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영화 <오펜하이머,2023>에 대해 리뷰하기에 앞서,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놀란은 데뷔작인 <미행, 1998>의 개봉 이후 <메멘토, 2000>를 통해 그만의 작품성을 널리 인정 받으며 스타덤에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메멘토'라는 작품은 전에 없던 복잡한 플롯으로 설계되어 팬들에게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겨 주었고, 점차 놀란은 '매우 특별한 감독'으로 인식되기 시작합니다. 그의 특기인 '플롯(Plot)의 재구성' , 즉 이야기 속 사건의 흐름과 배열을 복잡하게 설계하고 재배치하는 기술은 관객들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며 극이 진행되는 내내 몰입하도록 하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팬들은 '미로 같은 플롯'으로 놀란을 기억하게 됩니다.
떠오르는 신예 감독이었던 놀란은 2008년이 되던 해에, 한 편의 블록버스터 영화를 통해 상업적으로도 대단한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다크나이트, 2008>는 슈퍼히어로 장르의 영화 중 역대 최초로 10억달러 고지를 돌파했으며, 작품성 역시 평단과 대중 모두에게 엄청난 호평을 받는 영화로 남게 되었죠. 이미 개봉 후 16년이 흘렀음에도 같은 장르의 영화들 중에서는 '다크나이트'에 비견할만한 영화가 등장하지 않았다는 평이 지배적일 정도입니다. 이후에도 크리스토퍼 놀란은 말 그대로 감독으로서 '탄탄대로'를 걷게 됩니다. 차기작인 <인셉션, 2010>을 통해 그의 독창적인 연출은 유지하되 스케일이 더욱 확장되고 플롯은 한층 더 정교해졌음을 보여주었고, 이후 <인터스텔라, 2014>는 국내에서만 무려 천 만 관객을 돌파하는 기염을 토했죠.
1. 스타 감독의 탄탄대로, 그러나..
배우 킬리언 머피를 지도 중인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
이후에도 그의 작품활동은 항상 팬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아 왔으며, 놀란은 전세계에서 '스타 감독'이라 칭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인물 중 하나로 자리매김 했습니다. 놀란의 필모그래피는 단 한 차례도 크게 삐끗하거나 미끄러진 일이 없으며, 작품성과 상업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놓치지 않는 커리어를 밟아 왔습니다. 그런데, 이렇듯 완벽해보이는 그의 커리어에도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진정한 거장이라면 반드시 욕심이 날 수밖에 없을 '수상'과는 계속 연이 닿지 않았던 겁니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연출하며 높은 평가를 받아 왔지만, 권위 있는 영화제(아카데미를 포함)에서는 수상경력이 전무했습니다. 후보에 노미네이트 되었던 경험은 다수 있었으나, 단 한 차례도 감독으로서 수상(작품상, 감독상 등)하는 기쁨을 맛본 적은 없었죠. 그 이유는 여러 가지를 꼽을 수 있겠지만,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역시 '평가 기준에 부합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그는 독창적이고 도전적인 연출로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클래식(고전성)' 내지는 영화제에서 1등을 거머쥘만한 '예술성'을 담보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랬던 그가 조국의 역사 및 실존인물의 생애를 다룬 영화 <오펜하이머, 2023>를 연출한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 우리는 눈치를 챌 법도 했습니다. 이번에는 그가 '작정하고' 승부하기로 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2. 오펜하이머, 정공법으로 승부하다.
오롯이 역사의 장면을 생생히 재현하다.
영화 <오펜하이머, 2023>는 놀란의 필모그래피 內 그 어떤 영화와도 전혀 다른 작품입니다. 이전까지 그가 만든 영화들은 모두 자신만의 기발한 아이디어와 미로 같은 플롯을 구심점으로 하였으나, 이번 영화는역사적 사실을 생생하게 연출하는 것에 오롯이 집중합니다. <오펜하이머>에 등장하는 이야기는 실증적인 태도로 짜여져 있으며 여기에는 감독의 독창적인 각색이 관여하지 않습니다. 제96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남우조연상을 동시에 수상하는 등, 이 영화에 등장하는 배우들의 탁월한 연기 역시 모두 '실존인물을 세세하게 재현'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또한 놀란은 원자폭탄 탄생의 역사를 최대한 가감 없이 전개하되, 인물의 감정과 사건의 흐름은 세심하게 연출하여 이를 매우 생동감 있게 느껴지도록 합니다. 이에 더해 오프닝에 등장하는 '원자의 움직임'의 역동적 연출, 흑백시퀀스와 강렬한 색채를 넘나드는 시각적 대비는 놀란 감독의 진일보한 연출역량을 유감없이 드러내 주었습니다. 즉, 놀란은 이번 작품을 통해 '정공법으로 싸우겠다'는 승부수를 띄웠다고 평할 수 있겠습니다.
놀란의 오랜 팬들 중 일부는 영화 <오펜하이머>에 크게 실망했을지도 모릅니다. 순수하게 '재미' 측면에서만 보자면 이번 작품은 이전의 필모그래피들에 비해 특별히 나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특유의 '미로 같은 플롯'이나 '기발한 상상력'이 결여되어 있으니, 아마 독자분들 역시 이 영화를 '지루하다'고 평했을지도 모릅니다. 저 역시 충분히 그렇게 느낄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무려 180분이라는 시간 동안 등장하는 수 많은 인물들과 역사적 사실들, 여기에 쉴 틈 없이 주입되는 어마어마한 분량의 대사들은 관객들로 하여금 피로감을 느끼게할 만한 지점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꼭 칭찬하고 싶은 부분은 이 '영화의 음악'입니다. 만약 '루드비히 고란손'의 탁월한 OST 작업이 곁들여지지 않았다면, 무려 180분이라는 시간 동안 이 영화에 온전히 집중하기는 어려웠을겁니다. 과학자들의 연구와 지적인 대화를 위주로 전개되는 이 작품에서, 루드비히 고란손의 OST는 마치 블록버스터를 연상케하는 긴장감을 더해주며 극의 분위기를 지속적으로 환기시킵니다.
3. 거장의 반열에 오르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수상하는, 96회 아카데미 '감독상'
결과적으로 장장 데뷔 26년차에 그가 띄웠던 승부수는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영화 <오펜하이머, 2023>를 통해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을 모두 거머쥐었으며, 그 밖에도 촬영/편집/음악상/남우주조연상을 싹쓸이하며 무려 7관왕의 영예를 안게 되었습니다. 이번 작품을 통해 그는 단순한 '스타 감독'을 넘어서, 영화사에 '거장'이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을만한 입지에 오른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그의 오랜 팬인 저로서는 이번 작품에 다소 아쉬운 점이 남을 수 밖에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언젠가는 놀란의 차기작으로 <인셉션>과 같은 작품을 만나기를 기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에 기록되어 있는 장면들을 연출하기에는 그의 대담한 상상력과 그를 뒷받침 하는 정교한 설계력이 매우 아깝습니다.(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차기작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는 아직 공개된 것이 없습니다. 다만, 일부 기자에 의하면 '더 프리즈너(The Pirsoner, 1967)'라는 미국의 TV시리즈를 영화로 리메이크할 것이라는 소식이 있습니다. 우화적인 요소와 초현실적인 분위기에 컬트적인 요소를 갖춘 작품이며, 주인공이 낯선 장소에 납치된 뒤 감시 당하며 전개되는 이야기라고 합니다. 언젠가 팬으로서의 기대를 충족하는, 놀란의 담대한 상상력을 담아 낸 차기작이 완성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으며 리뷰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