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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찬 Oct 20. 2023

순간의 선택이 어쩌면 평생을

단편 1

파리 여행이 끝이 났다. 더디 왔던 여행의 첫날과 달리 여행의 끝은 쏜 화살처럼 찾아왔다. 우리는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내렸다. 두 친구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일을 하기 때문에 우리는 공항에서 작별인사를 해야만 했다. 부활절 연휴도 끝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우리는 아쉬움을 삼키며 반년 뒤에 떠날 또 다른 여행을 기약했다. 일본과 싱가포르 그리고 작년에 갔던 한국을 가기로 했다. 그들은 어느새 공항을 빠져나가는 사람들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다시 짧은 비행을 한 뒤 뉘른베르크로 돌아왔다. 나만 한 캐리어 두 개를 현관 앞까지 끙끙대며 끌고 왔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왔지만 오르막길을 걸을 때마다 힘에 부쳐 얼굴이 화끈거렸다. 키가 더 컸다면 좋았을 텐데, 하고 생각했다. 낡은 열쇠를 돌려 문을 열었다. 일주일 넘게 비어 있던 집은 차가운 공기로 가득했다. 뉘른베르크 사람들은 4월 중순에도 코트를 벗지 않는다. 여독을 풀기도 전에 나는 다음 날부터 일상으로 돌아가야 했다. 곧바로 침대에 누웠다. 나를 살며시 누르는 두툼한 이불의 무게가 느껴졌다.

 이튿날, 나는 다를 바 없이 가볍게 씻고 큰 방 한 구석에 덩그러니 놓인 컴퓨터 책상 앞에 앉았다. 길었던 코로나19 시기가 끝이 난 듯했지만 우리 회사는 여전히 집에서 일을 하도록 했다. 오디오에 서로의 목소리가 겹쳐 들리는 일은 적응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 날만큼은 회사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참 기뻤다. 어떻게 하루가 지나는지 몰랐다. 시간은 4시. 점심으로 먹은 파스타가 벌써 소화된 기분이었다. 회사 단체 메시지 창 밑에 새로운 메시지가 와 있었다. 지난주에 알게 된 찬이라는 한국 사람이었다. 

 지난주 한국어 수업 중에 에스더가 알고이 지방에 살고 있는 그녀의 조카네에 한국 사람이 왔다고 말했다. 그녀는 그가 혼자 유럽을 여행하고 있는데 경비를 아끼려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가정을 찾아다니면서 일을 도와주는 대신 숙박과 식사를 제공받으며 여행을 계속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스위스 벨프에서 닭장을 고치고 집안일을 했고 독일 알고이에서 정원의 땅을 일구고 조카네의 통나무 집을 짓는 것을 도왔다고 했다. 그는 나보다 7살 어린 스물한 살이었다. 손 선생님과 나를 포함한 수강생들은 다들 놀랐다. 나는 그런 방식의 여행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는 사람 하나 없고 익숙하지 않은 곳을 무작정 다니는 일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 아닌가. 또 그는 나름의 방식으로 유럽 사람들과 어울리고 있었다. 작년 가을 한국에 갔을 때 한국인 친구를 사귀는 일이 쉽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니 아직 얼굴도 알지 못하는 그가 기특했다.

에스더는 그녀의 조카 부부가 그가 혹시 그녀의 집에서 잠시 머물 수 있을지 부탁했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그 젊은 동양인 친구와 함께 지내기엔 너무 늙었다고 우리에게 말했다. 연휴에 쉬고 싶은 눈치였다. 갑자기 그녀는 내가 그를 데리고 있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그나마 내가 가장 젊고 또래라는 이유였다. 또 작년에 한국에 가보지 않았냐고 거들었다. 뜬금없는 제안에 나는 망설였다. 고민하는 내 표정을 본 에스더는 그녀의 조카 부부가 그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았다.

“우리 조카가 다음 달에 출산을 앞두고 있어서 일할 수가 없으니까 그 친구를 집으로 초대한 거거든. 하여튼 그는 약속에 따라 하루에 4시간만 일하면 되었는데, 개의치 않고 9시간씩 일했다고 하더라니까. 왜 그랬냐고 하니까 글쎄 그 친구가 이렇게 말했대. “아마 두 사람이랑 아기가 평생 동안 살 집을 짓는 것은 나에게도 의미가 깊어요. 또 곧 태어날 아기를 후에 볼 생각을 하면 더 열심히 일하게 돼요. 걱정 마세요. 내가 기뻐서 하는 일이니까.” 어때, 나는 나쁘지 않은 친구 같아 보여.” 그녀가 나를 부추기듯 말했다. 

게다가 그는 조카 부부에게 한국 음식을 요리해서 대접했다고 한다. 나는 그가 어떤 사람인 지 궁금했다. 그리고 그의 여행에 도움을 줄 수 있다면 나도 기쁠 것 같았다. 생각해 보니 안될 건 없었다. 에스더는 내게 그의 이메일을 전해주었다. 그녀는 그가 파리에서 아이폰을 소매치기당하는 바람에 왓츠앱을 사용할 수 없다고 말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이런 여행을 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연락을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답장이 왔다. 그는 갖고 있던 여분의 아이폰으로 인터넷 심카드를 사서 인스타그램과 이메일을 볼 수 있다고 했다. 요즘 누가 이메일을 확인하는가. 우리는 인스타그램 계정을 주고받았다. 그는 부활절 연휴에 오고 싶어 했지만 나는 연휴 내내 파리에 있을 계획이었다. 아쉽게도 어찌할 수 없었다. 다음 날 그에게서 연휴가 끝나고 가도 되겠냐고 메시지가 왔다. 그는 연휴 동안 하이델베르크에서 지낼 계획이라고 했다. 나는 괜찮다고 답장을 보냈다.

 점심에 먹은 파스타가 뱃속에서 자취를 감췄다. 냉장고는 여행 전에 정리해 둔 까닭에 비어 있었다. 나는 그저 굶주린 배를 채우고 싶어 서랍장에서 돌이 되어버린 빵을 꺼냈다. 빵에 버터를 발라도 여전히 딱딱했다. 나는 잼 발린 돌을 우걱우걱 씹으며 허기를 달랬다. 찬에게서 다시 메시지가 왔다. 거의 다 온 것 같았다. 그는 어두워진 하늘과 갑자기 내린 비에 길을 잠시 잃은 듯했다. 똑같은 모습으로 늘어선 오래된 아파트들 사이에서 우리 집을 찾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창문을 열어 큰 길가 쪽을 쳐다보았다. 비에 젖은 야상을 덮어쓴 남자가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여기!” 내가 손을 들고 소리쳤다. 

“오케이, 안녕!” 그가 해맑은 표정으로 달려왔다. 

 나는 현관문을 열었다.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애써 웃고 있었다. 그는 키가 컸다. 나보다 20cm는 커 보였다. 비에 젖어 우스꽝스러운 그의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얼른 들어와. 나는 송드린이야, 써니라고 불러.” 내가 말했다. 

“나는 윤찬. 아마 발음이 어려울 거야. 그냥 찬이라고 불러줘.” 그가 말했다. 

그는 긴장한 기색이 없어 보였다. 

“차라도 마실래?” 초록 배낭을 열어 짐을 정리하는 그에게 내가 물었다. 

“응, 고마워. 안 그래도 엄청 추워.” 

그는 고개만 내 쪽으로 돌린 채 얼굴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춥다는 것을 표현하는 듯했다. 나는 알맞게 끓은 물을 녹차 티백이 담긴 두 컵에 부었다. 그가 부엌문 앞에서 컵을 달라는 손짓을 했다. 우리는 거실로 가 식탁에 앉았다. 나는 그에게 궁금한 게 많았다. 

“이렇게 초대해 줘서 너무 고마워, 써니. 알다시피 여행하면서 가장 스트레스받는 일이 ‘오늘은 어디서 잘까.’하고 고민하는 일인데, 덕분에 고민을 덜었어.” 내가 말을 채 시작하기도 전에 그가 말했다.

“아냐, 문제없어. 여행 얘기 좀 해줘. 어디가 제일 좋았어?” 그는 미간을 모아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려운 질문인데. 아무래도 알고이에서 지낼 때가 제일 좋았어. 혼자 여행하면 조금 외로워질 때가 있는데 나는 그게 제일 힘들었어. 소매치기당할 때보다도 더.” 그가 멋쩍은 듯 웃었다. “그런데 거기서 지내면서 문화나 인종이 달라도 같은 사람, 친구, 가족으로 받아들여주는 걸 느꼈을 때 가장 행복했어.” 그의 표정이 처음으로 진지했다.

우리는 한국 문화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그는 요즘 나오는 케이팝에 나보다도 관심 없어 보였다. 그는 집안 곳곳에 있는 한국 아이돌들의 굿즈들을 보며 신기해했다. 나는 조금 부끄러웠지만 굳이 티를 내지는 않았다. 그는 장식장에 진열된 해리포터 DVD들을 보면서 해리포터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할 얘기가 떨어지면 해리포터 얘기를 하면 되겠다 싶었다. 우리는 차를 꽤나 빨리 마셨다. 나는 소파를 잡아당겨 그에게 잠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얇은 이불 때문에 춥지는 않을까 걱정했지만 그는 만족한다는 듯 엄지를 치켜세웠다. 나는 또 다음 날 아침에 있을 미팅에 참여해야 했다. 나는 그에게 잘 자라고 인사를 건넸다. 나는 침대에 누워 틱톡 영상들을 넘겼다. 씻고 나온 그는 곧바로 곯아떨어진 듯했다. 집이 쥐 죽은 듯 조용했다.

 그는 우리 집에서 열흘을 보내고 베를린으로 떠났다. 그는 처음 우리 집에 왔던 모습 그대로 떠났다. 달라진 것은 더 길어진 머리카락뿐이었다. 눈을 반쯤 가리던 그의 머리카락이 눈을 덮었다. 그가 문을 닫고 집을 떠나자 그제야 지난 열흘 간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유럽여행을 오지 않았더라면, 그가 알고이에 사는 에스더의 조카부부네에 가지 않았더라면, 내가 한국어 수업을 듣지 않았더라면, 내가 에스더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와 만난 것이 조금은 신기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모든 게 좋았다고 오해하지 말기를 바란다. 오히려 그렇지 않았던 순간이 더 많았다. 매일 무엇을 먹을까 고민해야 했고 할 말이 떨어진 그 공기를 견디기 어려웠던 적도 있다. 그는 가끔 마트나 식당에서 본인이 비용을 치르겠다며 어쭙잖게 카드를 내밀곤 했다. 그의 마음은 이해됐지만 나는 왠지 모르게 그런 그가 짜증 나기도 했다. 아홉 번째 날에는 그가 얼른 떠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의 인연이 어쩌면 누군가가 정해 놓은 듯한 일이라고 느껴졌다. 나는 그가 떠나려고 현관 앞에 섰을 때, 그와 포옹을 하고 6개월 뒤 서울에서 만나자고 말했다. 그는 그만의 해맑은 웃음으로 화답했다. 나는 다시 내일부터 일상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안 그래도 넓은 집이 더 넓게 느껴졌다.

 6개월이란 시간은 길지만 짧다. 나는 파리를 함께했던 두 친구와 일본과 싱가포르를 여행했다. 두 친구는 독일로 돌아갔고 나는 일 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나는 독일로 돌아가기 사흘 전 그를 만났다. 종로 3가 6번 출구 앞에서 우리는 만나기로 했다. 그는 대학 수업을 마치고 온다고 했다. 한국 지하철역에는 계단이 너무 많다. 저 위로 보이는 6번 출구까지 족히 백 개가 넘는 계단이 있는 것 같았다. 날 발견한 그가 손을 흔들었다. 오랜만이었지만 그렇게 긴 시간은 아니었다. 그가 대단히 반갑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낯설지 않았다. 내가 익선동을 자주 와본 탓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나에게 간장게장을 소개해주고 싶다고 했지만 나는 날 것을 먹었다가 아프지 않을까 걱정이 들었다. 우리는 삼겹살 집으로 향했다.

 그는 그때와는 또 다른 사람 같았다. 뉘른베르크에서 빵에 버터를 바를 때 눈치를 보던 그가 능숙하게 고기를 불판에 구웠다. 자르지 않아 덥수룩하던 머리스타일도 차분해졌다. 그때에 비하면 패션도 깔끔한 편이었다. 나는 그에게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물었다.

“그동안 뭔가 많은 일이 있었어. 한국에 돌아오니까 돈이 없더라고. 그래서 돈을 벌어야 했는데, 이전처럼 레스토랑이나 프랜차이즈 카페 일을 하기는 싫었어. 재미가 없잖아. 무엇보다도 여행하는 기분을 잃고 싶지 않았는데 그래서 찾은 게 호스텔 일이야. 보통 외국인들이 명동으로 많이들 오잖아. 명동에서 호스텔 프런트 매니저로 일해. 한국인이 없어서 영어도 연습하고 좋아.” 그가 말했다.

“대학교 생활은 어때?” 내가 물었다.

“별 거 없어. 그래도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해서 좋아. 지난번에 동아리에서 여행을 다녀왔는데 영상 보여줄까?”

그는 그의 친구들과 찍은 영상을 보여줬다. 새벽에 계곡 앞에서 노는 영상이었다.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그가 일하는 카페로 향했다. 그는 그가 좋아하던 시인이 하는 카페라며 일할 수 있어서 기쁘다고 말했다. 그는 가끔은 지나치게 긍정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사람으로 가득한 지하철을 타고 경복궁역에 내렸다. 도쿄에서 경험한 것보다 더 끔찍했다. 그의 카페는 경복궁 돌담길 근처에 있었다. 카페테라스에는 억새, 올리브 나무, 좀작살나무가 있었고 그 주위로 이름 모를 꽃들이 가득했다. 문 옆에 작은 로즈메리 나무도 보였다. 그가 원목으로 된 큰 문을 열었다. 초록색으로 가득한 카페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계산대 앞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그는 그녀를 선배라고 부른다고 했다. 독일어에는 없는 표현이었다. 하지만 한국 드라마에 종종 등장하는 단어였다.

“난 같이 일하는 사람들을 선배라고 불러. 독일에서는 이름을 부르지? 근데 선배가 뭔 지 알지?”그가 웃으며 물었다. 

“응.” 나는 선배라는 말의 어감이 귀엽다고 생각했다. 웃음이 나왔다.

그는 음료를 주문하면서 책 하나를 사고는 내게 선물이라며 내밀었다. 두꺼운 하늘색 책이었다. 책을 펼치자 사진과 짧은 경구들이 적혀 있었다. 한국어 밑에 영어로 번역되어 있었다.

 “한국어 공부하기에 좋겠다!” 내가 말했다. 

 “그렇지, 아무래도. 그리고 일하다가 힘들 때 한 번씩 펼쳐 보기 좋아.”

우리는 크리스마스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유럽에서 크리스마스는 그 자체로 엄청난 행사다. 나는 아시아로 넘어오기 전인 8월 말에 크리스마스에 먹는 진저브레드를 먹곤 했다. 

 “우린 벌써 크리스마스를 준비한다니까.” 내가 말했다.

 “내 생각에 한국에서 크리스마스는 유럽만큼이나 큰 행사는 아닌 거 같아.” 그가 말했다.

 “뭐라고?”

 “물론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곤 하지만 보통 대도시에 집중된 거 같고 가족들이 모여서 집을 꾸미거나 하는 일은 아이가 어릴 때나 하곤 하지. 기독교를 믿는 사람이 가장 많을 텐데 문화적으로 다른 듯해. 이상하지.”

 “지난주에 추석이었지? 아마 추석이 그 역할을 하나 봐. ”

 “응, 추석 땐 온 가족이 모이곤 하니까. 저번에 뉘른베르크 크리스마스 마켓 얘기했잖아. 뉘른베르크 사람들은 그곳 가지 않는다고.”

 “응, 맞아. 우린 거기 안 가지. 이번 겨울에 유럽 온다고 했지? 넌 언제나 환영이야. 다음에 오면 진저브레드랑 글류 바인 만들어 먹자.”

 우리는 카페를 나가서 거리를 가로질러 갔다. 지하철 역에는 아까 보다 사람이 없어서 우리 모두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우리는 지하철 안에서 악수를 했다. 그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다시 만나면 된다는 눈길이었다. 물론 나도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헤드셋을 쓰고 지하철에서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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