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이지만 오늘은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우리가 가난한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독서노트의 1월 31일 기록되어 있던 에드워드 로이스의 [가난이 조종되고 있다]의 내용을 인용하면서 생각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저자는 미국의 사황에 대해서 설명하였지만 단지 미국만의 얘기가 아님을 독자는 알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의 개인주의 논리는...... 가난의 책임을 빈곤층 스스로의 결함 탓으로 돌리고 빈곤층의 경제적 곤경에 대해 개인적인 차원의 해결책을 도모하도록 부추긴다."
단지 우리가 가난한 이유가 그들 스스로 게으르고 노력하지 않은 개인의 탓으로 생각하기 쉽다. 나 또한 100%는 아니지만 가난한 개인 스스로의 책임으로 가난해졌다고 생각했었다. 단지 그들이 노력을 안 했기에 지금과 같은 상태에 있는 건 아닌지 생각했었다. 그러나 왜 그들이 가난해질 수밖에 없었는지 한번 생각도 안 하고 나의 고정관념이 생긴 게 부끄러웠다.
"사람들이 영위하는 삶이란, 단지 자신의 심리적 문화적 특성에 의해서만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기회와 자원에 대한 접근성이 얼마나 는냐에 따라서도 영향을 받는다"
그들만의 리그, 단지 그들이 스스로 기회를 만들어 내고 그 기회에 대한 접근성을 허락한다면 빈곤층은 그 리그에 결코 들어갈 수 없다. 기회와 자원에 대한 접근성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차단되어 있는 상황이다.
시간이 지나 어떤 노력을 하더라도 차단되어 있는 그들만의 리그에 절대로 들어갈 수 없는 상황에서 빈곤층은 시간이 지나도 빈공층으로 남지 않을까 생각한다.
"인적자본이 부족해서 가난해지는 것이 아니라, 가난해서 인적자본이 부족한 것이다"
필자의 인적자본의 측정량은 핸드폰에 저장된 인맥이 아닐까 싶다. 연락처의 인적자본이 턱없이 부족하다. 즉 필자는 가난하다. 인적자본을 풍부하게 해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고민해본다. 지금 내가 가난하기에 인적자본이 부족한 것이다.
왜? 앞에서 말했듯이 가난은 근본적으로 권력과 구조적 문제이다. 우리에게 경제권력, 정치권력, 문화권력이 부족하기에 가난하고, 그렇기에 인적자본도 부족한 것이다.
"저학력 노동자들이 노동시장에서 차별을 당하는 것은 그들이 기술력이 크게 떨어져서가 아니라 제도적 뒷받침과 협상력이 부재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필자가 일하는 회사의 직원의 학력은 고졸부터 다양하다. 학력이 다르다고 다른 일을 하지는 않는다. 어린 시절에는 가방끈이 긴 것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고, 나만이 뭔가 특별하게 할 수 있는 일들이 있을 줄 알았었다. 어린 시적의 여물지 않은 생각이 지금은 부끄럽다. 한 번씩 내가 하는 일은 굳이 고학력자가 아니라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저학력이라도 같을 일을 할 수 있지만 경제적으로 차별당하는 것을 본다. 학력에 비례한 급여가 +@가 아니라 고학력에서 마이너스 @ 로 회사에서 정해 놓은 급여 규정이 있다.
고학력이라고 협상력이 뛰어난 건 아니다, 그러나 저학력은 협상 자체를 할 수 없도록 구조적으로 만들어 놓았다.
우리가 가난과 빈곤을 개인적 문제로만 인식해온 나로서는 이 책이 나의 생각과 편견을 깨뜨려 주었다. 가난하기 때문에 더 가난해질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상 빈곤율을 더 줄어들 수 없다는 부정적인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