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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람 Oct 18. 2023

문학 작품 속 그곳에 가고 싶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읽기를 끝낸 후의 여운이 주는 짜릿함을. 그러나 대하소설 읽기는 책 읽는 호흡이 길지 않은 사람에겐 만만치 않은 작업이다. 박경리 선생의 『토지』나 조정래 선생의 『태백산맥』이 그런 류의 책이다. 이 책들을 뜻 맞는 사람들과 일주일에 한 권씩 읽고 토론했다. 그리고 완독의 뿌듯함으로 길 위에 서 있었음이 행복하고 풍요로웠다.     


장장 다섯 달에 걸쳐 읽은 『토지(전 20권)』는 작가의 26년에 걸친 집필 기간과 700여 명의 등장인물로 내용이 방대하다. 그런 만큼 상당히 의미 있는 길 떠남이었다. 작가의 고향으로 곳곳에 선생의 흔적이 남아 있는 통영과 토지를 문학마을로 풀어놓은 하동, 그리고 선생이 다녔던 진주여고를 들렀다가 작품 속에서 ‘쪼깐이’가 팔았던 진주비빔밥을 먹고 돌아오는 2박 3일의 여정이었다.

통영에는 그곳만의 문화가 있는 ‘토영이야~길’이 조성되어 있다. 1구간에서는 김춘수 시인의 생가와 시비도, 박경리 선생이 살았던 집도 만날 수 있다. 비석도 상석도 세우지 말라 했던 박경리 선생의 흔적을 더듬다 보면 김상옥, 백석, 정지용, 김용익, 유지환, 윤이상 등 예상치 못했던 문인과 예술인도 만나게 된다. 이들이 통영의 색깔을 만들었다면 세병관과 동·서·남포루는 살아있는 역사라 할 수 있다. ‘이야’는 언니를 의미하는 토속어지만, 넓게는 친한 사람을 지칭한단다. 그러니 토영 이야~길은 친한 사람끼리 도란도란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며 걷는 길이라 하겠다.

박경리문학관에는 선생께서 생전에 쓰시던 반닫이가 전시되어 있었다. 반닫이는 통영, 원주, 하동 이 세 지역에 있는 박경리문학관에서 일정 기간씩 순회 전시를 한다고 했다. 마침 내가 방문했을 땐 통영에서 전시 중이었다. 혹여 어느 지역에서든 박경리문학관을 방문할 일이 있으면 선생이 사용하던 반닫이가 전시돼 있는지 확인해 보는 것도 좋겠다.      


하동에는 ‘박경리의 토지길’이 있다. 이곳은 토지가 탄생된 배경지이기 때문인지 대하드라마 '토지'의 세트장도 마련되어 있다. 박경리의 토지길 1코스는 작품 토지를 느끼기에 모자람이 없다, 평사리 들판의 가없음으로 작품 속 최참판댁의 논이 얼마나 넓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고, 소화의 집이나 김범우 집도 들여다볼 수 있다. 작품 속으로 빠져드는 재미를 맛보는 길인 것이다. 우리는 숙소를 최참판댁 한옥체험장의 ‘김평산 집’으로 정해놓고 쌍계사까지 어슬렁거리며 올라갔다. 이 절에서는 매일 저녁 6시면 법고식이 열린다. 이 길 위에 서 있는 뚜벅이라면 놓치지 말 일이다. 불교문화를 쉽게 접할 수 없는 이에겐 특별한 눈요기이며 문화 체험이 될 것이다.

비빔밥은 전주비빔밥만 알던 내가 토지로 인해 진주비빔밥을 알게 되었다. 석쇠불고기와 함께 먹는 진주비빔밥은 작품 속에서 쪼깐이가 팔았던 그 비빔밥과 다름이 없었다.    

    

『태백산맥』은 한국전쟁과 빨치산 이야기로 민중의 끈질긴 생명을 보여주는 책이다. 이 책 역시 여럿이 읽고 생각을 나누며 완독 했다. 그 후 그때의 시대상을 느끼고 싶어 떠난 걸음이었다.

태백산맥문학관은 벌교 시외버스터미널 바로 뒤쪽에 있다. 작품 속에 나오는 현부잣집의 바로 옆이다. 그러나 눈 밝은 사람이 아니라면 진입로를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나처럼 길눈이 어두운 사람은 지나치기 일쑤일 터이니 말이다. 16,000여 매 분량의 태백산맥 육필 원고를 산처럼 쌓아놓은 이 건물은 북향으로 앉아 있다. 언뜻 이해되지 않던 건축물의 방향은 ‘분단의 아픔을 담기 위해 산자락을 잘라내고 북향으로 지었다’는 설명으로 해소되었다. 그러나 놓치면 안 되는 것이 또 있다. 문학관의 2층이 기둥 없이 매달려 있는 것이다. ‘우리가 모르던 역사를 매 보자’는 의미로 매달아 놓았다는데 소설이 관통하는 시대정신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대치, 천점바구, 솥뚜껑 같은 민초들은 사상이나 이념이 무엇인지 알 턱이 없었을 것이다. 단지 그들은 공평하게 사는 나라, 자식들 배 곯리지 않을 만큼 거두는 나라를 꿈꾸며 빨갱이가 되어 벌교를 떠났을 뿐이리라.       

보성여관은 작품 속에서 토벌대장 임만수와 그 일행들이 머물던 남도여관의 현실 판이다. 우리는 이곳에 여장을 풀고, 밤늦도록 작품 속의 외서댁이 되었다가 들몰댁이 되기도, 이지숙과, 김미선이 되기도 했다. 해방 이후부터 한국전쟁까지의 시대적 상황을 기억하는 근현대 삶의 현장이며 역사적으로 중요한 기억의 장소, 소설과 현실이 공존하는 공간이니 더욱 감회가 깊은 곳이다.     


벌교는 여순사건 이후 한국전쟁 휴전 협정이 선포될 때까지의 격동기를 다룬 이 작품의 주요 배경지이다. 곳곳에 ‘소설 태백산맥 문학기행길’ 안내판이 있어 길 찾기가 쉽다. 게다가 내게는 벌교가 잊을 수 없는 고장이 되었다. 저녁을 먹는 식당에서 일행들이 보여준 ‘정’ 때문이었다. 곧 공직에서 떠나게 될 나를 위해 특별한 만찬을 준비해 주었는데 내가 어찌 벌교와 그들을 잊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선암사에서 1박을 하고 조계산으로 들어가 송광사를 향해 걸었다. 선암사는 저자 조정래 선생의 아버지께서 스님으로 계시던 절인 동시에 저자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조계산 너덜길은 매우 가팔랐지만 모두 묵묵히 걸었다. 작품 속의 빨치산도 우리처럼 말없이 걸었을 것이다. 차이라면 우리는 힘이 들어 말을 할 수 없었던 것이고, 그들은 절박함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들의 고단했던 삶을 느끼며 작품 속 인물들을 코스프레했다. 김범준은 우리의 버팀목 김종국 샘이 맡았고, 외서댁은 황보 샘, 이지숙은 진숙 샘, 하대치는 성격이 쾌활한 선애 샘을 여자 하대치로 변신시켰다. 김미선은 정운 샘, 그리고 나는 들몰댁이 되었다. 걷다가 지쳐 숨을 몰아쉬면 여자 하대치가 나서서 진짜 하대치 마냥 나무 등걸을 들어 올리는 시늉으로 우리를 웃게 만들었다.

이곳에서는 산속에 있는 보리밥집을 놓치면 섭섭하다. 걷다가 지칠 때 즈음 나타나는 이 집에서 밥상을 받으면 수라상이 부럽지 않다. 보리밥에 곁들여 동동주 한 잔을 들이켜면 기분은 구름 따라 떠다니고, 몸은 새털처럼 가벼워져 행복의 크기를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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