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묶고 가둔다면 사랑도 묶인 채 미래도 묶인 채 커질 수 없는데...
프러포즈받았다.
프러포즈를 할 거라는 남자 친구의 말에 사실 언젠가는 받을 줄 알았다. 상견례 전에만 하길 바랬다. 날을 잡아 놓고 하는 프러포즈는 받고 싶지 않다는 소심한 자존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미 양가 결혼 얘기 오가고 어느 정도 주변 사람들도 알고 있는 마당에 별 다를 게 없어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시기가 나에게는 있었다. 근데 사실 그게 그 날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프러포즈에 대한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여느 사람들처럼 분위기 좋은 식당에서 혹은 분위기 좋은 장소에서 한쪽 무릎을 꿇은 남자가 여자에게 프러포즈 반지를 건네며 '나랑 결혼하자'와 같은 그런 느낌의 프러포즈를 생각했다. 물론 여기서 조건이 있었다. 사람이 둘을 제외하고 아무도 없는 곳일 것. 무릎을 꿇지 않는 것. 이 두 가지는 사실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보기 싫었다. 위에서 나를 올려다보면 내가 너무 못생겨 보임. 아무튼 내가 알고 있는 프러포즈의 느낌은 이랬다. 근데 그날 이후로 바뀌었다. 내가 받은 프러포즈가 제일 멋지고 좋음. 그리고 귀여움.
데이트를 다 끝내고 오는 길이었다. 평소 데이트랑 다름이 없었다. 그냥 밥 먹고 카페 가고 오전에 웨딩 박람회를 갔다 오긴 했지만 그거 외에는 평범한 데이트였다. 원래는 도착하면 공원에서 산책하다가 집에 갈 예정이었지만 가는 길에 비가 오기 시작해 그냥 주차장에서 유튜브 영상을 보다가 집에 가기로 했다. 나는 열심히 빠더너스의 복학생 필마이드림을 검색했다. 그래 나만 또 문상훈에 진심이었지. 도착해서 주차를 하고 그대로 시동만 끈 채 문상훈 브이로그 영상을 봤다. 영상 하나를 재밌게 보고 '혜진이 누나(문상훈이 짝사랑한 누나)'에 대해서 알려주고 싶어서 조별 과제 영상을 검색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남자 친구가 이거 먼저 봐야 된다고 본인 휴대폰을 들었다.
나는 또 무슨 보물섬(남자 친구가 보는 유투버) 영상 틀어주나 보다 했는데 혼자 열심히 내 쪽으로 안 보이도록 폰을 기울여 가며 뭘 틀더니 (근데 본인 쪽 창문으로 보였음. 남자 친구 특 : 귀여움) 이거 보고 있으라며 손에 쥐어주고는 냅다 차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졸지에 혼자 조수석에 앉아서 영상 보는 사람 됨. 어쨌든 주황색에 동그라미가 잔뜩 있는 (무슨 거품 효과인가) 멈춰진 화면을 플레이했다. 프러포즈 영상이었다.
배경음악으로 '서인국, 정은지 - All For You'가 흘러나오면서 지금까지 4년 동안 찍었던 사진이 영상에 맞춰 나왔다. 그러면서 직접 쓴 듯한 편지 글도 같이 나왔다. 원체 편지를 종종 써주던 사람이라 비슷한 내용을 많이 읽었기에 처음에는 그냥 웃겼다. 그때 분위기도 웃겼다. 아니 나보고 영상 보고 있으라는 사람이 갑자기 트렁크를 열고 부스럭부스럭 대고 내가 웃으니까 창문 틈으로 '왜 웃어~' 이러고 아니 그럼 내가 집중을 하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혼란스러운 분위기 속(물로 나 말고 남자 친구가)에서 영상에 집중했다. 그래도 사람이 4년 동안 사귄 추억이라고 사진을 찍었을 때가 기억나면서 점점 북바쳐올랐다. 이런 상황에서도 프러포즈받으면 여자는 운다는 게 증명됨. 아니 물론 내가 허벌 눈물인 점도 있고. 아니 갱년기인가.
영상이 끝나고 어색하게 운전석 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 친구가 프러포즈를 하는 남녀와 장미꽃이 들어있는 조명 꽃 장식품을 줬다. 생각해보니까 지금까지 남자 친구가 나에게 선물할 때는 항상 LED 꽃 또는 조화(원래는 생화를 선물했지만 내가 생화를 죽여서 거절함)와 함께 선물했다. 그냥 태생이 귀여운 사람인 듯. 아쉽게 건전지가 따로 들어있지 않아 불이 켜진 모습을 당장 보지 못해 아쉬웠지만 귀여웠다. 내가 꽃에 정신이 팔려 있는 사이 '그리고 이거...' 하면서 민트색 종이가방을 건네줬다. 헐. 웨딩 박람회에서 예물 얘기할 때 줄기차게 얘기 나온 티파니였다. 다이아가 달린 로즈골드 색상의 금줄 팔찌였다.
'무슨 티파니야'
'아니, 그래도 살면서 처음인데 좋은 거 하는 게 좋지'
사실 나는 브랜드에 문외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티파니 앤 코라는 브랜드가 비싼 건 알고 있다. 그래서 생각도 못했지. 좋은 식당에서 프러포즈를 할까 생각했지만 식당보다는 프러포즈 선물에 더 비중을 두고 싶어서라고 했다. 장소가 무슨 소용이야 어쨌든 내 팔찌는 티파니인데. 다이아 필요 없고 적당한 정도의 선물이면 된다고 생각했던 게 무색해질 만큼 좋았다. 그리고 엄청 티 냈다. 방금 울었는데 금세 웃었다. 아니 사람이 이렇게 속물적입니다, 여러분. 다이가 싫어하는 여자 없어요. 그냥 다이아가 없는 겁니다, 여러분!
청약 얘기로 혼인 신고를 미루자는 얘기에 삐졌다가 30만 원 홀딩(예물 계약)에 어떻게 알거지가 되냐는 내 발언에 찔렸다가 눈치 없이 빠더너스 영상 보자는 여자 친구한테 언제 프러포즈를 할지 머리 아팠다가 여러 모로 홀로 정신없었던 그리고 이 프러포즈에 월급을 탕진한 남자 친구. 사랑한다고 ㅎ.
후일담
1. 남자 친구는 애초에 이 선물을 미리 사놓은 지 꽤 됐다고 한다.
2. 빠더너스 영상 안 보고 싶었다. 그리고 영상 기억도 안 남.
3. 원래 비가 안 오면 산책할 계획이었는데 사실 산책 안 가고 어떻게든 차에 있으려고 했다. 그런데 다행히 하늘이 도와줌.
4. 내가 남자 친구한테 영상 말고 직접 말로 하라고 해서 남자 친구가 '결혼해줄래'라고 했을 때, 싫다고 했다. 여기서 남자 친구는 다시 돌려달라고 함. 귀여움.
5. 운 이유 : 결혼하기 싫어
6. 근데 수갑 찬 건 돌려주기 싫어서 결혼해야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