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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람 Oct 18. 2023

좀 걸어본 사람이 놀기도 잘한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은 못 노나니 / 화무는 십일홍이요 달도 차면 기우나니라

얼씨구절씨구 차차차 지화자 좋구나 차차차 / 화란춘성 만화방창 아니 노지는 못하리라 차차차’


이 노랫가락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던 어린 시절, 저 노래가 뭔 소리지? 했다. 역설적이게도 아버지는 일 하실 때마다 이 노래를 흥얼거리셨다. 나는 내 나이가 그때의 아버지만큼 되어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꽃이 열흘 동안 붉게 피어 있는 경우는 없고, 달도 때가 되면 기운다. 즉 권력도 영원하지 않고 언젠가는 무너진다. 꽃들이 만발해 봄이 무르익고, 만물은 쑥쑥 자라 변해 가니 (어서) 놀아라’ 이런 말 아닌가. 내 방식대로 해석한다면 ‘영원한 젊음은 없으니 나이 들어 후회하지 말고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인생을 즐겨라’이다      


나는 살기 위해 걷기를 시작한 만큼 즐길 거리도 걷기를 으뜸으로 친다. 교외든 도심이든 가리지 않는다. 어떤 마음과 자세로 걷느냐가 핵심이다. 보이는 것이 재미있어 걸음이 느려질 때의 걷기는 성공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걷는 것은 아니다. 가까운 곳은 운동을 겸한 걸음이고, 먼 곳은 여행을 위한 걸음이다.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 넓어진 이후에는 잘 노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노는 것, 즉 놀이는 여럿이 모여 즐거운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이다. 나와 같은 생각의 사람들이 모여 시간을 공유한다면 이보다 더 즐거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일기예보는 밤새 폭설이 내릴 거라 했지만 우린 이미 시간을 비워둔 상태였다. 아니, 눈 내리기 전에 모여 벌써 한바탕 웃음잔치를 벌이는 중이었다.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계산하지 않고 모여 웃을 수 있음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어서 놀이 문화에 탁월한 감각이 있기도 했다.

다른 음역대의 색소폰이 협연을 할 때는 모두 한마음이 되어 감상했고, 눈 내리는 호반에 ‘안토니오 마린 몬테로’ 기타의 선율이 눈처럼 날릴 땐 숨을 죽이고 있었다. 때를 같이 해 ‘백석의 흰 당나귀는 백석과 나타샤를 태우고 눈이 푹푹 쌓이는 밤 깊은 산골로 떠나갔다’ 모두가 환호했다. 어쩜 이리도 연주를 잘하고, 낭송을 맛깔스럽게 하며, 그윽하게 노래할 수 있을까. 이런 재주가 없는 나는 그저 웃고 즐기는 것을 엄청난 재주인 양 선보였다.

항상 느끼지만 클라이맥스는 속도가 빠르다. 신데렐라의 마법이 풀리는 시간은 왜 이렇게 빨리 오는 걸까. 동화 같은 눈의 나라를 달려 현실로 나올 때, 눈길을 빌미로 느리게 움직였음은 더 머물고 싶다는 아쉬운 마음의 표현이었다.


이튿날 아침이 되어도 여전히 눈발이 날리니 마음까지 덩달아 널을 뛰었다. 이런 날은 뜨끈하게 군불 지핀 온돌방이 그립다. 어린 시절의 엄마가 보고 싶어 눈을 맞으며 신북면 유포리의 시골길을 걸었다. 냉랭한 바람에 에워싸인 빈 들판은 엄마의 손등처럼 거칠었다. 없는 살림이었지만 장 보러 가시면 풀빵이라도 꼭 사 오던 우리 엄마. 나는 그런 엄마를 눈이 빠지게 기다렸었다. 이때의 기다림은 내게 기분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래서인가 나 역시 다른 지역을 다녀오게 되면 사소한 주전부리라도 아이들에게 사다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 엄마가 하늘로 올라가신 지 20년이 넘었고, 딸도 나이가 예순을 넘겼건만 엄마는 여전히 보고 싶다. 나이를 먹으니 새록새록 더 그립다.   

고향 마을을 걷는 듯한 시골길 끝에서 외갓집을 닮은 찻집을 만났다. 뜨끈한 방구들에 몸을 붙이고 받아 든 커피는 염치가 없었다. 메인은 차와 전통 먹거리일진대 어쩌자고 향을 이리도 진하게 풍긴단 말인가. 눈 내리는 찻집의 커피는 행복이었다. 쥔장의 미소는 부처를 닮아 있었고 곳곳에 배어 있는 세심함은 지나치지 않고 은은했다.    

  

이 맛이다, 세상살이의 참 맛은. 이런 맛이 좋아 사람을 만나고 길을 나선다. 각자 자기만의 사는 방식은 살아온 삶의 궤적이다. 그런 만큼 타인이 흉내 내지 못한다. 나 역시 보기 좋은 삶을 만나면 닮고 싶다는 바람은 품을지언정 다른 이들의 삶을 따라 할 생각이 없다. 그저 나답게 나만의 시간으로 즐기고 싶다.

그런 까닭에 내게 주어진 삶의 시간에 충실하고 싶다. 말이 통하는 사람들과 즐거움을 공유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큰 기쁨은 없을 것이다. 노후의 시간이 다가오고 신체의 건강은 조금씩 그 힘을 잃어가겠지만 정신의 건강은 더욱더 활성화될 것이다.       

 

행복하게 노년을 맞이하고 싶다. 만족스러운 노후는 인생 성공의 결과물일 테니 기분 좋게 그 맛을 기대하련다. 그렇다고 일은 안 하고 유희적인 놀이만 즐기는 사람이라 오해하지는 마시라. 내 특기가 일도 놀이로 만드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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