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산다 8화
대한민국 서울, 2023년 6월
5월 26일, 이탈리아 로마에서 고민과 함께 귀국 비행기에 올랐다. 94일 동안 출국 비행기에 올라타며 생각했던 것 그 이상을 만나고 얻었다. 잠시 가슴이 벅찼다. 그러나 그것들 은 이미 지나간 경험이었다. 길을 걸으며 마주 했던 고민과 결이 다른 고민이 닥쳤다. 한 국에 도착하면 무엇을 할 것인가! 나는 대학 등록금으로 모아 온 돈을 유럽에서 모두 써버렸다. 2학기 복학을 하려는 내게 남은 시간은 3개월 남짓이었다. 여행을 하며 신나게 쓸 땐 몰랐다. 등록금 삼백만 원은 내 생각보다 큰돈이었다. 여행이 막바지로 달려갈 때, 나는 폴란드 바르샤바에 머물고 있었다. 나는 폴란드에 있는 동안 벌어야 할 대학 등록금과 생활비 생각에 쉽게 잠에 들지 못했다. 8인실 호스텔에 누워 나는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모른 채 아르바이트 어플 속 공고를 바쁘게 훑었다. 나는 화면을 넘기다 왜 아르바이 트 어플이 제공한 일만 찾고 있는 걸까 생각했다. 나는 여행하며 내가 얻고 싶은 것이 있을 때마다 문을 두드렸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그 문이 항상 열린다는 기적 따위가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종종 문이 열리는 순간에 얼마나 행복했는지 떠올렸다.
한국에 도착한 지 일주일이 조금 안된 날이었다. 나는 여행할 때 예산을 아끼고자 주로 호스텔에 묵었다. 리셉션에 앉아 있는 직원들의 웃음 서린 얼굴이 자꾸 생각났다. 여권을 내 밀면 그 나라와 관련된 자신의 에피소드를 말하며 말을 걸고 그 나라 인사를 건네며 웃는 모습이 좋아 보였다. 나도 그 일을 하고 싶어 홍대와 명동 근처 호스텔들을 검색했다. 서울에 호텔은 많았지만 싸게 묵을 수 있는 호스텔이 유럽만큼 흔하지 않았다. 그러다 명동 에 위치한 호스텔이 낸 공고를 발견했고 나는 재빨리 이력서를 넣었다.
며칠이 지나도 내 이력서는 열람조차 되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이 턱 끝까지 차 올랐다. 여행하며 달라진 것이 있다. 누가 내게 다가와도 지레 겁을 먹고 경계부터 하지 않는 것과 반대로 다가가는 태도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 덕에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사실들을 알게 되고 내 한계선이 그만큼 넓어졌었다. 충분히 기다렸다 생각한 나는 명동역 근 처에 위치한 호스텔을 찾아갔다. 승강기에 올라 호스텔이 있는 4층을 눌렀다. 이상하게 떨리지 않았다. 잘 되지 않더라도 오늘은 내게 경험으로 남을 것이 분명했다. 문을 열자 밝은 색의 청바지에 흰색 티셔츠를 입고 검은 뿔테 안경을 쓴 남자가 있었다. 정돈된 머리와 깔끔한 옷매무새로 보아 차분한 사람 같았다. “어떻게 오셨어요?” 그가 말했다. “안녕하세요. 호스텔 직원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이력서를 넣었는데 아직 열람되지 않았더라고요. 그런데 꼭 일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면접 보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내가 말했다. 그 남자는 적잖이 당황한 듯한 눈치였다. “준비하신 이력서 있으세요?” 그가 말했다. 아뿔싸. 이력서조차 들고 오지 않았다. “아, 어플로 이력서를 써서요...” 당황한 나는 말끝을 흐렸다. 그는 일단 나를 공용공간으로 안내했다. “앉아 계시면 잠시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혹시 성함이 어떻게 되실까요?” “김윤찬입니다.” 순간 깨달았다. 면접 보러 찾아왔다고 말했지만 나는 면접에 대해선 생각조차 하지 않고 온 것을. 마음이 떨려왔다.
그는 전화를 끝낸 듯 내게 왔다. “자, 그러면 저희가 윤찬 씨에 대한 정보가 없으니까 우선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자기소개는 항상 막연하기만 하다. 무슨 말로 날 표현해야 할까. 한 가지만 생각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솔직하게 말하자. “네, 안녕하세요. 저는 스물세 살 김윤찬입니다. 저는 2월부터 5월까지 유럽 배낭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저는 한 번에 원하 는 대학을 가지 못해 수능을 여러 번 치렀습니다. 대학을 낙방하고 수험생 생활이 길어지자 자존감은 낮아지고 열등감은 심해졌습니다. 사수생이던 작년 가을, 더 이상 이런 모습으로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수험 생활 동안 따로 모아둔 아르바이트비를 모아 여행을 떠났습니다. 제가 원했던 여행은 단지 관광지만 보고 돌아오는 여행이 아니었습니 다. 어디든 그곳에서 살아온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었습니다. 그들의 얘기를 듣고 제 얘기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HelpX라는 사이트를 이용해 색다르게 여행했습니다.
제 경험을 예로 들어, 저는 스위스에 사시는 한 할머니 댁에서 집안일과 닭장을 고치는 일을 도와드렸고 할머니는 숙식 이외에도 스위스 곳곳을 보여주셨습니다. 또 음식을 같이 준비하고 대화를 나눴습니다. 독일 시골에서는 한 부부의 집에 묵으며 그들의 나무집을 짓는 것을 도왔습니다. 그들은 채식주의자였는데 그들과 함께 생활하며 채식을 체험할 수 있었고 제 편견을 깰 수 있었습니다. 또 목수팀과 집을 지으며 우리가 사는 집이 어떻게 단열이 되는지 몸으로 배울 수 있었습니다.
저는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 수동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남들이 가는 방향대로 따라가는 것에 불편함을 느꼈지만 그럼에도 따라갔습니다. 하지만 입시에 여러 번 실패하며 남의 기대를 저버리는 동시에 제 욕망에 솔직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여행을 통해 다양 한 문화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제가 그동안 두려움에 갇혀 살고 있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또 저는 글을 씁니다.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 속해 있기도 하지만 입시를 치르느라 대학에서 제대로 공부해 본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카카오에 속한 브런치라는 플랫폼을 통 해 합격 후 글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제 글을 쓰는 것은 제 일상이 되었습니다. 여행하면서도 역시 글을 썼습니다. 이상으로 마치겠습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내가 말했다. “네, 잘 들었습니다. 글을 쓴다고 하셨는데 최근에 쓴 글을 소개해주세요.” 그의 눈빛이 차분함 을 넘어 냉정하게 느껴졌다. “최근에 쓴 글은 외로움에 관한 것입니다. 지난 4월, 아이돌 문빈 씨가 세상을 떠났다는 뉴스를 접했습니다. 저 또한 혼자 여행을 하며 즐거웠던 시간보다 외롭고 두려웠던 순간들이 훨씬 많았습니다. 겉으로 보면 멀쩡한 사람들이 사실은 외로움을 잘 표현하지 못해 고통을 겪고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우리 사회가 외로움에 대해서 마음 편히 터놓을 수 있는 사회인가 하는 의문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제가 어떻게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대해왔는지 우리 사회는 어떠한 지, 다른 나라들 은 어떻게 대응하는지에 관한 글을 썼습니다.” 내가 말했다. “저희가 외국인들이 많이 찾는 호스텔인데 지원하신 이유가 있을까요?” “저예산으로 여행을 하다 보니 꽤 많은 호스 텔에서 묵곤 했습니다. 매번 호스텔에 체크인을 하러 들어갈 때 마주하는 직원들의 웃음 이 기억에 많이 남았습니다. 새로운 문화에서 온 사람들을 만나는 다양성을 저도 느끼고 싶어서 지원했습니다.”
그 후 자잘한 질문과 대답이 오갔다. 영어 면접도 있었다. 어렵지 않은 질문들이었지만 한 국인 앞에서 영어를 하는 것이 무척 떨렸다. 그 대목은 대차게 망쳤다. 더 이상 궁금한 건 없냐는 질문에 없다고 답했다. 그가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무엇이라도 물어봐야 했나 했지만 그 일이 정말 하고 싶었을 뿐 궁금한 점은 없었다. 마지막으로 악수를 청하고 나왔다. 거리로 나오자 그제야 긴장이 풀렸다. 곧바로 옆에 있는 편의점으로 들어가 캔맥주를 샀다. 쉬지 않고 단번에 모두 들이켰다. 기다리면 연락을 준다고 했다. 하지만 일주일이 넘도록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 포기하기 전에 한 번 전화라도 걸어보라는 이모의 말 씀에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다른 직원은 이미 다른 사람이 뽑힌 것 같다고 내게 전했다. 처음에 마음먹은 대로, 시도한다고 해서 잘 될 거란 이유가 없었다. 마음이 씁쓸했다. 하지만 이내 단념할 수 있었다.
그날 저녁은 피자를 먹기로 했다. 여행하며 배달음식과 자연스레 멀어진 나는 피자집으로 향했다. 피자를 포장주문하고 앉아서 기다리는 데 또 다른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호스텔의 인사 담당자였다. “주중에 지원하셨는데 주말에 자리가 있습니다. 하실 생각 있으신 가요?” 그녀가 말했다. “어.. 일단 생각해 보고 전화드릴게요.” 당황한 나는 이 말만 하고 바로 끊었다. 이미 주말에 근처 백화점에서 카페 알바를 하고 있는 까닭이었다. 사람 은 누구나 좋은 선택을 하면서도 남에게 도저히 들키기 싫은 비겁한 선택을 한다. 선택은 그 선택으로 말미암는 모든 기회비용을 감당하겠다는 선언과 같다. 지금이 그런 순간이었다. 마음이 찝찝했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었다. 다음 날, 카페를 찾아가 상황을 설명했다. 카페 매니저님은 내 선택을 존중한다며 되려 응원해 주셨다. 그리고 호스텔에 전화를 걸어 일을 하겠다고 했다. 6월 24일 아침, 나는 명동역에서 내려 남산타워가 보이는 길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