지속된다면 미래를 그렇게 낙관할 수는 없을 것이다. 흔히들 교육은 ‘백년지대계’라고들 한다. 그러나 백 년을 살지 못하는 인간이 백 년 후의 일을 정하는 것부터가 교만이 아닐까? 백년지대계는 교육의 원칙이나 이념을 정하는 일이다. 단순히 몇 년 앞의 정책을 정하는 일을 두고 우리가 백년지대계라는 말을 사용하기는 낯이 간지럽지 않을까? 그 단순히 몇 년의 정책들이 쌓이고 쌓여서 백 년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한 번의 정책으로 백 년을 준비할 수는 없는 것이다. 짧은 기간의 정책이 백 년을 준비할 수 있는지를 꼼꼼히 자주 열심히 살피는 것이 백년지대계이다. 교육의 이념, 사상, 원칙들을 끊임없이 돌아다보는 노력을 기울이면서, 몇 년 후를 대비하는 모습이 필요한 것이다. 여기에 꼭 필요한 사람들은 시세의 이익에 흔들리지 않으며, 고고한 정신을 함량 하겠다는 스승과 이러한 스승들의 그림자도 밟지 않겠다는 사람들이다. 가르침이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사람의 생각을 움직이는 기능을 한다. 그래서 스승과 제자는 상승 활동이어야 아름다운 것이다. 스승을 벽안시하고 제자를 종 부리듯이 한다면 그것은 스승과 제자가 아니라, 마름과 소작인 사이일 뿐이다. 거기에는 착취와 찌들임이 있을 뿐이다.
현대의 인성교육이란? 사회가 추구하고 있는 윤리, 도덕, 법, 질서 등을 무조건 따르도록 하는 것은 아니어야 한다. 어떤 사회든지 기본적인 수준의 합리적 묵계들이 있다.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그러한 기본적인 수준조차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어릴 적부터 그러한 기본 수준의 가치들을 내재화시켰고, 그러한 사람들은 충분히 사회의 일원으로 성장 발전해 간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무너지기 시작하며, 최악의 경우는 자신의 전 생애를 먹칠하면서도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특히, 젊은 시기에 화려함을 얻은 사람 중에서 그들의 화려한 시절이 오래가지 않을 것을 알기에 이러한 경향을 더 많이 보이는 것 같다. 그래서 인성교육은 그저 사회가 요구하는 것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가 요구하는 것과 자신이 원하고 좋아하는 것을 조화시켜 나갈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과 관계가 되는 교육이어야 한다. 그러기에 스승과 선생이라는 틀에서 생각이 필요한 시기일런지도 모른다. 과연 스승과 선생의 경계는 어디쯤인가? 사람으로는 같은데 받는 대접이 갈리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가르치는 행위가 한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이 절대적이지 않은 시대이기는 하지만, 가르치는 직업에 종사하는 것은 부담이 적지 않은 일이다. 선생이 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교육을 받고 일정한 검증을 통과하면 자격은 주어진다. 자격을 획득하였다고 해도 가르치는 자리가 주어지지는 않는다. 그것은 선생의 자격을 획득한 개인의 몫이다. 여기까지는 일반적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의 행위와 다를 것이 없으므로, 선생으로 불리고 스승으로 대우받는 경계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타인에게 여러모로 영향을 미치는 사람을 우리는 스승이라고 한다. 그래서 스승으로 대우받으려면 선생이라는 직종이 주는 무게를 온전히 감내하는 태도를 견지하여야 한다. 선생도 하나의 직종으로 묻혀버린 현대사회에서 전설처럼 내려오는 스승과 제자에 관한 이야기는 전설일 뿐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전설을 현대사회에서 풀어내는 사람들이 있다. 청출어람은 몇 개의 한자로 엄청나게 풍부한 인간사의 일을 묘사하고 있다. 선생은 청출어람의 뜻을 학생들에게 새겨주지만, 스승은 자신의 삶을 전설을 이어가는 무대로 내어주며, 제자들을 품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