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산다 10화
독일 베를린, 2023년 4월
4월 24일 해 질 녘 나는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베를린으로 가는 초록색 플릭스 버스 맨 뒷자리에 앉아있었다. 베를린에 가는 까닭은 고등학교 친구인 소현과 그녀의 남자친구 네이선을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혼자서 여행하며 나는 툭하면 외로워지곤 했다. 그런 내게 마음 놓고 대화할 수 있는 상대를 만날 수 있다면 그곳이 어디든 갈 만한 가치가 있었다.
베를린에 머무는 이틀 째 저녁에 소현이 머무는 기숙사 근처에 있는 펍에서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검은색 바지와 하늘색 체크무늬가 어우러진 검정 니트를 입고 있었다. 인사를 나눴을 뿐인데 나는 단번에 그녀가 고등학교 시절 그녀와는 다른 사람이라고 느꼈다. 서로의 근황을 나누는 와중 그녀의 남자친구인 네이선이 펍으로 들어왔다. 프랑스에서 온 그는 검은색 바지 그리고 하늘색 셔츠와 재킷을 입었다. 단정하고 깔끔했다. 해맑게 웃으며 들어오는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우리는 서로를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웃으며 포옹했다. 나는 베를린에서 머무는 일주일 중 나흘을 그들과 보냈다. 나중에 세어보니 우리는 나흘 중 24시간을 대화에 쏟았다. 그들은 내 여행 이야기를 자신들의 이야기인 양 들어주었다. 나 또한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즐거웠다. 맥주와 네이선이 만든 바나나 케이크를 곁들인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대해 이야기했고 우리가 어떤 가치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지 나눴다. 이른 저녁에 시작한 대화는 새벽까지 멈출 줄 몰랐다. 그때 알았다. 대화는 정말 즐거운 일이었다. 그들과 대화하며 나는 잘 들을 줄 몰랐구나, 하고 생각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하거나 설득하는 데 열중하거나 이미 결론을 낸 상태로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었었다. 상대방이 누구인지와 이야기가 재미있는지는 그다음 문제다. 모 든 사람은 자기만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그 날밤 호스텔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앞으로는 마음을 열고 듣자고 다짐했다.
나는 라디오를 진행하고 싶다. 나는 다양한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을 즐긴다. 더불어 내가 즐기는 일을 하면서 돈을 번다는 건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이다. 나는 라디오가 잘 되려면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어떤 즐거운 경험도 불행한 경 험도 지나면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그런 이야기보따리가 많아야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베를린에서 시간을 보내며 나는 생각을 고쳐 먹었다. 라디오 진행자에게 가장 필요 로 하는 능력은 잘 들어주는 것이다. 듣는 능력은 나이 들어가며 자연스럽게 생기는 주름 같은 것이 아니다. 그림처럼 피아노처럼 운동처럼 시간을 가지고 노력해야 얻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살지 않은 20년 간의 관성을 종종 느낀다. 나는 여전히 새로운 상대를 만나면 나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내 얘기를 늘어놓고 집에 와서는 오늘도 바보 같았다 고 후회하곤 한다.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에는 매뉴얼이 없다. 모든 과정은 스스로 찾아야 하고 정답도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다. 시간도 오래 걸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로 여겨지는 것일까. 모든 고귀한 것은 힘들 뿐만 아니라 드물 다고 말했던 스피노자의 말이 떠오른다. 잘 드러나지 않아 타인에게 인정받기는 쉽지 않 을 것이고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간 스스로를 자주 발견하게 되리라. 그럼에도 자주 떠올 리고 노력하자.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