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 부서지는 아침, 길동무와 섬진강가 아름다운 길을 지나 쌍계사 아랫마을에서 재첩국으로 ‘아점’을 했다. 지리산 품에서 차(茶)를 만드는 길동무의 선배 집을 방문하기 위해 들어선 길이었다. 담백한 삶을 사는 귀촌 부부. 이 부부는 사전 예약제로 딱 소요량만큼만 차를 만드는 향기로운 내외였다.
"올해는 녹차 40 통과 약간의 발효차만 만들어 이미 판매를 끝냈어요. 녹차 맛을 보여주지 못해 어쩌지."
선배는 70% 발효차를 대접하며 햇 녹차를 맛 보이지 못함을 미안해했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예술가적인 기질로 섬세한 손끝을 갖고 있는 선배였다. 꿈꾸듯이 살아가는 배짱이 멋져서 닮고 싶다는 바람이 마음을 흔들었다. 그러나 절대로 나는 흉내 내지 못할 삶이었다. 마음 그릇에 담긴 내공의 깊이가 나와 달랐다. 웃음이 온화한 그의 아내는 야물어 보였다. 자기 철학이 뚜렷한 사람은 아름답다.
나는 세속적인 사람이다. 걷는 걸 즐기고 사람을 좋아한다. 말이 통하는 사람이 나의 길동무가 되면 흐뭇하다. 남편과 걸을 때도 그렇다. 도반과 함께 걷는 인생길 같아 여유가 생긴다. 정선군의 화절령 운탄길과 하늘길은 남편과 함께 한 트레킹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차가 갈 수 있는 가장 높은 곳 들머리인 만항재(1,330m)에서 시작해 하이원 리조트 주차장까지 여섯 시간을 걸었다. 돌아오는 길엔 '곤드레 산나물 축제장'에서 어릴 적 먹었던 풀빵과 제대로 만든 수수부꾸미를 사 먹으며 장 구경까지 마쳤다. 주말 하루를 제대로 즐긴 셈이다.
정선의 운탄길은 석탄 산업이 활발하던 때 석탄 운반을 위해 만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몇 군데만 그 흔적이 남아 운탄고도라고 불린다. 꽃이 꺾여 있는 재 화절령은 주변 경치가 지루하지 않아 걷기 좋았고, 하늘마중길은 트래킹 코스로 최적이었다. 당초 계획은 백운산 정상을 지나 더 넓게 한 바퀴 도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시간 계산이 잘못됐음을 뒤늦게 알아챘다. 마운틴 탑에서 계산한 완주 시간이 저녁을 훨씬 넘기는 시간대로 나왔기 때문이다. 때론 나이가 사람을 현명하게 만든다. 무리하지 않기로 했다. 아쉬움과 미련이 더 전진하라고 옷깃을 잡아끌었지만 마운틴 탑에 최종 발자국을 남기고 나머지 코스는 다음을 기약했다.
하늘길에선 다양한 야생화를 만났다. 고산지대답게 높이에 따라 다른 야생화가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이번 걸음에서는 얼레지 꽃의 고고함이 신선한 충격이었다. 서양 꽃의 세련미에 결코 뒤지지 않으면서 우아하기까지 한 얼레지가 토종 야생화의 자존심을 지키며 자리를 잡고 있었다. 우리 꽃의 재발견에 웃음을 날렸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가치에 취했다.
예전의 정선군 고한읍은 돈이 흔하게 돌던 곳이었다. 그러나 석탄 산업이 사양길로 접어들면서 마을도 쇠락해 갔다. 사람들이 떠났고 빈집은 대책 없이 늘어만 갔다. 죽어가는 마을이 된 것이다. 그러나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 고한 18리 주민들이 뭉쳐서 마을을 하나의 호텔로 만들고 ‘마을호텔 18번가’라고 이름을 붙였다. 옛 건물은 스토리텔링이란 옷을 입혔고 리모델링을 했다. 민박집이 호텔 객실로 바뀌고, 중국집은 호텔의 중식당으로 탈바꿈했다. 작은 상점 하나하나가 용도에 맞게 호텔의 부속시설이 되자 사람들이 다시 모여들기 시작했다. 탄광촌의 광부가 아닌 다른 지역에서 온 여행자들이었다. 우리도 흥미로운 이곳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정선 5일장은 콧등치기국수가 유명하다. 이 국수는 메밀가루로 만든 국수를 먹을 때 국수가닥을 입으로 호로록 빨아들이면 국수의 끄트머리가 콧등을 치고 입안으로 들어간다 해서 콧등치기국수라 불렀다. 나 어릴 적 엄마는 김치만 있으면 다른 반찬이 필요 없는 이 국수를 참 자주 해 주셨다. 그리웠다. 엄마의 체취도, 손길도, 목소리도 되새기고 싶었다. 그러나 이내 풀이 죽어버렸다. 너무 많은 세월이 흘렀음을 간과했던 것이다. 국수는 맛났으나 예전 엄마의 국수 맛은 아니었다. 세월의 흐름 탓이라 스스로 위로하며 아쉬움을 털다 보니 어느새 예미읍이었다. 이곳에서는 귀신이 나온다는 독특한 터널을 통과했다. 작은 등 하나 없이 깜깜한 터널은 좁고 무서웠지만 혼자가 아니라는 것이 의지가 되었다. 멀리 보이는 흰 점을 향해 빠르게 나아갔다. 긴 터널의 끝이 하얗게 점으로 보였다. 무섭기도 했으나 동심을 일깨웠다. 터널을 빠져나온 후 안도감에 깔깔거리며 눈물이 나오도록 실컷 웃었다.
길은 엄마의 마음 같다. 삶의 소리가 들린다. 어디라고 길이 없을까만 이렇듯 시골길을 걸을 때는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장날만 기다리던 나는 엄마가 사준 아이스케끼를 아껴 먹느라고 녹은 부분의 얼음물만 혀로 핥았었다. 설날에 엄마가 엿을 고면, 싸릿가지에 되직한 조청을 둥글게 말아 아궁이 앞에 앉아 구워 먹던 기억도 떠오른다. 엄마가 직접 만들어주던 순대는 또 얼마나 맛났던가. 사람들은 내가 곱창을 먹을 줄 모른다 하면 어이없어한다. 어떻게 그 고급스러운 맛을 먹을 줄 모르냐면서. 그런 내가 순대는 없어서 못 먹는다. 어릴 때 먹던 엄마 맛이 그립기 때문이다. 지금도 가끔 엄마 생각이 나면 천안의 병천 순대로 엄마 허기를 달랜다. 가로등 흐릿한 신작로를 엄마 손잡고 걷던 그때 그 시절이 그립다. 내 속도에 맞춰 느릿느릿 걷던 우리 엄마의 마음을 닮고 싶다. 세상도 그렇게 어슬렁거리며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