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은 2020년 9월 25일을 기점으로 바뀌었다. 부부와 아이들로만 구성된 나의 가족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결혼 32년 만에 처음으로 시댁에서 분가했다. 2022년 10월에는 셋째 아이까지 독립해 나가며 결혼 후 처음으로 우리 부부 둘만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꿈결인 듯 믿기지 않아 다시 확인하는 홀가분함이었고, 표현할 수 없는 감칠맛이었다. 시댁에서 살아온 세월 동안 친정 식구들은 우리 집에 놀러 와 본 적이 없다. 사돈어른과 사부인이 계셔서 조심스럽다는 게 그 이유였다. 친정 부모님은 막내딸네 집으로 나들이 한 번 제대로 못해보시고 돌아가셨다. 그러니 형제자매들이야 오죽했을까.
나는 1988년에 결혼하며 맏며느리라는 신분 하나가 추가되었다. 낯선 가족의 터전으로 옮겨 대가족의 일원으로 살게 된 것이다. 어머님은 여장부 기질을 갖고 계셨다. 주부보다는 교장 사모님으로서 앞에 나서길 더 좋아하셨다. 당연히 집안 살림 사는 일은 내 몫이었다. 시동생의 혼례 음식도 집에서 준비해 예식장으로 날랐다. 폐백닭도 어머님이 시키는 대로 내가 만들었다. 듣도 보도 못 했던 과정의 일이었다. 그 시기에 어머님께서 말씀하셨다.
“얘~, 둘째는 자존심을 세워줘야 하니 아파트를 사 줘야겠다.”
당시 우리 부부의 방은 시댁에서 가장 작은 방이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마음고생이 떠오른다. 본데없이 친정에서 잘못 배워왔다 할까 봐 무조건 순종하던 시절이었다. 어머님은 언제나 당신의 의지를 나를 통해 이루셨다. 시간이 흐를수록 보이지 않는 중압감과 스트레스로 숨이 막혔다. 시동생 한 명, 시누이 두 명과 함께 살고 있던 시댁에서 초짜 맏며느리의 혼란스러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엄청난 무게의 스트레스에 신경은 갈수록 예민해졌다. 남편은 좋은 남편이기 전에 이미 착한 아들로 자리매김 되어 있었기에 내 처지를 이해했지만 방어막이 되어 주지는 못했다.
철저하게 혼자였다. 삶의 찌꺼기가 마음속에 쌓였으나 어떻게 쏟아야 할지를 몰랐다. 건강검진에서 전에 없던 낭종이 간에서 발견되었다. 3.8cm 크기였다. 깜짝 놀라 좀 더 큰 병원에서 다시 검사를 했다. 의사가 피검사와 CT 촬영 결과를 알려주었다
“양성이어서 당장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지만, 아기 주먹만큼 커진다면 제거 수술이 필요해요.” 나는 놀라서 물었다.
“선생님, 저는 술을 많이 마시지도 않는데 왜 간에 낭종이 생겼을까요?” 의사 선생님은 빙그레 웃으셨다.
“과도한 스트레스로 갑자기 큰 낭종이 발견되는 경우가 있어요. 스트레스 받지 말고 사세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나는 며느리, 아내, 엄마, 주부, 직장인으로 종종거려야 했고, 퇴근 시간이 되면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살이 빠지고, 웃음이 없어지고, 눈동자는 빛나지 않았다. 낭종도 스트레스를 먹고 자라는지 계속 커졌다. 어느 날 아이들을 바라보는데 불현듯 한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행복하지 않으면 아이들도 행복하지 않을 텐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변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내 안의 나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걸었다. 마음이 답답하면 목적지 없이 그저 걸었다. 비가 오면 우산을 쓰고, 눈이 오면 모자를 챙겨 들고 길 위에 섰다. 걷고 들어오면 숨이 쉬어졌다. 고개를 숙인 채 신세 한탄을 하던 걸음걸이는 점점 바로 세워졌다. 새 바람으로 마음이 채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즈음이었다. 어머님의 변화가 감지된 것이. 쉬는 날이면 산으로 향하는 며느리가 마땅치 않으셨나 보았다. 휴일 전날이면 자연스럽게 그다음 날 해야 할 일거리를 툭 던지셨다.
“아유~, 저 먼지 좀 봐라. 전등갓을 닦아야 되겠지?”
“주방 바닥이 기름때 범벅이네. 내일은 마침 쉬는 날이니 트리오를 칠해서 바닥 좀 닦아 놔라.”
몇 번 휴일을 잃어버리고 난 후, 나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구체적으로 들었다. 휴일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밤이 늦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머님의 숙제를 해치웠다. 그리곤 쉬는 날 아침이면 설거지를 끝낸 후 말씀 드렸다.
“어머니, 삼악산 좀 다녀올게요.”
산길을 걷다 보면 심정이 복잡했다. 설움과 섭섭함이 몰려와 울컥해지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걷기를 얼마나 했을까, 숨 조절이 힘들 만큼 숨이 턱에 차면 무념무상의 상태가 되었다. 어쩜 러너들이 표현하는 ‘러너스 하이’와 같은 느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 생각 없이 걷다가 제정신이 돌아오면 이미 산 정상이었다. 그제야 숨이 제대로 쉬어졌고 생각이 들어왔다. 토하듯 긴 숨을 내쉬고 나면 ‘또 한 주는 살아낼 수 있겠구나.’ 싶었다. ‘살다.’와 ‘살아낸다.’는 다른 의미이다. 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산이 없었다면, 걸으러 나가지 않았다면 과연 내가 온전한 삶을 살 수 있었을까. 다시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답답하다.
다행히 나는 사는 방법을 찾았다. 산의 품에서 걸을 수 있다면 앞으로의 삶도 거리낄 것이 없다. 그 자신감으로 어느 날 당당하고 분명하게 남편과 아이들에게 선언했다.
“앞으로는 나의 삶을 살 거야. 맏며느리로서의 기본적인 역할은 하겠지만 필요 이상의 노력까진 하지 않을 테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