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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람 Oct 18. 2023

착각은 자유, 내게도 구멍이 있었네

아무리 착각이 자유라지만 내게는 구멍이 없는 줄 알았다. 모순을 모순인 줄 모르고 무심히 지나쳤거나 의례히 그러려니 하고 넘겼기 때문일 것이다. 언제부턴가 나는 장래 희망이 ‘멋진 할머니’라고 떠벌리고 다녔다. 할머니가 되면 좋은 할머니 노릇도, 멋진 할머니 역할도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사는 아파트 엘리베이터 안에서였다. 네다섯 살 돼 보이는 여자아이와 젊은 엄마가 탔다. 아이가 사랑스러워 가까이 다가가 말을 붙였다. “......난 옛날 얘기도 많이 아는데...” 엄마가 내 말을 냉큼 받더니 다시 아이에게 말했다. “와~, 할머니는 옛날이야기를 잘하시나 봐.”

‘헉! 내가 할머니라고?’ 당황스러웠다. 한 번도 할머니란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은퇴 전에 누군가가 “아줌마~” 하고 부르면 나를 부르는지 몰랐던 것과 같은 경우였다. 사회생활을 하는 여성으로 직함이나 이름으로만 불러지다 보니 스스로 아줌마임을 잊고 살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할머니가 적응되지 않았다. 집에 들어온 남편에게 낮에 있었던 일을 얘기하며 물어보았다.    

  

“여보, 내가 정말 할머니처럼 보여요?” 남편은 아무렇지 않게 내 뒤통수를 한 방 쳤다.

“당연하지 이 사람아~, 당신 나이가 몇인데.”     


잊고 살았다. 머리카락이 좀 빠졌고 백발을 검게 감추긴 했지만 여전히 예전과 다름없어 보인다고 생각했다. 다시 거울을 들여다보니 잔주름 자글자글한 얼굴이 탄력도 없어 보인다. 생각해 보니 내 친구 중에는 이미 초등학교 5학년 손자를 두고 있는 아이도 있다. 나 스스로만 나이도 모습도 할머니임을 의식하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은 어엿한 8개월 차 진짜 할머니이다. 아기를 앞에 두고 내 입으로 얼마나 많이 할머니 소리를 했던가. 그런데 어제 오후 또 사달이 일어났다. 역시 아파트 엘리베이터 안에서였다. 젊은 아빠와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보이는 아들이 탔다. 아이가 공부방을 가는지 16층에서 내릴 준비를 하자 아빠가 얼른 말했다. “할머니한테 인사하고 내려.” 엘리베이터 안에는 우리 셋만 있었으니 할머니는 영락없이 나 아닌가. 내리는 아이에게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며 태연한 척했지만 무척 쑥스러웠다. 안 맞는 남의 옷을 입은 것 같았다. 그래서 할머니란 호칭을 자신의 손주로부터 직접 들어보지 못한 태오 할머니는 지금도 할머니가 낯설다.      


또 하나의 구멍은 공간 감각이 빵점이라는 것이다. 나는 자연 속에서 걷는 것을 즐긴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오지 탐험도 떠날 수 있을 만큼 걷는 것도 씩씩하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길치에 방향감각까지 둔하다. 낯선 건물에서 나올 때면 출구를 찾기 위해 몇 번을 두리번거린다. 늘 가는 건물을 들어갈지라도 오른쪽 왼쪽을 본 후에 비로소 가야 할 방향을 잡는다. 그렇지 않으면 반대 방향으로 가기 일쑤이다.

아들아이가 고등학생일 때는 학교가 집에서 멀어 내 차로 등교시킨 후 출근을 했다. 길이 눈에 익을 때까지 내비게이션을 의지했음은 물론이다.  

“허, 참! 이해할 수가 없네. 그렇게 많이 다녔는데 아직도 길을 몰라?” 남편은 이해하지 못했다. 한두 번 갔다 오면 바로 알아야지 어떻게 모를 수 있냐는 것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오랜 기간 사고 없이 운전을 해왔다. 나의 절친 내비게이션이 있어서 가능했다.      


다분히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인체는 어느 한 부분이 부족하면 다른 쪽이 발달하게 돼 있음에 틀림이 없다. 내비게이션으로 길을 찾아가는 능력은 남편보다 내가 더 탁월하니 말이다. 남편은 길에 대한 감각이 뛰어나 낯선 길도 스스럼없이 잘 찾아간다. 그러나 내비게이션을 읽는 감각은 나를 따라오지 못한다. 그래서 가끔 남편과 다른 지방을 갈 때면 운전하는 남편에게 큰소리를 친다.

“사람이 어쩜 내비게이션을 제대로 읽을 줄 모르지? 감각이 그렇게 둔해서 어떻게 운전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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