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결혼생활을 돌아보았다. 받은 것보다 잃은 것이 더 크게 부각된다더니 나도 그런 걸까? 왜 이리 마음에 맺힌 게 많은지 모르겠다. 갓 결혼한 손아랫동서의 전화를 받던 어머님을 본 이후 나는 꼬리를 내리고 살았다. 전화를 끊은 어머님의 백지장처럼 하얘진 얼굴과 새파래진 입술 그리고 벌벌 떨며 분해하시던 모습에 너무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둘째 며느리가 항의할 만큼 어머님이 실언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며느리의 항변을 용납하지 못한 사건이었다.
이제는 나도 나이가 들어서인지 감정의 찌꺼기를 털어내고 싶다. 주저리주저리 글을 썼다. 그리곤 친하게 지내는 선배에게 몇 꼭지를 보여주었다.
“너, 뒷감당할 자신 있니?”
당황스러웠다. 나름 깨어있다고 생각했던 선배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내가 천기누설을 했나 싶었다. 그러나 아직도 옛날 생각에 꽂히면 가슴이 벌렁거려 잠들지 못하는 나 자신을 위해서 털어야겠다는 생각이 더 굳어졌다. 이 나이에 뒷감당을 못하면 누가 어쩔 건데 하는 배짱은 세월의 힘이었다.
큰딸 첫돌 때 반지 선물이 꽤 들어왔고, 그것은 아이 몫이라 당연히 한 곳에 모아두었는데 어느 날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금은 살 때는 비싸지만 팔 때는 제 값을 받지 못해. 그러니 애 반지 다섯 개만 줘라 내가 살 테니. 그걸로 서울 애 아기 돌 팔찌를 해줘야겠다.”
서울 애는 둘째 시누이를 말함이었다. ‘어머님은 우리 애 돌엔 아무것도 안 해주셨으면서...’ 몹시 서운했다. 그리고 아직까지 금값을 받은 기억이 없다.
나는 딸 둘에 아들 한 명을 두었다. 내가 사회생활을 하는 까닭에 위의 두 딸은 시부모님께서 돌봐주셨다. 문제는 셋째였다. 육아를 걱정하는 내게 친정 언니는 말했다. “만약 손자가 태어난다면 분명히 네 시어머니께서 키우겠다 하겠지 설마 남에게 맡기라 하겠니.” 그러나 어머님은 당신은 못 키우고 남에게도 맡길 수 없다 하셨다. 그러면서 꼭 집안사람에게 맡겨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어쩔 수 없이 친정 언니가 아기를 돌보았다. 어린이집을 다니게 되면서 더 이상 언니가 셋째를 돌보지 않았지만 아이는 늘 이모네를 가고 싶어 했다.
“어머니, 얘가 이모 집에 놀러 가고 싶어 하는데 좀 보낼게요.”
“너 참 이상하다. 걔가 '정가'지 '김가'냐? 왜 애를 자꾸 이모네로 보내.”
어머니는 큰 소리로 화를 버럭 내셨고, 나는 너무 놀라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어머님은 늘 체면치레를 하셨고, 나는 어머님의 자존심을 세워드리는 중요한 도구였다. 시댁의 제사가 돌아오면 어머니는 퇴근한 큰아들 내외와 세 명의 어린 손주들까지 모두 거느리고 시골의 큰댁으로 가셨다. 밤 12시 가까이 되어 제사가 끝나면 아이들은 모두 잠들어 있었고, 큰집 식구들은 낼 출근할 사람은 지금 가도 늦는다며 등을 떠밀었다. 그러나 어머님은 내가 설거지까지 모두 마쳐야 일어나셨다. 피곤에 빠져 허우적대던 시절이었다.
나는 결혼한 이후 바로 주부가 되었다. 어머님이 살림에서 손을 놓으셨기 때문이다. 갈수록 피곤이 누적되었다. 어쩌다 평소보다 늦게 일어나는 날은 어머니께서 어김없이 우리 방으로 전화를 하셨다. “얘, 지금 몇 신데 아직도 자니?” 놀라서 나오면 어머님은 편안한 얼굴로 화초의 잎사귀를 닦고 계셨다. ‘어휴~, 밥이라도 좀 안쳐주시지.’ 경황없이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설거지를 끝내고 세 아이들을 챙긴 후 출근을 하면 거의 넋이 나간 듯했다. 삶이 점점 초라해졌다.
신호 대기 중이던 내 차를 뒤차가 들이박는 사고가 있었다. 한동안 병원에 입원할 만큼 큰 사고였다. 많은 사람들의 걱정이 이어졌지만 아픈 건 뒷전이었다. 마음껏 잠자고 쉴 수 있는 게 좋아 퇴원이 아쉬웠다. 그만큼 삶이 피폐해져 있었다.
세월이 흘렀지만 생활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전류가 흐르듯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교통사고로 다시 병원에 입원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기 때문이었다. 노예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정부라면 월급이라도 받을 텐데 난 돈도 벌고 그 돈으로 살림까지 살고 있지 않는가.
우리 부부가 처음으로 아파트를 분양받고 입주했을 때의 일이다. 안방은 당연히 시부모님께 드리고 우리는 현관에서 가까운 작은 방을 사용했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자력으로 마련하려니 돈이 여유롭지 않았다. 블라인드처럼 소소한 것은 천천히 하자고 남편과 얘기했다. 어느 날 퇴근해 보니 베란다에는 블라인드가, 우리 방에는 커튼이 설치돼 있었다. 어머니의 선물이라는데 뜨악했다. 튀는 색깔의 블라인드와 꽃무늬 커튼은 전혀 내 취향이 아니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맘에 드는 걸 알아서 맞추면 계산은 내가 하마.'라고 말씀해 주셨다면 얼마나 감사했을까. 막내 시누이 남편과 친한 사람에게 했다는 풍문을 듣고 입을 닫아버렸다.
세월이 흐르며 크고 작은 상처들은 계속 생겨났다. 서로 자기 생활에 치여 만나지 못했던 친구를 오랜만에 만났을 때였다. 이 친구는 연로한 시아버님을 모시고 사는 소꿉동무였다. 아버님이 매달 반찬값에 보태라고 20만 원을 준다고 했다. 금액의 문제가 아니라 반찬값이란 명목으로 돈을 받는다는 것에 깜짝 놀랐다. 그 당시 우리 아버님은 교장 선생님이었는데도 모든 생활비는 전적으로 내 몫이었다.
시부모님은 다른 자식들의 대소사는 잘 챙기면서 우리에겐 항상 인색하셨다. 섭섭함이 쌓이는 것에 비례해 내 마음의 문은 그만큼씩 닫혀갔다. 혹자는 ‘아이를 둘이나 키워줬는데 어떻게 그런 마음을 먹어?’라고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분가한 후 남편에게 말했다.
“시부모님이 아이 둘을 키워주신 게 감사해서 늘 최선을 다했던 거 당신 알지? 섭섭한 일이 생겨도 아무 소리 안 한 채 참고 넘어갔던 것도 다 기억하지? 이제부턴 달라질 거야. 아이들 양육에 대한 감사함은 30년이 넘도록 봉양한 것으로 시효가 끝났어. 그러나 맏며느리의 역할은 할 테니 걱정하지 마요.”
나는 현재 시부모님과 따로 살고 있다. 명절과 두 분 생신날은 우리 집으로 모시고, 내가 시부모님 댁에 가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남편은 일주일에 두세 번씩 들리면서 때로는 자고 온다. 난 그때마다 반찬을 챙겨 보낸다. 누군가는 ‘이렇게 공개적으로 누워서 침 뱉기를 해도 되느냐’고 할지 모르겠다. 그럼 나는 또렷한 목소리로 당당하게 말할 것이다.
“나처럼 살아봤어요? 노예 같은 기분으로 30년이 넘도록 시집살이해 봤어요? 이제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대나무밭에 들어가 소리치고 싶어요. 그래야 막혀 있는 내 속이 뚫릴 것 같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