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소 가는 길

by 길은연

12월에 들어서니 날씨가 제법 쌀쌀해졌다. 수은주가 영하로 내려가고 바닷바람이 세차게 몰아치니 선뜻 현관 밖을 나서기가 망설여진다. 그런데도 나는 아들과 다이소로 간다. 아들의 데이트 신청을 뿌리치지 못하고 두툼한 패딩에 머플러까지 둘렀다. 핸드폰과 지갑을 주섬주섬 주머니에 넣고 장갑을 끼고 나서니 차가운 바람이 콧속을 뻥 뚫어놓는다. 세찬 바람에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눈물이 찔끔 고인 실눈을 하고서 아들을 보고 웃었다. 아들과의 데이트가 시작된다.

다이소 데이트는 지난여름부터 시작됐다. 가는 길은 겨우 20분이 채 안 된다. 빈 상가가 듬성듬성 있는 빌딩들을 지나면 자그마한 마트와 다이소가 나온다. 1층엔 이마트 슈퍼가 있고 2층엔 다이소다. 가는 길에 아들은 하루 종일 회사에서 있었던 일과 친구 이야기, 책 이야기, 영화 이야기 등등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나는 주로 이야기를 들어주고 맞장구쳐주고 웃어준다. 그게 우리의 데이트다.

오래전 기억이 떠오른다. 그때도 아들과 데이트를 했다. 다섯 살 꼬마 손을 잡고 그 걸음에 맞춰 걷던 엄마였을 때다. 꼬마는 길가에 핀 꽃을 하세월 들여다보았다. 걷다가 멈추기를 반복하며 느릿느릿 걸었다. 이제는 훌쩍 커버린 아들이 긴 다리로 엄마의 짧은 보폭에 맞춰 걸어준다. 다섯 살 아이의 얼굴을 내려다보면 얼굴 뒷배경이 예쁜 꽃밭이었는데 어른이 된 아들의 얼굴을 올려다보니 푸른 하늘이 배경이다.

훌쩍 커버렸다.

이곳 영종도로 이사 온 후 갈 곳이라곤 다이소 밖에 찾지 못했다. 차를 타고 더 멀리까지 갈 수도 있지만 걷기 좋은 거리에 다이소가 있었다. 주로 다이소로 놀러 가다 보니 언제나 '다이소에 가요' 하는 것이다.

그곳에 가면 우선 이층으로 올라가서 넓지 않은 매장을 꼼꼼히 살펴본다. 바뀐 거라곤 하나 없지만 진열된 상품들을 보며 품평회도 한다. 그중 문구 앞에서 오랫동안 시간을 보낸다.

"어머니 볼펜 필요하죠? 필요한 거 골라보세요." 하며 꼭 사주 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불태울 때는 웃음이 나온다. 어린 아들에게 '뭐 사줄까? ' '뭐 먹고 싶어?' 하던 말을 이젠 아들에게 듣다니...

"어머니 뭐 사드릴까요?" 나는 괜찮다고 하면서도 권하는 마음이 기특해 마트에서 캐러멜 한 봉지를 들고나왔다. 다이소에서는 예쁜 3색 볼펜을 사기도 하고, 새해 달력을 사기도 하고 대부분은 아무것도 사지 않고 그냥 나온다. 우리의 목적은 아무런 방해 없이 온전히 대화에 집중하는 것이다.

아들은 늘 말없이 핸드폰을 끼고 사는 엄마한테 대화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지금은 회사 일로 한국에 있지만 내년 9월이면 터키로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함께 보내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엄마를 두고 외국으로 나가 살아야 하는 마음이 어떨지는 상상이 되지만 요즘 시대엔 언제든 영상통화도 가능하지 않은가? 엄마인 나는 괜찮은데 아들은 걱정이 된다고 한다.

돌아오는 길, 아들은 나에게 당부한다. "어머니는 지금부터 나이 헤아리지 마세요. 그냥 마흔 살로 영원히 계세요. 그러다 내가 마흔 살이 되면 이름 부를 거예요. 그리고 내가 더 나이 먹으면 오빠 할 거예요. 그러니까 나이 먹지 마세요."

이루어질 수 없는 소원을 말하는 마음이 고맙다.

TV와 핸드폰 그리고 온갖 집안일에서 잠시 떠나 온전히 상대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며 대화하는 시간이 소중하다. 시간이 유한함을 아는 사람은 시간을 아름답게 보낼 수 있다. 더 나아가 자신에게 남겨진 시간이 얼마큼인지 아는 사람은 성실하게 행복하고 아름다운 자취를 남기려고 노력할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커다란 강아지가 주인과는 다른 방향으로 가려고 실랑이를 벌인다. 다섯 살 아이 같다.

'너도 다이소 가면서 대화를 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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