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 주머니 속에는 언제나 가고 싶은 곳이나 하고 싶은 일들이 들어 있다. 모든 것을 다 이룰 수는 없겠으나 기회가 된다면 꼭 실행에 옮기고 싶은 것들을 넣어둔 것이다. 베트남의 메콩강 수상시장에서 쌀국수 사 먹기도 그중의 하나였다. 친한 후배 명순이 1년간 베트남으로 파견 근무를 떠난다고 할 때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나를 위해 나가는 것 같았다.
비용을 아끼려고 늦은 시간에 호찌민행 저가항공을 탔다. 그리곤 잠을 자기 위해 와인을 주문해 마셨다. 등이 축축해지고 현기증이 일었다. 화장실에서 손이라도 씻어볼까 싶어 통로로 나갔다. 까무룩 죽었다 깨어났다. 승객 중 누군가가 승무원에게 알려주었단다. 승무원은 ‘와인이 나와 맞지 않았나 보다’고 했다. 이런 일도 ‘새옹지마’라 할 수 있을까. 비좁은 좌석을 벗어나 남은 두 시간가량의 비행을 승무원 전용 공간을 차지하고 누워서 갔다. 제주항공 승무원들의 친절이 드넓은 하늘을 덮고도 남았다.
메콩강을 가려고 명순과 껀터행 슬리핑 버스(Sleeping Bus)를 탔다. 명순의 친구 한 명이 함께였다. 현지인이 주로 탄다는 이 버스는 쿠션감 있는 이층 침대가 좌석처럼 연결되어 있었다. 방에 들어가듯이 신발을 벗고 차에 올라 누워서(또는 자면서) 목적지를 가고, 버스 안내원이 나눠준 처음 보는 과일을 소금에 찍어먹었다.
중간 휴게소에서 화장실을 가려고 버스에서 내릴 때였다. 출입문 앞에서 안내원이 슬리퍼를 나눠주었다. 이렇게 흥미진진한 여행이라니. 유쾌, 상쾌, 통쾌가 보기 좋게 삼합을 이루었다. 가을바람 흉내를 내는 여름 바람에 머리칼이 휘날렸다. 베트남 껀터에 대한 기대감이 쉬고 있던 세포들을 깨웠다.
명순의 수고로움은 완벽하게 빛을 발했다. 메콩강 줄기가 앞마당인 리버사이드호텔을 껀터 거주 한국인의 도움으로 예약을 했다는데 전망이 기가 막히게 좋았다. 마치 내가 중요한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옆구리에 강을 끼고 앉아 점심 식사와 커피 호사를 누렸다. 최고의 서비스와 풍미 있는 음식에 압도되어 영화의 주인공이 된 것 같았다.
뚜벅이가 갑자기 귀빈이 되고 보니 눈에 뵈는 게 없었나 보다. 가끔은 이런 귀족놀이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말이다. 혼자 떠났지만 둘이 되었고, 호찌민에서 셋이 되더니 이곳 껀터에서는 넷이 되었다. 사람 사는 곳 어디서나 정을 나누는 우리는 한국인이다.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 5시에 현지인 선주를 만났고 5시 10분에 메콩강 선착장을 출발했다. 수상시장까지 30여 분이 소요된단다. 베트남 여행의 목적이 메콩강 수상시장에서 쌀국수 사 먹기 아니던가. 그런데 막상 도착해 보니 한국돈 1,000원으로 알고 있던 쌀국수가 한 그릇에 3,000원이란다. 그동안 값이 올랐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혹시 바가지?’란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맛이 기가 막히게 좋은 걸. 쌀국수 파는 아저씨의 미소는 또 어떻고. 국수 1,000원에 쥔장의 미소가 2,000원이어도, 국수 3,000원에 쥔장의 미소는 덤이라 해도 만사 OK다. 미소가 보기 좋은 얼굴은 또 있었다. 맨발로 과일을 팔던 아주머니. 이 분의 웃음은 행복 바이러스였다. 웃음에 빠져 과일을 지나치게 많이 샀지만 아주머니의 웃음소리는 과일 봉지 속에도 들어 있었다.
수상시장에서 일생을 보내는 사람의 하루를 경건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동이 트기 전부터 이미 시장은 열렸고 많은 배에서 상하차 작업이 이뤄지고 있었다. 배에서 양치질하는 아이도, 쌀을 씻는 엄마도 볼 수 있었다. 이곳에서 하루를 열고 닫는 사람의 치열한 생존경쟁을 한 발짝 물러서서 바라보니 숙연해졌다.
쌀국수 한 그릇에 인생이 담겼다 해도 과언이 아닌 현장에서 뉘라고 이들보다 잘났다 말할 수 있을까. 생생한 삶의 현장에서 행복 주머니 속의 희망을 한 줌 꺼내 물 위에 뿌렸다. 정신이 개운하다. 누군가가 “베트남에서 어떻게 놀았어?”라고 묻는다면 다른 말이 필요 없다. 얼굴에 미소를 가득 담고 “자알~!” 이것으로 끝이다.
베트남에서의 새벽은 늘 행복했다. 여명으로 일렁이는 공원을 산책할 때 새들의 지저귐은 보이지 않는 신의 속삭임 같았고, 눈꺼풀을 손으로 뜯으며 일어나 메콩강으로 나갈 때는 사춘기 소녀가 첫사랑을 만나러 가는 것처럼 가슴이 뛰었다. 사람 반, 오토바이 반인 듯 어마어마한 오토바이족으로 심장이 쫄깃했고, 화폐 계산이 낯설어 원화로 100원 꼴인 화장실도 2,000동이란 입장료에 놀라 들어가지 않았다. 많이 웃었으나 역시 나이는 못 속였다. 길을 나서면 사람들로 넘쳐나 숨이 가빴다. 호찌민의 150만 인구와, 껀터의 130만 인구에 적응이 어려웠다. 앞으로 얼마나 더 불쑥 떠날 수 있도록 건강이 유지될지 모르겠다. 부디 진시황제의 말년처럼 불로초를 찾아다니느라 돈과 시간을 허비하지 않기만을 바란다. 아무리 아닌 척을 해도 세월 앞에 장사는 없을 테니.