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때는 내가 참 당차하는 생각을 한다. 젊은 시절, 안정된 직장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다시 공부를 시작한 때도 그러했다. ‘사서’가 되어 도서관에서 근무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기에 용기를 냈다. 보장된 것은 아무 것도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도서관 문턱을 넘어 들어서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만 33년을 근무했다. 사서직 공무원으로서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지만 오랜 시간 행복했다. 언제나 사서라는 자긍심이 나의 버팀목이었다. 정년이 되어 퇴직을 하며 앞으로는 느린 삶을 살아야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하며 도서관을 나왔다.
삶에는 다 때가 있는 것 같다. 나의 경우는 2020년도가 그렇다. 이때를 기점으로 인생 2막이 열렸다고 여긴다. 그해 6월 말에 정년퇴직을 했고, 9월에 시댁에서 분가를 했다. 30년이 넘도록 시부모님께 종속된 삶을 살다가 나이 육십을 넘기고 비로소 독립을 한 것이다. 복잡한 매듭이 하나하나 자연스레 풀어졌고, 지금까지와 다른 삶이 시작되었다. 남녀의 역할이 따로 없는 젊은이들은 납득하지 못할 나의 삶, 그 삶에 마침표가 찍힌 것이다. 설화 <아기장수 우투리>처럼 어딘가에 숨어 있던 보이지 않는 날개가 돋아나와 내 자유분방함을 부추겼다. 미래에 대한 기대로 가슴이 뛰었다.
마음속에 품고 있던 지리산 종주를 실행에 옮겼다. 용산역에서 언니를, 남원역에서는 형님을 만나 지리산 아래 백무동으로 이동했다. 김 대장은 이미 예약한 민박집에 도착해 있었다. 현지인도 외지인도 보이지 않는 빈 마을엔 계곡 물소리만 그득했다. 산 속 대피소가 예약이 안 돼 택시로 이동하며 지리산을 종주할 계획이었다.
1일차 계획은 성삼재에서 벽소령까지 걸은 후 음정마을로 하산하는 것이었고, 2일차는 다시 음정에서 벽소령으로 원점 회귀한 후 세석, 장터목을 거쳐 천왕봉에 서는 것이었다. 대장이 세운 우리의 계획은 흠잡을 곳이 없었다. 그러나 날씨가 심술을 부리며 비를 뿌려댔다.
세상살이는 예측할 수 없는 다양함이 숨어 있다. 지리산을 걷는 걸음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시작부터 오르막이 인내력 시험을 하더니, 땀인지 빗물인지 모를 그것이 온몸을 타고 돌며 나를 희롱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발걸음은 가벼웠다. 임걸령 샘물은 감로수 같은 물맛으로 생기를 주었고, 야생화 천국인 산길은 미소를 머금게 했다. 말이 통하는 동무들과 함께 걷는 시간이 소중했다. 큰 산속에서 종주 팀은 달랑 우리 네 명뿐인 듯 다른 등산객을 만날 수 없었다. 산의 적막과 추적이는 비와 묵묵히 걷는 네 사람이 묘하게 어울렸다. 산이 우리고 우리가 산이었다. 비록 우중 산행이라 발아래 구름을 두고 걷거나 엄청난 조망을 기대할 수는 없었지만 촉촉하고 부드러운 감성이 마음을 지배했다. 어둠이 몰려오기 전에 하산하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 걸음은 벽소령 대피소까지 이어지며 1일차가 마무리되었다.
“하람, 오늘 날씨 굿이야.”
이른 아침, 민박집에서 밖을 내다보던 언니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날씨가 좋다니 마음이 가벼웠다. 걷던 길을 계속 이어가기 위해 하산했던 장소까지 택시로 이동했다. 내려왔던 음정에서 벽소령 대피소까지 6.7km 너덜 길을 다시 올라가려니 맥이 풀렸다. 대피소에서 잤더라면 안 걸어도 될 왕복 13.4km는 체력을 축나게 했다.
벽소령대피소에서 천왕봉으로 향하는 길에는 각양각색의 야생화가 널려있었다. 호흡을 가다듬고, 야생화 구경도 좀 하고, 구름의 움직임도 바라보느라 우리의 걸음은 계속 지체되었다. 마음이 급한 건 대장 한 사람뿐이었다. 장터목대피소를 지나 천왕봉을 오르다 정상을 눈앞에 두고 걸음을 멈추었다. 안전한 하산을 위한 대장의 판단이었다. 내리막의 바윗길은 전날 내린 비로 미끄러웠다. 왜 대장이 하산을 걱정했는지, 위험의 강도가 어느 정도인지 비로소 실감되었다. 산속에서는 어둠이 빠르게 몰려왔다. 등산은 목표보다 과정이라고 스스로 위로하며 하산했다.
그러나 완등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한 달여가 지나 다시 멈췄던 지점에 섰다. 종주의 미완성을 알게 된 ‘삼천포’와 ‘부산’의 길동무들과 함께였다. 출발지로 잡은 중산리까지는 ‘양산’의 친구가 운전기사를 자처했다. 천왕봉 등정 포기를 결정했던 장터목대피소에 이르니 감회가 새로웠다. 심호흡을 크게 하며 산의 기운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마침내 천왕봉에 섰다. 지리산 종주의 마침표가 찍히던 순간 가슴이 벅찼다. 크게 마음껏 웃었다. 산 위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을 내가 좋아하는 동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감사했다.
이렇듯 망설임 없이 걸을 수 있음은 세월의 힘이다. 나이 예순을 넘기니 쉰의 나이에 보던 길과 다른 길이 보인다. 그런 만큼 걷기에 진심을 담는다. 날개가 달린 듯 마음까지 홀가분해 발걸음도 가볍다. 서두르지 말고 꾸준히 산길 위에서 행복을 만나야겠다. 60대는 걷기에 딱 좋은 나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